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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11강 복음서로서의 요한 묵시록2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30 조회수396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11강 복음서로서의 요한 묵시록 2

 

+찬미 예수님! 예, 잘 지내셨습니까?

예, 어떻게 요한 묵시록 계속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데 뭐 조금 이해하겠다. 

조금 이제 요한 묵시록이 무서운 책이 아니라 조금 나를 기분을 편하게 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조금 가깝게 이끌어주는 책이다라는 느낌이 조금씩 오시는지

모르겠어요.

 

예,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복음으로서의, 기쁜 소식으로서의 요한 묵시록을 우리가 살펴

봤거든요. 그래서 요한 묵시록을 접근하는데 있어서 어떤 우리의 태도, 마음가짐, 이것이

단순히 세상 종말, 끝날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끝날의 무서운 어떤 징표로서

드러나는 요한 묵시록이 아니라 우리가 부활하신 그분께 온전히 신뢰하는, 신앙을 그분께

둘 수 있는 그런 마음 가짐으로 요한 묵시록을 조금 이렇게 봐야 되겠다. 읽어야 되겠다

라는 그런 어떤 관점을 계속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자, 우리가 마지막으로 지난 시간에 요한 묵시록을 바라보는 관점, 기쁜 소식으로서의

관점 그런 것들을 우리가 살펴봤는데요. 자, 한가지 요약을 하지면은 기쁜 소식, 어떻게

해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가?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행복할 수 있는가?

요한 묵시록은 일곱 번 행복하여라라고 했는데 두 가지만 탁 정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계속해서 강조했던

*요한 묵시록의 행복

1) 부활하신 그분께 부활의 기쁨으로 오늘을, 매 순간을 살아낸다.

2) 우리 삶 안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 우리가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부활을

    표현한다.

 

두 번째 관점, 매 순간을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실천해야 된다. 정말 우리 삶 안에서

구체적인 실천, 적극적인 행동 그 행동을 통해서 부활을 내가 표현할 때 내가 부활의

징표가 될 때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그 어떤 행복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쁘고, 어렵고, 슬프고 이런 환경은 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차적인 것이다라는

것이 요한 묵시록의 관점이구요. 그것 때문에 내 신앙이 휘둘려서 세상의 그 어떤

가치에 끌려가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라라는 것이 요한 묵시록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입니다.

 

자, 이렇게 다 해놓고 이제 그래도 불행은 뭔가? 이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대부분의 어떠한 이 표현들이나 묘사들이

상당히 묵시문학의 그 어떤 무시무시한 장면들이 등장하고 특별히 일곱 개의 나팔과

일곱 개의 대접 그것이 보통 6장에도 잠시 나오지마는 8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어떠한 그 징벌적인 무서운 어떤 징조들이 드러나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가?

 

아무리 기뻐하라. 기뻐하라 하지마는 무서운 게 너무 많다. 예,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들여야 되는가를 오늘 이 시간에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우리가 불행,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불행은 6장, 8장, 9장 그리고 16장 이렇게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나타납니다. 거기에 나타나는 그 대표적인 어떤 재앙들을 보면요

8장과 16장에 보통 드러나는데 일곱 개의 나팔, 일곱 개의 대접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묵시문학의 셩격, 곧 참혹한 재앙의 표현을 담아낸다.

 6,8,9,16장은 불행의 연속이다(탈출 7ㅡ11장)

 

예, 그 부분의 나타난 재앙들이 보통 탈출기 7장에서 11장까지 나타나는,

모세가 이집트로 탈출할 때 이집트 안에서 나타난 재앙들이지요? 그것이 많이 거기에

보여집니다. 열개의 재앙이 우리가 탈출기에서 볼 수 있는데 열개의 재앙 중 여섯 가지

동일한 재앙이 요한 묵시록에 등장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재앙의 모습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뭐 하늘이 까매지고 물이 확 변해

가지고 물을 마시는 사람은 막 죽고, 메뚜기가 막 나타나고 이러한 모습들... 우리가

탈출기에서 다 보던 모습입니다. 자, 그러면 요한 묵시록의 독자의 관점으로 우리가

요한 묵시록이 쓰였을 때의 관점으로 가 봅시다. 가서 가만히 보면, 그 재앙들 쭉 보면,

 

"아이쿠야! 이거 미래에 일어날 정말 세상 끝날에 일어날 무시무시한 징조구나!"라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집트의 어떤 그것을 계속해서 알고 있는 독자가 그러한 재앙을

이스라엘 민족이 거기서 고생하고 탈출할 때의 그 재앙을 알고 있는 독자가 바라봤을

때 "아이고, 이거 옛날의 그 재앙이었잖아!"라고 그렇게 머리 속에서 떠올린단 말이죠.

그래서 왜 이 불행을 기술하고 묘사하는 요한 묵시록이 과거에 있었던 이집트의 재앙을

가지고 와서 묘사하는가?

 

예, 이 묘사는 이미 불행이라는 관점은, 불행은 미래에 펼쳐질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고 그것을 지금 우리 현실에서 재해석을 해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 묵시록

에서 보는 6,8,16장까지 걸쳐서 나타나는 그러한 재앙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재앙을 지금 이 자리에서.

 

* 요한 묵시록에 탈출기의 '재앙'이 묘사된 이유는 '불행'이라는 것은 미래에 펼쳐질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고 그것을 지금 우리 현실에서 재해석을 해 내는 것.

