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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14강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2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14 조회수468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14강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3

 

찬미 예수님! 한 주간 잘 보내셨습니까?

요한 묵시록의 서간문을 우리가 지난 시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그 말씀이 

나의 삶에 어떤 변화와 아니면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라는 어떤 그런 신념이라  할까요?

그런 것들이 조금 생겨나는 것 같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 서간문이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거 저번 시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여기서 언급되는 모든 주제들이 뒷부분에 다 언급된다. 그래서 지금 서간문을 꼼꼼히

잘 읽으셔야 됩니다. 거기서 제가 계속해서 이렇게 뽑아내어서 설명해 드리는 그 부분

그것은 다 뒤에서 다시 반복되기 때문에 제가 설명드리는 부분을 머리 속에 다 잘 담아

두시고 2장, 3장만 잘 읽으시면 요한 묵시록 전체를 다 봤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기에 모든 주제들이 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들이 동시에 우리들의 삶의, 우리 신앙 생활 안에,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

어떤 모습을 다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가라는 그 문제도 우리 머리 속에 한번 이렇게

떠 올려보고 생각해 보고 그래서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 말씀, 그 메세지를

우리가 한번 계속 되뇌어 보는 그런 어떤 우리의 모습이 됐으면 좋겠어요.

 

시작해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2장 8절 스미르나 교회의 천사에게

보내는 이야기에 대해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2,8-9: "스미르나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 난 이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

또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중상을 받는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자 스미르나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에 대해서 이 교회 이름을 가지고 구체적인 상황,

어떻게 보면 에페소 교회도 그랬고 스미르나 교회도 그렇고 페르가몬, 티아티라 이런

교회들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잠시 몇 가지만 딱 흥복(興復: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나거나 일어나게 하다)을 보고 들어가야 아,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왔구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 스미르나 교회는 어떤 상황이었던가? 이 스미르나라는 도시에 대해서 먼저

한번 보자면, 기원전 600년경, 기원전 600년경 그러면 언제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기원전 587년에 뭐가 있었지요?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지요?

남유다는 위쪽 북쪽 아시리아의 영향력, 바빌론의 어떤 침공과 억압 속에 그 영향력

안에 갇혀 있었던 아주 불안한 시기였습니다. 이때에 스미르나 교회, 이스라엘 한참

위쪽에 있는 이 도시는 패망하고 없어진 그런 도시였습니다.

 

* 스미르나: 기원전 600년 경 패망한 도시로 서기 1세기에 새롭게 활력을 되찾은

                 항구 도시

 

그런데 1세기에, 1세기라는 말은 100년 전쯤이겠지요.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기 전

그무렵에 새롭게 활력을 되찾은 그런 항구도시입니다. 자, 요한 묵시록 저자가 요한

묵시록을 쓰면서 스미르나 교회를 보면, 그 도시를 바라보면 어떻겠어요?

 

옛날에 없었는데 다시금 뭔가 살아 움직이는듯한 그런 어떤 도시로 보여지는 것이겠죠.

예, 그래서 죽음에서 새롭게 다시 이렇게 태어나는 어떤 도시의 모습 그러니까 8절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아들을 표현하는.

 

* 스미르나: 죽음에서 다시 태어난 도시 모습

 

매 각각 교회가 사람의 아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떻다구요? 다양한 모습으로

다르게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하다고 그랬습니다.

이 다양한 모습은 그냥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저자가 적은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구체적 상황과 연결된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처음이고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가 이렇게 말한다."라고

2장 8절에 되어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이. 죽었다가 살아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뭡니까? 죽음과 부활이죠? 죽음과 부활.

 

* 죽었다가 살아난 이: 죽음과 부활을 의미함

 

자, 스미르나라는 도시가 죽었다가 다시금 생명을 되찾은 항구 도시로 보여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빗대어서, 연결해서 표현하고 있다라는 점을

우리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리고 스미르나 교회는 티베리우스 로마 황제 숭배, 이건 뭐 어느 교회나 다

마찬가지로 황제 숭배가 이미 그 지역에, 소아시아 지역에 도시마다 강요됐던 그런

어떤 보편적인 성격이죠? 로마 황제 숭배가 강요된 것이고 동시에 이 지역이 다른

도시보다 약간 특징적인 것이 유다인 공동체가, 디아스포라라는 거 있지요?

