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죄와 악의 두 가지 위치 [두 마음의 정결]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18 조회수537 추천수0 반대(0) 신고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과 선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선한 일과 선하신 분>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선하신 분께서 선한 일을 하신다고 가르침을 주시며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선한 일>에 대한 것보다는 <영원한 생명과 계명>으로 화법의 방향이 전환되어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려면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선한 일은 필요가 없다는 그런 뜻은 아닐 것이다 봅니다. 선한 일은 선하신 분께서만 하실 수 있다는 간곡한 의미가 있다고 보아집니다.인간은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여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16,17)

하지만 사람은 유혹에 걸려 '하느님의 명령(계명)'을 어기고 결국 선악과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사람은 선과 악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다르게 듣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처럼 선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사람은 하느님처럼 선한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선악과 열매를 따 먹은 사람은, 하느님과 같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엄청 다릅니다. 

사람이 선악과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사람에게는 선 뿐만 아니라 악도 동시에 알게 된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선과 악이 동시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인간은 선을 알면서도 선을 버리고 악을 저지르기도 한다는 설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선하신 한 분 '절대의 선'이 되시는 하느님과 다른 것입니다. 선악과 열매를 통하여 사람에게는 오직 선만이 들어 온 것이 아닙니다. '절대의 선'이 아닌 것입니다. '선'뿐만 아니라 '악'까지도 동시에 들어온 것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로써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람의 첫번째 죽음입니다. 이를 '생물학적인 죽음'이라고 명명합니다. 육적인 죽음이며 자연적인 죽음입니다.  선은 생명의 차원에 속하고 악은 죽음의 차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사람의 두번째 죽음 (둘째 죽음)도 있는데 이는 영적인 죽음 곧, 초자연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영원한 생명과 반대인 영원한 죽음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두번째 죽음은 육적인 탄생 다음에 영적인 탄생인 두번째 탄생(출생)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요한 3, 4 - 6 참조)

첫번째 생물학적인 육의 생명(첫번째 탄생)이 있고 그 다음으로 두번째 영의 생명(두번째 탄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의 생명인 영원한 생명은 분명히 선악과 열매에서의 '선' 하고는 직접적인 절대의 관련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 (즉, 선악과 열매를 따 먹으면) 하느님처럼 되는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생명 보다는 사람에게 첫번째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선'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게 되었고 악을 행함으로써 죽음을 맞게 되어진 것입니다. 하고자 하려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악을 행하게 됨으로써 뱀의 목적인 죽음이 설치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서 7, 18 - 25 참조)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17  ;  7, 21 참조) 

죄와 악에서 두 가지 위치를 보게 됩니다.먼저 죄는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악은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죄는 자기 안에서 자리 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고백성사를 통하여 죄가 자기 안에서 자리 잡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곁에 있는 악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악의 목소리(유혹)에서 이기는 방법은 오직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불순종과 순종의 차이에서 결정됩니다. 하느님의 계명에서 인간이 정한 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은 없습니다. 인간은 선하신 분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불완전한 규정들과 방침들로 사랑을 해친다는 것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원로들, 수석 사제들에게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안의 죄>와 <자기 곁에 있는 악> 때문임에 분명합니다.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은 <사랑의 힘>에서 무기력한 탓입니다. 왜 무기력해 질까요. 이는 자기 안에 죄가 자리 잡았기(축적) 때문이고 자기 곁에 있는 악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하는 영적인 나태성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 혹은 공동체 제자들(수도자들) 안에 죄가 많으면 '죄에 의한 죽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혹은 공동체 제자들(수도자들) 곁에 악이 건재하면 악에 의한 고통이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제자들의 공동체와 가짜 제자들의 공동체는 죄와 악의 두 가지 위치에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없어 하느님의 영(성령)이 죽은 곳에서는 죄와 악이 설치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결합하지 않는 사랑의 힘은 무기력하여져만 갑니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들의 공동체는 부자 청년이 다 지켰다고 하는 규정들과 방침들의 힘과 재물(돈)의 힘과 거친(악한) 삯꾼들의 힘에 있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버려진 이들)의 고통에 일치하신 예수님과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에 결합하는 사랑의 힘에 있을 뿐입니다. 
 







<참 고>  자기 곁에서 노리는 악에 대하여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야고보 4, 7)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4, 8)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