 

왜, 우리 쉽게 생각을 해 봅시다. 옛날에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 지난 세월을 살다보면, "아, 이때 참 고생했는데!" 뭐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면서 오늘의 고생, 오늘의 힘든 것을 "아유, 옛날에 그만큼 했었는데 이거 뭐 못

견뎌 낼 건가?" 이런 식으로 우리가 다시 용기를 얻고자 스스로에게 막 다짐을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뭐 보통 남자분들 다 그러죠? "군대의 고생을... 사회에서 뭔 일이든

못하겠는가?"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이등병에서 기가 꽉 들어갔다가 이제

병장이 돼서 기가 다 풀려서 나오니까 문젠데 우리 장난 말로 그래요. "병장부터 시작

해서 이병으로 끝나서 사회 나오면 못할 일이 없다고."^^*~~~

 

예, 그때 고생만 생각하면, "아, 오늘은 열심히 살 수 있겠구나!"  특별히 또 저 같은

경우에, 외국에서 뭐 물로 안 맞고, 밥도 안 맞고 이런데 가서 고생했는데 이곳에서,

한국에서 어떻게 보면 신부님들이 이렇게 먹고 생활하는 게 보면 분명히 외국보다는

편안하고 좋은 것이 삶이 윤택해졌다. 그래서 반성도 많이 하죠.

 

옛날에 이렇게 이렇게 살았고 조금 고생도 했지마는 거기에서도 기쁨을 얻고 살았는데

어? 요즘 내가 너무 편해졌다. 그래서 너무 편해졌으니까 내 삶을 한번 되돌아 보자.

그렇지만 또 너무 편해졌는데 또 어려움이 또 온다는 거죠.

 

우리 삶을 살아보면 어려움이 오는 것. 그 어려움을 "아유, 예전에 이런 고생해서 이런

생각을 했고, 이런 마음 가짐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시 현실에 한번 놓아보고 이러한

어려움은 내가 충분히 그러한 마음가짐이라면 살아낼 수 있으리라는 그런 어떤 마음을

그런 마음 가짐을 전해주기 위해서 불행, 특별히 이집트의 어떤 과거에 있었던 것을

현재에 다시 재해석 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불행, 그 어떤 무서운 징조들 그런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재앙들은 요한 묵시록 관점에서 과거에 있었으니까

과거에 다 벌어졌으니까 우리는 이제는 뭐 편하다라는 관점은 아니죠. 이러한

어려움들이 계속해서 앞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것이 13장 10절에 나타나는,

 

* 묵시 13,10: 사로잡혀 갈 사람은 사로잡혀 가고 칼로 죽을 사람은 칼로 죽을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끌려 갈 사람은 끌려가고 칼에 맞아 죽을 사람은 칼에 맞아 죽을 것이다.

계속해서 인내와 거기에 성도들의 믿음을 계속해서 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자, 재앙은 과거에서부터 어느 순간에나 계속해서 우리의 삶의 어려움은 계속해서 있다.

특별히 신앙적 위협들은 계속해서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견제해야할 태도는 그것에

굴복해서 휩쓸려 가지 말고 꾸준히 신앙과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하느님의, 특별히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불행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유입니다.

 

예, 그래서 우리가 특별히 불행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가? 더욱더 구체적으로 한번

텍스트를 읽어 보면서 불행의 의미, 이것이 전적으로 우리를 확 덥쳐서 우리를 무시무시

하게 해서 우리를 떨게 만들고 우리를 휩쓸어 가는 그런 어떤 재앙인가? 재앙이 어떻게,

불행이 어떻게 묘사 되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불행의

어떤 관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9장 1절에서 보면요.

 

*묵시 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

하나를 보았는데, 그 별에게 지하로 내려가는 구렁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이제 나팔을 부는 것에서 이제 재앙의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는데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자,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지하로 이 공간적인 이 흐름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은? 자, 우리가 뭐 아주 단순하게 좋은 곳이예요? 나쁜 곳이예요?

묵시문학에서. 예, 좋은 곳이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고 유다 묵시문학을 우리가

배웠기 때문에 묵시문학에서 천상과 지상, 선과 악 이런 구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지하로. 이거 조금 좋은 곳에서 나쁜 곳으로 가는 공간적

흐름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별이 뭐예요? 별이. 이 별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곱 교회의

천사라는 그런.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천사 그리고

하느님을 따르는 교회, 하느님의 백성들 이러한 개념이 별의 의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 별의 의미(묵시 9,11): 일곱 교회의 천사,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천사

 

별이 땅으로 떨어졌어요. 이 별이 어떻게?

지하로 내려가는 열쇠가 이 별에게 주어졌습니다. 지하를 한번, 불행을 격게 되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신앙인의 어떤 모습이겠죠. 불행을 지금 교회,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불행을 맞딱드리게 된다라는 표현이 이겁니다. 이 불행이 뭔가?

 

그런데 구렁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자, 요기서 우리가 좀 유심히 쳐다봐야 되는 것이

별이 내가 정말 불행을 내가 쥐는 게 아니예요. 정말 그 구렁의 열쇠가 내가 쥐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자, 요기까지만 딱 염두에 두시고 계속해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묵시 9,2: 그 별이 지하로 내려가는 구렁을 열자, 그 구렁에서 연기가 올라오는데 큰

                용광로의 연기 같았습니다.

 

자, 연기라는 것은 우리가 예컨대 뭐 시나이산이라든지 뭐 구름이 쫘~악 이렇게 깔리고

어떤 신적 현현의 어떤 모습에서 많이 등장하지마는 여기에서의 연기는 용광로에서

올라오는 연기. 용광로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십니까? 따뜻하게 좋은 곳이 떠오르십니까?

한증막처럼? ^^*~~~ 불가마? 아니죠. 나쁜 곳에서 지금 올라오는 연기라는 말이지요.