이 공동체가 특별히 스미르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반감과 박해가 아주

강했던 도시입니다.

 

* 스미르나 교회: 티베리우스 로마 황제 숭배가 강요된 도시이고, 유다인 공동체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반감과 박해가 성행했던 도시.

 

우리가 요한 묵시록 시대적 배경 이야기하면서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갈등의 어떤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렸지요? 특히 얌니아 종교 회의에서 어떻게 합니까?
유다인들이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이단 취급해요. 그전에는 얘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그러는데 뭐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그러구 긴가민가 하는 상황인데 확실하게 공식

적으로 딱 단절을 유다인들이 했던 그 사건이 얌니아 종교회의라는 거죠.

 

거기서 뭐까지 만들어 냈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저주 기도문까지 만들어 낸.

쟤들은 사탄이고 이단이니까 이런 식으로 갈라서는데 이 스미르나 교회가 그 영향을

그대로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이니까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유다

공동체 입장에서 그런 박해가 아주 성행했던 그러한 도시가 바로 스미르나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중상을 받은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라고까지 표현을 합니다. 이거는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빌려서 요한 묵시록 저자가 바라보는 유다 공동체

가 오히려 유다 공동체를 사탄의 무리로. 얼마나 적대적인 관점이 있는가?

 

우리가 요한계 문헌 특별히 요한 복음을 보면요. 공관 복음에 보면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가끔씩 유다인들 이렇게 나오는데 요한 복음에 보면 유다인들이라고

통칭으로 해서 자주 등장합니다. 또 유다인들을 통칭하는데 늘 예수님과 대립각을,

제자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되게 반감을 가진 모습.

 

왜? 요한계 문헌이 쏟아져 나오는 그 어떤 시대적 배경이 그리스도인과 얌니아 종교

회의가 90년이거든요. 그 어떤 이후의 대립각이 그만큼 심했다라느 것이죠. 그런

것들이 요한계 문헌에 어떤 특징으로 그렇게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다시 한번 9절을 보면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가

이렇게 말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죽음에서 이겨내시고 첫 번째로 죽은이드로부터

첫 번째로 다시 태어나신 그분. 1장 4절부터 우리가 첫 시간에 여기서 요한 묵시록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게 뭐냐? 극긍적으로. 결국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표현해 내는 것이다.

 

* 요한 묵시록: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시문학적인 묘사

 

제일 중요한 거.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어떤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죽었다가 생명을 찾은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입니다. 자,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 중요하잖아요. 그 개념이 요한

묵시록에서 등장합니다.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저번 시간에도 말씀 드렸는데 우리 10주년 우리 신부님들, 대구 동기

신부님들하고 이스라엘 여행 가면서 그 중에 또 하나 성지순례 하면서 느낀 게

있어요. 제일 중요한 것? 이스라엘 성지순례에서 제일 마지막에 보통 놓는데가

어디냐?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경당. 왜? 최고 중요한 거 같으니까.

 

십자가의 길에서 쭈욱 올라가서 예수님께서 묻히셨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거기가

역사적으로 확실하다라고는 우리가 아무도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

죽음을 기념하고 그분이 돌아가심을 함께 묵상할 수 있는 그런 경당이 거기 있는데

골고타 언덕이라고 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거기가서 보면 이것이 제일 중요하게 사람들이 거기에서 제일 경건해져요. 정말로

그전까지는 농담하다. 우리 동기 신부님들하고도 가면서도 이렇게 농담하고 장난

치고 이러다가 거기가니까 표정들이 완전히 정말 우리 상가집에 가서 이렇게 탁

있는 그런 표정으로 탁 이렇게 되게 경건해요.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탁 들어가서 보면 예수님 시신을 놓았다라는 편편한 돌이 이렇게 있어요.