어떤 안 좋은 불행이 뭔가 시작한다는 그런 분위기를 조금씩 만들고 있습니다.

 

* 묵시 9,2: 해와 대기가 구렁에서 나온 연기로 어두워졌습니다.

 

자, 어둠. 예, 다 가립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그 빛, 그 빛이 이 세상을 처음 창조

하실 때에 처음으로 첫째날 창조 하신 게 빛이였습니다. 그죠? 하느님 창조를 연기로

가려버립니다.

 

*묵시 9,3: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들이 땅에 퍼졌습니다. 그 메뚜기들에게 권한이

                주어졌는데

 

그 메뚜기들이 뭘 하는가? 자, 메뚜기 그러니까 아까 제가 말씀 드렸던 예, 떠오르시죠?

뭐가? 예, 탈출기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죠? 메뚜기들에게 권한이 주어졌는데

이 대목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메뚜기가 이제 활동을 뭔가 해야겠지요. 뒤에

그런데 고난이 주어졌습니다. 자기 혼자 하는 게 아니예요. 자기 혼자 함부로 못해요.

 

예, 이것도 수동태로 쓰여졌습니다. 아까 제가 주어졌습니다라는 것을 머리 속에 딱

가지고 계시라고 그랬습니다. 이제 불행이 시작하는, 불행이 주어진 거예요.

여기도 메뚜기가 분명히 무슨 역활을 할껀데 그 역활로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또 잘 보시기 바랍니다.

 

*묵시 9,3: 땅의 전갈들이 가진 권한과 같았습니다.

 

이 전갈, 전갈은 악의 상징입니다.

 

* 뱀, 전갈, 용: 악의 상징(유다 전통)

 

자 뭔가 안 좋은 걸 메뚜기가 하겠다는 것이지요.

 

* 그것들은 땅의 풀과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치지 말고, 이마에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 이 메뚜기들은 딴 것 건드리지 마라. 누구를 건드려요?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 인장이 찍히지 않았다? 이거 우리가 어디서 봤습니다. 가끔씩 제가 말씀드렸는데

어디냐하면, 십사만사천 명을 열두 지파에서 뽑아낼 때 그때 이 뽑아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인장이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이죠.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를 두는 사람

이라는 것이죠. 그럼 여기서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고 하느님과 상관 없는 어떤 의미에서 우상 숭배예요. 하느님을 떠나는 행위

지요. 죄죠. 죄

 

*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묵시 9,4):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고 하느님과 상관

   없는 죄인들

 

우리가 죄라는 단어 이걸 가지고 우리가 머리 속에 떠오르는 건 율법적인 것, 윤리

도덕적인 것 이것만 떠 올리는데 죄의 1차적인 의미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일주일을 살면서 간혹 이런 분들이 계세요. 그 일주일을 살면서 ,

아니지 한 석달을 살았다고 칩시다.

 

석달을 살았는데 고해성사 탁 봐요. 고해성사 보시는데 예, 그 석달 을 살았는데

고해성사 탁 봐요. 고해성사 보시는데 예, 그 석달을 살면서 지난주에 미사 뭐 가족끼리

어떻게 여행가서 미사 빠졌습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 그러십니다.

 

그때는 제가 좀 붙들고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 고해소에서 막 들어요.

그런데 미사 시간이 막 이렇게 있으니까 예, 자매님, 뭐 형제님 나중에 저하고 뭐 면담

하시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제가 환영할테니까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이렇게

고해성사를 드려요. 성사를 보러 오신 것만 해도 큰 용기시거든요.

 

그런데 인제 뭐가 제가 말씀드리고 싶으냐하면 죄라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컨대 미사는 꼬박꼬박 잘 나와도 일주일을 살면서 하느님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세상의 흐름대로 살았다가 "아, 맞다.이제 주일이네. 성당

가자" 

 

예, 하느님을 잊고 사는 것. 이거 친구 관계로 하느님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이 내 친구인데 한번도 안 찾다가 "어이쿠야! 내 친구 한번 볼때 됐구나!"

전화해서 "보자!" 이러면 그 친구 기분이 어때요? 기분이 나쁘십니까?

그런 경험이 있으신 거 같애요. 주위에 그런 친구들이 있어요?

 

네, 그래요. 그러한 모습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가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이 죄라는 건 관계성이거든요. 관계성. 그래서 죄로 이렇게

그 어떤 하느님을 멀리 했던 것 이것이 하느님의 인장을 받지 못한 사람.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하지 않은 것이지요.

 

예, 그래서 우리가 에덴 동산에 보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죄를 지어서 첫 번째로 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담과 하와의 행동이 가려요. 가립니다. 나체에서, 알몸으로 있다가

가립니다. 더더구나 뒤에 가서 하느님이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요.

내가 가렸기 때문에 나도 그냥... 이게 옷을 가려 입는다는 것은 그만큼 이렇게 시야가

우리 옷 벗고 다니면 뭐 친근함을 느낍니까? 아니면 약간 좀 ...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성경에 에덴 동산에서 나체라는 것은 하느님과 그만큼 친밀히 일치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인장을 우리가 받지 못했다.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멀리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메뚜기들이 예, 해치라는 명령을 받는데 4절에 명령을

받았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명령을 누가 했겠습니까?

 

예, 여기 보이지 않는 주체가 있습니다. 이 주어가 빠져 있죠. 어떤 의미에서

예, 누가 이 권한을 줬고 명령을 줬는가? 예, 이것이 보통 우리 성경을 쭉 읽다가 보면

히브리적 어떤 관점도 그렇고 그리스 말 관점도 그렇고  이런 주어가 빠지는데 여기서

신적인 자리, 신의 자리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주체로 삼는 식으로 우리가 해석을 해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수동태가 쓰였을 때는.

 

* 묵시록 9장 4절의 명령을 내린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많은 경우 수동태인데 누가라는 게 없어요. 성경에. 그때는 하느님이시구나라는 생각을

우리가 성경을 읽으시면서 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명령을 받았습니다.

 

* 묵시 9,5: 그러나 그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그러나 죽이지는 마라라고 합니다. 우리 지난 시간에 3이라는 숫자에서 삼분의 일을

봤습니다. 삼분의 일이라는 것은 삼분의 이가 있죠? 예, 그것도 아주 제한적인 어떤

숫자의 개념. 재앙을 해도 제한적인. 이 제한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못한 이들에게

어떤 행해지는 그러나 이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심판, 이 징벌은 "세상 사람들, 너 못된 놈, 너 없어져. 사라져!"

이 개념이 절대 아닙니다. 없어져, 사라져라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인간들이죠.

카인과 아벨을 보시기 바랍니다. 카인과 아벨에서 제물을 바치는데 아벨 것만

하느님이 좋아하시니까 카인의 행동이 어떠합니까? 화가나서 그냥 들로 나가자고

그럽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은 죽음입니다.

파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으셨어요. "네 동생 어디 갔느냐?"  "모릅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통 모르겠다는 거죠. 인간의 태도라는

것이죠. 그런 태도가 남을 내가 싫다고 해서 "없어져, 너는 아니야, 내 눈 밖에서 사라져!"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가는 방향성은 죽음이고 파멸이라는 것을 우리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입장은 정말 나를 따르지 않고 나를 거부한 사람도 죽이지 마라.

예,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 이것을 우리가 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기서 덧붙여서 하느님은 옳고 그름, 그르다고 해서 이것을 제외시켜 버리고

옳은 것만을 취하시는 하느님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어디서 느낄 수

있느냐하면,

 

창세기 첫 번째 나오는 창조설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까 빛이 생겨라 그랬죠?
빛이 생기라 하니 빛이 생겼어요. 빛이 생겼으면 빛이 좋은거죠? 우리가 요한 복음,

요한계 문헌의 관점에서 보면 빛과 어둠이 이원론적으로 대비가 되는데 이 이원론적인

이분법적인 사고를 거기에 놓지 마시고 하느님은 빛을 만드셨지마는 어둠을 허락

하시고 받아들이시고 어둠과 함께 놓으셔요. 왜?

 

빛이 있는 것은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고, 나중에 그 창조 사업이 다

끝났을 때에 그것을 바라보고 하느님은 좋다고 표현하셔요. 보시기에 좋은 것들이예요.

좋은 것들은 빛만이 좋은 것이 아니예요. 예쁜 것만 좋은 것이 아니예요. 빛이 있게 끔

좋은 것이 되려면 나쁜 것이, 어둠이 어떤 의미에서 같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가 뭡니까? 밀과 가라지 이야기에서 밀이

자랐을 때 뭐가 옆에서 같이 자라지요? 제자들이 저거 그냥 확 뽑아 버릴까요?
어떻게 할까요? 라고 하니까 뭐라고 그러십니까? "놔둬라. 종말 때, 심판 때..."

하느님의 영역이예요.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거죠. 심판은.

 

그런데 인간이 꼭 가리려고 합니다. 인간이 가려서 뺄려고 막 그러고 없앨려고 합니다.

하느님은 없앨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배려하고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창조의 원리 안에 그대로 드러난다. 예, 그래서 우리가 그러나 그 사람들을

죽이지 말고, 불행을, 징벌을 주고하자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그 어떤 다 없앨려는 그런

관점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마지막에 우리 천상 예루살렘을 봐도 악을 행하는 자, 거짓을 일삼는 자는 천상 예루

살렘에 못 가는 거예요. 우리는 새 하늘 새 땅 오고 천상 예루살렘이 왔다니까 헌 것들

나쁜 것들, 보기 싫은 것들 다 없어지고 모든 게 다 새롭게 되었다라고 머리 속에 싹

집어 넣을 수 있는데 요한 묵시록의 관점은 그런 세상이 오더라도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도 있고 그 거짓을 일삼은 사람들이 갈 자리는 불과 유황의 자리다.

 

그대로 냅두고 있는, 놔두고 있는, 내려 놓고 있는, 없애는 것이 아닌 그런 관점으로

계속 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이원론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이렇게 읽으실 때에 자, 계속해서.

 

* 묵시 9,5: 그러나 그 사람들을 죽이지 말고 다섯 달 동안 괴롭히기만 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 괴롭힘도 다섯 달입니다. 이 시간은 왜 다섯 달입니까? 5개월이면 며칠인가?
왜 이 기간인가라고 이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마시고 아, 제한적 숫자구나,

제한적으로 괴롭히게 되어 있구나, 영원한 게 아니구나. 영원성과 제한성은

요한 묵시록에서 대비가 됩니다. 영원무궁토록은 하느님, 구원, 그 자리에서

시간적 개념이 영원무궁토록 되어 있구요. 불행, 징벌 이쪽에서는 제한적인

것입니다.

 

*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영원무궁토록': 하느님, 구원의 시간적 개념

*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불행, 징벌': 제한적, 시간적 개념

 

예, 고것도 대비돼서 요한 묵시록은 시간적으로 고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괴롭히기만 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여기도 허락되었습니다.