거기에 손으로 만지고 친구하고 기도하시고 무릎 꿇고 ... 그 바로 왼쪽에 경당이

있습니다. 그곳에 머리 숙여서 들어가서 예수님 시신이 놓였다라는 그곳. 어떤

역사적인 사실이 맞냐? 안 맞냐를 떠나서 예수님 죽음에 대해서 묵상할 수 있는

그곳에다 손을 이렇게 대고 기도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제가 성경에 천사가

말한 그 대목이 떠 올랐어요. "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사이에서 찾고 있느냐?"

 

왜 우리가 무덤 여기를 그렇게 중요시하게 생각할까? 오히려 지금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 거기서 만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활 하신 후에 나타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래아에서 실재 고기잡는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고기

잡고 있는 현장에 나타나셔서 같이 아침을 드시고 그리고 갈릴래아에서 정말로

여러 사람들한테 나타니시면서 실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보여 주셨던 삶의 자리에로 예수께서는 다시 가셨다.

 

살아 계신 분, 그 살아 계신 분을 만나야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

아닙니까? 아이구, 여기서 돌아가셨구나! 이래 죽으셨구나! 어디서 어떻게 돌아

가시고 사형 선고를 받으셨나? 계속 어떻게 보면 성지 순례의 어떤 분위기가,

프로그램이 죽음의 그런 어떤 장소로 자꾸 이렇게 중점을 놓는 거 같아서 살짝이

제가 성지 순례 하면서 제 개인적인 묵상은 오히려 갈릴래아에서 더 큰 비중을.

 

거기서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가파르나움에서 그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더 촛점을 맞췄

으면 하는 개인적인 어떤 생각을 했습니다.

 

이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 어려움, 저 미래의 어떠한

펼쳐질 어떤 위험한 것, 무서운 것 이런 것들에 촛점을 맞추지 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이분을 어떻게 따라갈 것인가?

내 삶 안에서, 내 신앙 생활에서 부활하신 분을 어떻게 맞아들일 것인가?

거기에 대한 지침이 되고 그런 교과서가 되는 것이 요한 묵시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강의를 하면서 가끔씩 이제 저한테 편지가 오는데 어떤 형제님의

편지가 한통 왔어요. 왔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는데 제가 계속 현신의 부활하신,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어떻게 우리 삶에서 증거해야 되는 걸까? 이것이 요한

묵시록의 어떤 구체적인 목표다. 저술한 의도다라고 말씀 드렸는데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그러한 뭡니까? 미래에 일어날 것만 같은 사건들, 종말에 이렇게 펼쳐질

꺼라고 요한 묵시록에 쓰여졌는데 왜 신부님은 현실만, 현재만 이야기하고 왜 미래에

그 펼쳐질 그런 사건은 왜? 그거 사실 아닙니까? 성경에 그렇게 쓰여져 있는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질문이 아담은 언제적 인물입니까? 뭐 이런 식으로 설명이 나옵니다.

그 편지글을 받으면서 마음이 참 답답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우리가 기록된

성경 말씀은 역사적 사건의 설명이 아니다라는 것을 조금 이해하셨으면 좋겠어요.

 

여기에 요한 묵시록에 쓰여진, 기록된 말씀들은 실제 벌어진 혹은 벌어질 사건에

대해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지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표징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비유적으로 표현해 내기위한

문학적인 어떤 표현 방법이지 이것이 역사적 사실만으로 이해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해버리면 어떤 또 잘못된 결과를 도출하게 되느냐하면, 글자 그대로

성경을 읽어버리면 예컨대 여호수아기나 모든 구약 성경에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셔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다른 불레셋을 다 쳐죽이셨다.다른 민족을 다 쳐

죽이셨다. 예, 정말 쳐 죽인 것처럼 정말로 사람들을 살인한 것처럼 그렇게 역사적

사건으로 믿어버리면 어떤 또 모 우리 교회 어떤 분은 일본 쓰나미가 하느님 안

믿어서 그렇다. 그래서 벌 준거다. 이런 식으로 잘못된 해석을 해 나가게 됩니다.

 

기록된 성경과 역사적 사실과 구별할 줄 아는 그런. 기록은 왜 했겠습니까?

내 신앙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그 신앙 안에서 성령께서 이끌어 주셔서 성서 저자들이

셩경을 쓰게 했지 글자 그대로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더. 그게 바로 근본주의적 성경 해석이다. 죽은 말씀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나아가서 지금 살아 있는 말씀으로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

마치 성지 순례 가서 무덤만 붙들고 있는 그러한 모습과도 같은 거죠. 지금 살아 계신

말씀으로, 부활하신 분이라고 스미르나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소개하고 있

습니다. 지금 도시가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서 생명에 관련된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스미르나 교회를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스미르나 뒷 부분에

생명의 화관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거든요.

 

*묵시 2,10: 네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이제 악마가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너희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겪을

것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겠다."

 

죽음의 화관이 아니라 생명의 화관입니다. 생명을 지향하게끔하는 내용으로 스미르나

교회는 그 내용을  지금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2장 9절부터 천천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묵시 2,9: 나는 너의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요하다.

 

자, 요기까지.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궁핍이 뭡니까? 가난, 부족함.

그런데 너는 부유하다. 이게 지금 이 개념이 두 개가 부딪치잖아요. 이거 어떻게 이해

할까요? 이거.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자, 그러면 우리가 사도 바오로으 코린토 후서의 말씀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것도 같은 논조가 이야기 되는데.

* 2코린 6,10: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개념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정말 자유로운

어떤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머리 속에 탁 떠오르는 분 혹시 계십니까? 마더 데레사

수녀님 혹은 뭐 우리 한국 사회 한번 크게 휩쓸었던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지마는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 또 누구 있겠어요? 우리 종교만 보지 말고 넓게 한번 볼까요?

예, 무소유. 하여튼 그런 분들을 우리가 다 떠올려 보면 가난하게 보입니까?

 

예, 지금 우리가 가난하지 않다는 것, 가난과 부유의 개념을 상치된다라는 개념을 가질

때는 물질적인 개념을 가졌기 때문이죠. 여기서 제가 분명히 몇번 말씀 드렸던 것이

요한 묵시록의 관점은 영성적인 관점으로 이끌어 간다고 그랬어요. 묵시적인 관점이

세상은 나쁜 곳이고 천상은 좋은 것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천상적인 어떤 영성적인

것을 지상 안에서 구현하라는 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의 관점입니다.

 

 로마가 아무리 억압을 하고 역사적 배경 안에서 세월이 그렇게 힘들어서 박해의 시기

라고 할지라도 너희들은 승리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이것도 이분법적으로 상치되는

개념이죠.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힘들어 죽겠는데 뭔 승리냐? 분명히 이거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가능한 것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여성적인,

신앙적인 관점이 바로 내가 승리할 수 있다는 거죠. 예수님과 더불어서.

 

방금 여러분께서 언급하신 그 어떤 그런 분들. 너무나 풍요롭고 부유해 보이는 거죠.

신앙적으로 영성적으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너희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희는

사실 부유하다." 환난, 궁핍,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어요.

 

예, 박해의 시절이고 스미르나 교회에서 아까 특징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유다 공동체가 계속해서 박해를 하고 있고 또 황제 숭배는 당연히 또 강요 받는 것이고

그러한 것에서 어려워요. 어려운데 부유할 수 있는 것은 칭찬입니다. 지금 사실은 너희는

부유하다. 거기에 대해서 굴하지 않고 내가 정신적으로 굳건하다라는 거죠

 

이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칭찬해 주시는 말마디입니다.  너희들은 그만큼 강한 믿음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 강한 믿음 한번 계속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또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중상을 받는 것도 나는 안다."

예, 유다 공동체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고 있다. 중상을 받는 것, 모독적인 언사.

모독한다는 거죠. 해꼬지 말로써. 그런데 우리가 나중에 보겠습니다마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그 다음에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이 짐승의 주요 특징이 뭐냐하면

말로 모욕하는 거예요. 모독하는 거.