 

* 묵시 9,5: 그 괴롭힘은 사람이 전갈에게 쏘였을 때와 같은 괴로움이었습니다.

 

얼마나 아프겠어요. 전갈에 쏘여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예, 그런 아픔을 메뚜기들이 그렇게 주는데 메뚜기 자체가 자기의 힘이 아니라

주어진 힘입니다. 자, 요 구절을 우리가 9장 1절에서 5절까지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불행은 제한적이고 불행은 그 자체로 힘이 없다.

하느님의 영역 안에 하느님께서 배려 하셔야만 메뚜기 그런 징벌이 시작될 수

있다라는 관점을 요한 묵시록이 말하고 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불행'은 제한적이고 그 자체로 힘이 없다.

 

그래서 이 불행이라는 거, 징벌이라는 거, 요한 묵시록의 관점에 있어서는 영원히

징벌 자체가 힘이 있어서 우리를 잡고 흔들어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 역시

하느님의 영역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된다. 그분께 나아간다면 이러한 징벌들 이런

어려움들은 아무런 힘을 못 뻗치겠지요.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불행은 큰 힘이 되지 못한다. 부차적인 것이다라는 그런 관점에서 요한

묵시록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 그러면 이 불행을 "별 것 아니네!" 이렇게 바라

보는데 이 불행을 이야기하는 그 처음과 끝은 기쁨을 이야기해요. 요한 묵시록이.

 

방금 9장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죠? 징벌이 있는데 그 징벌이 시작될 때 어떤

차원이 펼쳐지냐 하면, 8장1절에서 5절, 그리고 방금 우리가 9장을 봤습니다.

그러한 징벌들이 펼쳐지기 전에 8장 1절에서 5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묵시 8,1: 어린양이 일곱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일곱, 우리 숫자 지난 시간에 봤었으니까 7은 완전 수, 충만하다. 왜? 왜 그럴까요?
자, 3은 하느님의 영역, 4는 지상, 세상의 것. 그러니까 하늘과 땅이 만났어요.

완전 충만하고 완전한 숫자다. 

 

예, 그래서 우리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을 때라고 우리가 창세기

1장 1절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아, 하늘과 땅만 만들었구나, 그 다음에 땅에다가 뭐

요렇게 요렇게 만드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하늘과 땅이라는 개념은

모든 것. 그래서 하늘을 의미하는 3, 땅을 의미하는 4. 유다 전통의 근거해서 그래서

완전 수, 충만함.

 

* 일곱째 봉인을 뜯으신 것: 어린양께서 다 보여 주셨다.

 

다 보여 주시고 다 드러내셨다. 다 보여 주시는, 모든 것을 보여 주시는 그 마지막

그 자리에서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늘에는 반 시간 가량 침묵이 흘렀습니다.

 

* 묵시 8,1: 하늘에는 반 시간가량 침묵이 흘렀습니다.

 

다 드러내 놓고 반 시간 가량 왜 조용했을까? 자, 조용해 볼까요?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에 가끔씩 이럴 때가 있어요. 우리 한국 사람들도 뭐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한참 막 서로 수다를 떨다가 특별히 식사 시간에 막 밥 먹다가 막

이야기 하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뚝 끊겨 가지고. 예, 조용해지는. 그러다가 조금

서먹서먹하니까 또 얘기를 다시 시작하는. 잠시 조용하는 것을 우리가 많이 경험

합니다. 그죠?

 

그때 우리 어르신들이 뭐라고 그러셔요. 그때? 뭐 지방마다 약간 다른 거 같은데.

귀신이 지나간다고. 그런 표현을 예, 경상도에서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프랑스에서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 관점이 다른 것 같애요. 프랑스의

어른 신부님들이 이렇게 하셨어요. 조용하니까, "천사가 지금 왔다 갔다고."

 

예, 천사가 귀신이겟죠. 우리 표현으로 하면. 뭐 귀신은 나쁜 거고 천사는 좋은 거다.

뭐 이런 걸 떠나서 어쨌든 영적인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그래서 이 조용해지는

이 순간 중에서 우리가 요한 묵시록에서 이런 침묵기가 여섯 개째 뭐 봉인 그리고

여섯 개 나팔, 뭐 여섯 개 대접. 뭐 끝나고 일곱 째에 고 틈에 요 침묵이 있습니다.

침묵은 뭐냐?

 

* 침묵: 회개 하기를 바라는 그 순간

 

이렇게 다 보여 주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할래?

자, 마지막 것 보기 전에는 그 마지막은 어떻게 영접한다고 해야 될까요?

이렇게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음 가짐을, 자세를 새롭게 한다.

예컨대 우리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뭐 쇼나 프로그램 같은 거나 아니면 뭔가 

대단한 마지막의 어떤 주인공이 나올 때 이럴 때 뭐 북도 따르르르... 막 치고 

약간 좀 끌지 않습니까? 로또 복권 마지막을 할 때. 

 

하여튼 그런 분위기죠. 로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마는. 그러한 어떤 기다림을

주면서 마지막을 정말로 완전하게 정말 충실하게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그러한 

표현이 침묵이라는 것을 요한 묵시록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빨리하고 마지막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하느님께 온전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우리를 내어 맡기는 자세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자, 한번 그 자세로 뒷 구절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8,2: 그리고 나는 하느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에게

                 일곱 나팔이 주어졌습니다. 