 

자, 고것과 여기에 중상을 한다는 것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기길 바랍니다. 중상을 한다

는 것. 말도 안 되게 모독한다는 것. 남을 해꼬지 말로써 한다는 것. 이것을 요한 묵시록

저자가 어디로 연결을 하느냐하면 짐승들한테 연결을 해요.

 

그 짐승은 로마의 어떤 군사적이고 종교적인 어떤 힘을 상징하는데 그 로마를 또 어디에

연결하느냐하면, 이 두 짐승이 나타나기 전에 12장에 사탄의 어떤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용, 천상에서 미카엘 천사와 싸워서 그쵸? 용하고 연결하는. 용이 뭐냐? 완전히

그 어떤 사탄의 덩어리 악 덩어리라는 거죠. 악의 표상 그 자체. 그것이 구체적인 현실에

보여지는 것이 로마라는 것이죠. 그러면 구체적으로 악의 구체적인 모습이 뭐냐?

모욕이라는 것입니다.

 

* 악의 구체적인 모습: 모욕하는 자, 남을 아무 근거없이 말로써 해하는 자.

 

이것이 요한 묵시록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이 악 자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선 시간에

제가 말씀 드렸던 것 중에 하나가 우리의 죄라는 것. 하느님과 갈라 놓는 원죄라는 것.

그 출발점 자체도 거짓된 왜곡. 잘못된 말로써 다르게 표현하는 것. 거기서부터 출발한

다고 그랬습니다.

 

뱀이 하느님 말씀을 왜곡했고 또 하와 자체도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그랬는 것을

만지지도 마라고 자꾸 자기 말을 갖다 붙이고 왜곡시키는 거기서부터 어떤 죄가

출발한다. 우리 그래서 말조심을 해야 된다라는 것이죠.

 

사실 그대로 말하면 박해 받을 수 있어요. 그러나 중간 중간에 이렇게 상황을 보고

대충 타협하는 식으로 말을 자꾸만 맞춰서 왜곡시켜 나가면 그냥 앞에 보기에 얼굴

안 붉히려고 왜곡시켜 나가는 그런 말을 해 나갈 때 이것이 동시에 모욕적인 언사

중에 하나입니다. 거짓말이요. 우리가 쉽게 얘기해서. 그것이 죄의 근본이고 악의

근본이 될 수 있다라는 것. 요한 묵시록의 어떤 흐름을 봐서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 "또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중상을 받는 것도 나는 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갈등. 그 어떤 중상은 말로써 하는 모욕적인 언사를 중요시

하고 있다라는 정도로 아시구요.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자, 사탄의 무리,

유다인과의 갈등에서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데 왜 사탄이라고 그랬을까?

유다인들도 하느님의 뭡니까? 자녀입니다. 선민의식이 그리 강한 백성인데 왜 이

그리스도인이 사탄의 무리라고 불렀을까?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아, 저 사람들 한분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거 알꺼 아니예요. 그런데 왜 사탄의 무리라고 그랬을까?

 

자, 디아스포라의 상황을 우리가 잘 봐야 됩니다. 디아스포라의 상황을.

디아스포라에서 유다인들이 정말 한분 하느님만 믿고 다른 것들은 거부했을까요?
황제 숭배 거부하고 오직 우리 믿음만 지키겠다 안 했습니다. 타협 들어 갑니다.

황제 숭배도 적당히 하고 어쩔 수 없이 살아 남기 위해서 그죠? 다른 어떤 외국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들은 말로써 겉으로는 유다인인 척 하지마는, 시나고

가에 모여서 뭐 하고 그랬지마는 결국에 보면 그리스 문화와 그 다음에  로마의 어떤

문화, 종교적인 억압에 다 수긍하고 적응하고 타협을 해 나가면서 그렇게 겉모습

유다인이고 백성이다라는 그런 개념을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다인들은 스미르나 지역 안에서, 도시 안에서 이 문화적 융화, 타협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이다.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

한 하느님의 백성은 누구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죠.

 

그래서 우리가 요한 묵시록 저 뒤에 가면 21장 그쪽에 천상 예루살렘이 나타나면

진짜 하느님 백성은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 묵시 21,7: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신명기에 나타나는 그 정신이 그대로 갖다 놓는. 누구에게? 어린양의 신부

에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참된 하느님의 백성과 하느님

의 관계를 설정하는 대목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2,10: 네가 앞으로 격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이제 악마가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너희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겪을 것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겠다.

 

자, 여기보면 "두려워 마라." 너희들 왜 두려워하지 마라고 했습니까? 우리 지금

말씀을 듣는 우리가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됩니까? 우리가 어디에 처할 꺼 같으니까.

예, 여기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네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 고난이 어떤 것이냐? 악마가 너희 가운데 몇 사람. 너희는 누구죠?

 

스미르나 교회에서 유다인들의 어떤 박해와 로마 황제 숭배 강요에 대해서 저항

하면서 꿋꿋이 부유하게, 영성적으로 신앙을 부유하게 살아가는 사람 중에 몇몇은

어떻게 한다구요? 감옥에 던져 너희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고난을 말해요.

 

자, 악마가 아까 악에 대해서 제가 설명해 드렸지요? 뭐 질투하고 말로써 막 이렇게

모욕하고 이것을 감옥에 던진다. 감옥에 던지면 어떤 감옥일까요? 감옥하면 떠오르는

게 뭐 있습니까? 창살? 창살입니까? 창살 없는 감옥도 있어요. 우리가 농담조로

신학생 시절에 "우리 창살 없는 감옥에 있다."고 막 했었는데. ^^*~~~

예, 그건 농담이구요.

 

그런데 이 창살 이런 물리적인 어떤 감옥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감옥게 갇히는 형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감옥은 뭔가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어둠? 불? 무슨 불요? 유황불? 막 지옥에서의 불입니까?

예, 감옥에 던진다는 것은 어디에 이렇게 박해 속에 집어 넣는다라는 개념으로 생각

하시면 됩니다.

 

* 감옥에 갇히다: 박해 속에 집어 넣다.

 

감옥게 갇힌다는 것은 악마가 모욕적인 언사를 해서 자꾸 해꼬지를 해서, 쉽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들 옆에 이웃이 아무 근거 없이 자꾸 나를 비방하고 자꾸 말하면

어떻습니까?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고 막 그 일만 떠올리면 막 미치겠어요. ^^*~~~

완전히 답답해 가지고. 그런데 내가 어디에 같힌 거 같지요?

 

집 밖으로 함부로 자유롭게 나기지도 못하고 부딪치면 겁나고. 혹시 본당에서 그런분

계십니까? 빨리 화해하시고 그러니가 그게 왜 감옥에서 풀어주는 거예요. 풀어 주는 것

성서에 구원 받았다. 구원이라는 거 있지요? 그 동사가 보면 풀려나게 하다. 풀어지다.

자유롭게 되다. 그런게 구원이란 단어와 연결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모욕적 언사가 사람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그런 악한 모습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람을, 상대편을 가두어 놓는 그럼 모습. 이게 되게 영성적인 어떤 차원에서

지금 이 서간문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한번 보십시오. 내 기분 나쁘게 해

갖고 저 사람이 비방했으면 그냥 서로 감정 상했구나. 이런 차원이 아니라 그 말이

그 사람을 얽매게 만들어 버린다. 구원의 반대 개념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참 답답해지죠? 내가 모욕을 당하면서 갇혀져 버립니다. 그 시점에.

그러나 그러한 이런 현실 그런 내가 갇히고 답답하고 억압받은 그런 현실.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왜냐하면 너희는 10절 후반부에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겪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열흘일까?

 

우리 숫자, 상징 이거 묵시적인 표징들 다 봤죠? 예, 7은 무슨 뜻? 완전, 충만.

12는? 열두 지파에서 출발해 갖고 뭐라구요? 하느님 백성, 보편적인 수,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으로 불리움을 받은 그런 어떤 하느님 백성 개념. 이것도 보편적인 개념

이겠죠?