 

자, 나팔은 재앙을. 막 불면 안 좋은 게 나타나요. 그런데 하느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요. 자, 아까 고난이 주어졌다고 그랬지요. 예, 주어진 거고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일곱 천사 그 재앙이 이렇게 펼쳐지는 것들이 완전하게 펼쳐진다는 

것이죠. 근데 거기 한번 이러한 상황이 마치 전쟁을 나가면서 엄청난 것이 펼쳐질 

것 같은데 이 상황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하면,

 

* 묵시 8,3: 다른 천사 하나가 금 향로를 들고 나와 제단 앞에 서자

 

제단입니다. 제단에서 뭐를 할까요? 제사를 지내지요. 제사를 지내는데 우리가 이

성경에서 제단이 제일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어디냐하면 노아의 홍수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가 홍수가 끝나고 첫 번째로 하는 일이 뭔지 아십니까?
제단을 쌓는 거예요. 

 

우리 그 노아의 홍수를 제2의 창조라고 우리가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악이 너무 가득

해서 하느님이 실망하셔가지고 물로 다 덮어 버리는데 배만 동동 떠가 있어요.

자, 요 장면이 요구조가 어디에 똑같으냐하면 창세기 1장 1절에 물로 다 덮여 있는데

하느님의 영이 거기에 떠돌고 있어요. 그래서 물이 빠지고 물과 물이 갈라지고 그죠?

구별이 되면서 창조가 이야기가 됩니다. 

 

노아의 홍수 역시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에서 배만 딱 있고 그런 게 있는데 고 새로운

창조가 되자마자 바로 한 것이 노아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이제는 악으로 안 살고. 그런데 창세기 창조 이야기에는 창조 다 해 놓고 바로 나오는

것이 원죄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노아의 이 제2의 창조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바로 나오는 것이 하느님과 

일치하겠소라는 그것입니다. 조금 관점이 다르죠? 그렇게 일치 하고자 하는 제단은

하느님을 만나는 거죠. 일곱 나팔을 준비하고 재앙을 준비하는 그 전 단계 이 상황이

하느님께 제단을 쌓아서 하느님께  일치하는 장면이 펼쳐지는 거예요. 제단 앞에 서자

 

* 묵시 8,3: 많은 향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함께 어좌 앞 

                 제단에 바치라는 것이었다. 

 

많은 향이 그에게 주어졌는데 천사에게 주어져 성도들의 기도를 하느님의 제단 앞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 묵시록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7장에 나타나는 그 

셀 수 없는 군중이 하느님의 어좌 앞에서 구원을 외치는 행동입니다.

 

특별히 또 5장에 나타나는, 5장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어린양이 모든 세상 사람들을

모든 민족들을 이렇게 사 가지고 속량하셔서 하느님께 이끌어 가는데 거기에 성도들의 

어떤 기도가 하느님께 어우러져 올라가는 그런 모습이 분명히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 천상의 구원이고 좋은 것이죠. 예, 그러한 장면이 재앙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 묵시 8,4: 그리하여 천사의 손에서 향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다음에 재앙이 펼쳐집니다. 뭐냐? 재앙은 기도, 성도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분께 신뢰를 두는 사람하고는 어떤 의미에서는 관계가 없는 것이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내가 성도들의 자리에 있다면,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린다면 그 

앞에 예컨대 일곱 천사가 있고, 천사가 나팔을 불면, 재앙이 펼쳐지면, 

 

"아이구야, 어떻하냐?" 이러지 "어이구 나한테 재앙이 펼쳐지는구나!" 이렇게 생각

하는 사람 없죠? 예, 내가 신앙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뒤에 재앙이, 불행

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아유, 봐라. 네가 열심히 안 사니까 그렇게 벌 주셔서 

빨리 돌아와라!" 는 어떤 의미에서 편안한 생태지 

 

"어이구, 내가 벌 받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신앙이, 믿음이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그런 열정이 없는 사람이 불안에 떨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요한 묵시록의 관점이 그러한 것입니다. 

 

* 묵시 8,5: 그 뒤에 천사는 향로는 가져다가 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아 땅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천둥과 요란한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죠. 예, 그래서 우리는 재앙과는 조금 불행과는 약간 멀리

있는 모습입니다. 사실 이러한 불행은 우리가 이러한 불행이라는 어떤 것은 10장에

 

* 두 증인(묵시록 10장) : 불행을 겪고 그러나 하느님 말씀으로 꿋꿋이 견디고 하느님

말씀을 증거하고 살아가는 삶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다시 들어 올려져 살아남.

 

이 두 증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다시 들어 높임을, 다시 하느님께서 살려 내시는 장면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러한 불행의 끝자락을 우리가 보면요. 끝을 보면 처음도 이렇게

천상에서 하느님과 좋은 어떤 모습. 그러나 재앙이 시작되지만 이제 끝자리에 가서 보면

이 두 증인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 그리고 또 우리가 11장에서도 볼 수 있지마는 재앙이

다 이렇게 끝나고 나팔이 다 불어지고 했을 때 뭐가 또 얘기가 되느냐하면 

 

* 묵시 11,19: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나면서,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처음에 하늘로 시작을 했지요. 그 다음에 재앙이 있지요.

그 다음에 11장의 끝이 하늘이예요. 그런데 하늘이 여기엔  더 신기한 게 더 우리가

머리속에 딱 "아, 이거는 다르다!"라고 딱 떠올려야 되는 게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립니다. 

 

사실 성전 개념을 우리가 이야기하다보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사실

지성소에 있는 거기는 대사제가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는 곳이예요. 대사제만이.

우리 같은 사람은 못 들어가요. 우리는 예컨대 예수님 시대에 만약에 우리가 있었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죠. 유다인도 아니고. 예건대 우리가 있었다면 우리는 아예 

그 성전 근처에 이방인의 뜰 거기나 들어갔겠습니까?  