 

중간에 10이라는 숫자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대충 추측을 해 보면

완전 수와 완전 수 사이에 어정쩡한 숫자. 이게 그래서 완전하고 보편적이고,

영원하고, 끝까지 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6자도 한번 보십시오. 7보다 못하지 않습니까? 666에 대해서 배웠죠?

666이 뭐 요즘 뭐 바코드 해 가지고 그렇게 나온 게 아니라 666은 로마 황제에

대한 3명을 열거했습니다. 당시의 그런 어떤 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그런 해석이 있다.

 

6자라는 것도 보면 7자와 1이 모자라는 어떤 어정쩡한 숫자.

10 이것도 보면 어정쩡한 숫자. 이것이 영원하지 않고 한계적이다라는 것이죠.

한계적인 숫자다. 그래서 이 모욕하고, 감옥에 넣고, 억압을 하고 그래서 이 답답한

것은 이것이 영원히 펼쳐질 것이 아니라 한계가 있으니까 참아라.

 

그리고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라는 약간 좀 우리가 답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에 대해서 휘둘리지 말고 니는 니 갈길 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믿음을

꿋꿋이 가지고 충실해라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제가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이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의 에메타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의 1자적인 의미는 충실성입니다. 내가 어떤 다른 존재를 받아

들이고 이것을 나 믿습니다. 신앙이죠? 믿습니다라고 우리가 신앙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믿고 바라는 거예요. 뭔가 타 존재를 염두에 둔 게 1차적인 의미로 탁 떠오를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예, 이것도 물론 신앙이지마는 무엇보다 1차적인 뜻은 뭐냐하면, 내 삶의, 내 신념의

내 신앙의 충실성을 먼저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충실성. 내가

꿋꿋하게 이게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고 타협하지 아니하고

사탄의 무리라고 유다 공동체를 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불렀습니까?

타협하기 때문에, 다른 것과 어울려서 융화돼 버리기 때문에.

 

그러지 말고 내가 가지는 신념을, 신앙을 꿋꿋하게 충실하게 지금 가지고 살아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신앙적인 부분이다. 왜? 그런 중상 모략은 오래 가지

않으니까. 그것은 끝이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면 되니까.

예, 그런 것들을 머리에 두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준다고요? 생명의 화관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라고

얘기 했습니다. 이 화관을 왜 화관이라는 관 이거를 얘기했을까요? 바로 로마 황제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관.

 

우리가 4장부터보면 이제 어좌에 앉아 계신 왜 어좌라는 것을 가지고 왔을까요?

우리 로마 황제 못지 않은 하느님이 있다는 거죠. 이 세상 로마가 다스리고 그 억압

속에 있지마는 내가 믿는 주님 중의 주님이시고 왕중의 왕이고 그런 예수 그리스도

그분도 어좌에 계시고 하느님도 어좌에 계시고 한분 하느님 그분이 내 삶의 최고의

왕이시다라는 것.

 

여기 생명의 화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화관이라는 단어가 황제와 관련된, 왕과

관련된 그런 단어거든요.그래서 이 화관하면 생명의 화관입니다.

 

* 생명의 화관: 세속적인 것에 휘둘리는 세속적인 권리를 가지는 화관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동시에 정신적이고 영성적이고 신앙적인 그런 차원에서 세상을

   이겨내는 화관.

 

그 관을 누가 써요? 예수님이, 하느님이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가 이겨내는,

충실하게 살아가면 내가 왕이라는 거죠. 여러분 일반적인 삶을 사시다가 한번

보십시오. 제일 어려운 게 사람하고 관계 아닙니다. 나 자신하고의 싸움이지.

 

내가 내 삶을 충실하게 그리스도의 어떤 신앙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내가 매일의

안에서 나를 이겨 내는 것. 그러면 그 사람이 세상 왕이예요. 쥐위에 아무리

뭐라고  래도 그래서 내가 왕이 되는 그런 기분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생명의 주인이 되는 그런 어떤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화관은 하느님의 차원, 영성적인차원, 이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저 세상의 논리에서의 어떠한 그런 차원으로 이해 해야 됩니다.