 

아예 하느님의 현존인 지성소에는 근접을 못 하는 거지요. 특별히 또 예루살렘에 있었던

여인들도 차별 대우를 받았지요? 예루살렘의 성전 구조는 당시의 사회적 계층의 구조

였죠.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이름도 저는 들을 때마다 저는 기분이

살짝살짝... ^^*~~~ 좀 여성 운동 하시는 분들 기분이 나쁘셨을 거예요. 왜냐?

 

여인의 뜰과 이스라엘의 뜰이예요. 여자는 이스라엘 사람 아닌가?

예, 이스라엘의 뜰, 여인의 뜰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의 뜰을 지나서 지성소에

사제들 그리고 대사제가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는 구조. 당시의 사회적인 구조죠.

대사제, 사제, 그리고 남자, 여자, 그리고 외국 이방인들. 이것이 사회적으로 차별

대우를 그 구조에 따라서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성전 구조를 보게 되는데

 

여기서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그 안에 있는 계약 궤가 나타나고 다 열어 놓는 거예요. 지금 뭐 다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보편주의는 우리가 요한 묵시록 시작하면서 조금

말씀 드렸습니다. 그만큼 모든 걸 열어 놓겠다느 것이죠.

 

자, 그래서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들이 떨어지고 이런

것들이 이건 징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구약의 어떤 전통들이 어떤

묘사 방법, 하느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나신다는 거죠. 이 징벌을 통해서.

 

그래서 징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천상의 모습을 시작으로 해서 징벌이 나오고

다시 천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온전히 열려 있는 모습으로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 된다는

것은 징벌은 천상의 삶에 대한 하나의 증표입니다.

 

* 징벌은 천상의 삶에 대한 하나의 증표이다.

   묵시 8장(천상) ㅡ 묵시 9장(징벌) ㅡ 묵시 10장(천상)

 

그러니까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불행의 이야기를 단순히 무서움의 대상이 아니라

아, 우리가 이렇게 살도록 불리움을, 천상의 삶을, 기쁨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채찍질

하시는구나라는 그러한 어떤 징표로서 긍정적인 표징이죠. 긍정적인 표징으로서

불행을 받아들여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어려운 삶이 있구나. 아이구 어려우니까 이거 어떻게 해? 극복하려면 뭐가 좋을까?

아이구 어렵다. 어렵다. 우리 자식이 잘 안 된다. 남편이 잘 안 된다. 우리 집안이 왜

이럴까? 그래서 점집가지 마시고. 그러면 굿을 한번 해야 되나? 뭐 이런 식으로 우리

흘러가고 요고 어떻게 없앨 방법 있을까, 없을까? 이렇게 생각 하는데 그러한 삶의

어려움이 불행이 닥칠 때 이것이 내가 꿋꿋이 더 열심히 살으라는 하나의 표징이구나

라는 부적으로 오히려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적이라고 생각하십

시오. 그냥 내가 꼭 챙겨서 가지고 다니십시오.

 

그래서 열심히 살아가라라는 것이지 요한 묵시록이 뭐 특별하게 세상 힘들어?

그럼 내가 없애 줄께라고 하는 책이 아니라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까? 격려를

주기 위한 책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서로 토닥이면서 열심히 살아가자.

불행이라는 것은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그래서 불행은 어디서 올까? 요한 묵시록이 도 인제 불행의 어떤 근원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하느냐하면

 

* 묵시 9,20: 이 재앙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이 재앙으로, 그러니까 불행이라는 이 재앙들. 이 재앙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도 예, 이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 재앙을 받는 사람들과 같은 일을

같은 입장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 그 고수하고 있는 것이 뭐냐?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 자기

끼리 만든 작품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작품들. 하느님과의 관계성은 잃어 버리고

"아이구, 내가 낸데!" 하는 것. 요것을 가지고 우리가 한번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세상 모든 곳곳이 같은 말, 같은 낱말을 사용하고 있던 그 때에 자, 우리의 이름을

드높이자."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쌓아 올리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예, 그렇게 생각한 어떤 개념인데요. 바벨이라는 뜻 자체가 '섞이다. 얽히다.'라는

것이예요. 그런데 이 섞이고 얽히는 것이 어떻게 얽히냐하면, "아, 너도 그런 생각이

있구나. 너도 그렇게 생각 되구나. 아, 나는 내 생각은 이런데." 이러한 서로 조화가

아니라 그냥 같은 말, 같은 낱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었어요. 여기엔 하느님이 없어요. 

"오, 하느님 당신 생각은 그러십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라는 어떤 하느님과의

관계성의 조화가 아니라 그래서 저는 온전히 당신께 나아갑니다가 아니라 획일주의,

전체주의, 집단주의가 돼 가지고 내가 내 이름만 올리면 되는 것이지 거기 주위에 

나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들은 용납하지 않겠다라는 것이 바벨탑 이야기

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저희 손으로,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은 하느님을 잊어 버리고 

자기 안에 빠져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를 재앙으로 우리를 불행으로 이끈다

라는 것이지요. 

 

* 묵시 9,20: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 단순히 이것을 종교적으로 우리 집안에 돌로 금으로 뭐 이렇게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어떻게 막 비는 것.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가치나

하느님의 가르침은 이건 내 팽게치고 인간적인 가치관이나 "아이구, 그래도 현실을

살아가려면 돈이 최고지, 돈만 있으면 됐지 뭐... 그렇게 살려면 건강이 최고지..."

 

필요한 것이지요. 필요한 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둔갑 시키시는 우리의 나 중심적인

사고. 이런 것들이 다 우상숭배라는 것이죠. 물론 구체적으로 우리가 여기 요한 묵시록의 

시대적 배경에 있어서는 황제 숭배라든지 아니면 그리스 문화에서 등장하는 많은 신들

그것을 우상숭배 했던 그런 실천적인 어떤 종교적인 그런 모습도 분명히 우상숭배가 

있었지요. 그러나 거기에 못지 않게 우상숭배라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를 절대화시켜 

버리는 것.

 

* 우상숭배: 상대적이고 세상적인 가치들을 절대화 시키는 것.

* 돈이나 건강 등 필요한 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둔갑시키는 우리의 나 중심적인

   사고 이런 것들이 다 우상숭배라는 것이죠.

 

상대적인 세상을 절대화시키는 그 모든 우리들의 나 중심적인 모든 행동들이 불행을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나를 자꾸 꾸미려고 그러고. 나를 챙길려고 할 

때 그때 우리는 불행해지는 것의 시작이죠. 너를 생각하고, 우리를 생각할 때 어떻게

보면 행복은 오는 거 같애요. 왜냐? 인간은 기본적으로 만들어질 때 협력자입니다.

 

인간의 첫째 의무가 관계에서 아담을 만들고 하와를 만들어 내실 때 알맞은 협력자를

주시기 위해서 너와 나는 협력자지 내것을 위한, 나만을 위한 도구로써 상대방을 

생각해 버리고 하느님조차도 그렇게 생각해서 내 작품, 내것을 만들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것이 바로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예,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요한 묵시록이 이 불행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제가 말씀 드렸다시피 이 행복으로 정말로 우리 천상의 어떤 하느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이끌어 가는 하나의 징표로서의 불행이라는 그 생각을 머리 속에 담아 두셔야

되는데 이것은 요한 묵시록의 관점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복음에서, 복음서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불행의 어떤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 13장을 보면요. 어떻게 되어 있냐하면

* 마르 13,24-27: 가장 큰 환난

 

여기에 세상 끝날에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법정에 넘길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너희를 고소하고 가족끼리도 고소하고 막 난리나고 그때는

가짜 그리스도가 내가 그리스도다. 예언자처럼 나타나서 막 이렇게 거짓 가르침을

막 주고. 그때에 어떻게 되어 있느냐하면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입니다. 그 환난에.

그러니까 마르코 복음 13장 24절에

 

* 마르 13,24-27 :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구름을 다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 환난이 안 좋은 것처럼 펼쳐지는 그 환난 속에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다시 말해서

메시아가 오는 하나의 징표라는 것이죠. 그래서 안 좋은 재앙은 어떻게 내가 셀레게 

느껴야 될까요? 아니면 "아유, 무서운거구나. 그것이 끝이구나." 느껴야 되겠습니까?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징표인데 설레이면서 기다려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의 징표가 나타나고 삶의 어려움이 있고 그런 막 재난과 같은 게

있으면 "아유, 이거 하느님께서 나를 더 일치하라는 나에게 보여주시는 징표로구나."

라며 하느님께 더 나아가겠습니다라는 그런 굳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이 막

설레여야 되요.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되겠구나. 그런 마음이 있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예요. 그때를 모른다는 거예요. 언제 오신다는지

 

마르코 복음 13장 32절에

* 마르13,32: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요한 묵시록에도 빨리 오셔서 일치를 이룹니다. 예수님 빨리 오세요."라고 마지막에

그럽니다. "그래, 내 곧 갈께!" 그렇게 말씀하시지마는 지금까지 안 오시고 계시니까

지금 요한 묵시록까지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셨으면 공부할 께 뭐 있어요?

예수님 손잡고 그냥 이렇게 놀러다니시면 되죠?

 

예, 그러니까 지금 그 오시지 않는, 이미 오셔서 보여 주셨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런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어려움이고 한계죠. 이미 맛을 봤는데 아직 완성이 안

됐어요. 그러니까  이 삶의 고초들, 어려움들, 신앙적 위기들은 분명 계속해 있다는

것이죠. 있는 것인데 그럴 때 우리는 마르코 복음은 어떻게  살아라 하는가?

"깨어 있어라."

 

그것이 언제인지 한밤중인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깨어 있어라. 깨어 있는 게 잠자지

말고 그냥 눈뜨고 있으라는 게 아니라 이것은 제가 요한 묵시록의 그 말씀을 지키는

우리 지난 시간에 '지키다'라는 그 말에 대해서 우리가  봤습니다.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라. 꿋꿋이 내가 신앙을 살아라.

 

그렇게 된다면 언제 오시더라도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오시더라도 나는 뭐 정말로

구원 받는 기쁨으로써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다시 한번 또

이렇게 불행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돌아갈  자리는 실천적인 우리 삶의 자세입니다.

깨어있음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돌아가야만 불행이 불행이

아니라 불행이 하느님과의 일치의 기쁨의 상징이 될 수 있음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

라는 것. 그것이 요한 묵시록의 불행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불행을 바라보는 관점': 말씀을 지키는 우리의 삶의 모습

   (깨어 있음)으로 돌아가야만 불행이 불행이 아니라, 불행이 하느님과의 일치의

   기쁨의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어떤 세상,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어떤 기쁨의, 위로와 격려의

그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듣고 계시는 우리

시청자분들과 우리 모든 분들이 삶의 작은 것 하나 안에서도 내가 열정을 가지고

하느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그 안에 우리는 분명히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행복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 우리가 참된 그 행복, 행복의 자리,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은

어떤가를 잠깐 보고 본격적으로 이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그런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 다음시간 예고: 복음서로서의 요한 묵시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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