 

요거와 비슷한 차원의 대목이 마태오 복음 5장에 있는데요. 마태오 복음 5장이

뭡니까? 진복팔단 나오는 "행복하여라!" 아실겁니다. 그죠? 그 구절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 마태 5,11-12: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사실 너희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앙을 가지고 가면서 편안하기만 하면 어떤 의미에서 하늘

나라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애요. 분명히 하늘 나라와 이 세상적인 논리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편하고 힘들고 그러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자그마한 노력 하나라도 해 나간다면 옆에서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 모습은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습이다.

 

제가 개인적으로 이태석 신부님을 아까 우리들이 언급 했습니다마는 그분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세상 사람들의 무서움이라고 할까요? 우리 교회의 무서움일

수도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거기서 막 활동하시고 이렇게 도움 청할 때 교회는

냉대를 했습니다. 잘 안 도와 주셨어요. 근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언론을 타니까

교회가 그분에게 아주 뭐 크나큰 어떤 뭐 홍보를 넘어서서 엄청나게 영화까지

지원하는 그런 분위기로 흐릅니다.

 

예,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태석 신부님은 당신 삶의 참다운 행복을

추구하셨겠지요? 세상적인 논리는 살아 계셔서 추구하실 때의 그 모습 그것에

세상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돌아가시고 또 다시 거기에 붙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닌가?

 

정말로 우리가 살아 가면서 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어떠한

교회의 위상, 어떤 인간적인 어떤 그런 유명세 이것을 위해서 그런 중요하고

정말로 참 행복을 추구하셨던 분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태석 신부님보다 더한 상황에서 선교하시는 분들 많고 어려운 상황

에서 하느님 복음 전하는 분들 많이 계십니다. 이분들 거기 그 중에 한분이 또

세상의 이목을 받으면 또 같이 덩달아서 같이 뭐 좋으신 분이다. 이렇게 나가는

모습 이거 분명히 어떤 면에서 우리가 참 행복을 지향하는 모습에서 조금 모자라고

부족한 모습이 아닌가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의 논리를 거슬러서 살아가는 그러한 분들 그러한 교회의 모습을 한번 주목해

보십시오. 예, 그러한 모습에 우리가 우리 교회의 참다운 자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느냐? 사회교리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사회의 부족하고 힘들어 하고, 아파하고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사회로부터

외면 받는 그곳에 교회의 자리가 있다고 분명히 모든 많은 교회의 문헌들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당이든 모든 신앙적인 활동이든 어디에 촛점을 맞춰야 되는가?

우리끼리 좋은 활동을 하고 우리끼리 좋은 잔치 벌이고, 행사 벌리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 신앙 공동체가 해야할 일은 사회에서 부족하고 힘들어 하는 곳에

우리의 어떤 신앙적 가치를 실현하는 그런 노력이 먼저 선행되어야 되지 않는가?

 

우리 한국 사회 요즘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요? 많은 다툼들이 있지요?

많은 사회적 갈등들이 있습니다. 예, 뭐 쌍용자동차로부터 한진 중공업 그리고

우리 명동 재개발 등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각자가 다 판단을 하실 것입니다. 거기에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외면하는 곳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적인 논리고 혹은 돈의 논리로. 그러나

우리는 아파하는 사람들을 감싸줄 수 있는 그러한 일들 안에서 누가 아파하고

있는가를 우리 각자의 신앙적인 판단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생명의 화관은 분명히 세상적 논리와는 맞지 않는 저 세상의 하느님의 가치를

실현하는 자에게 주어짐을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다음에 11절에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그 말씀을

들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 말마디는 우리가 다 알죠? 그죠? 매 교회마다

앞으로 반복될꺼예요.

 

자,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 말마디는 단순히 스미르나 교회만을 위한

말마디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말씀이다. 여러교회, 일곱 개 교회

모든 보편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러분들 자, 지금까지 인제 읽었는데 스미르나 교회에서 무엇을, 어떤 말씀을

어떤 관점을 내 삶의 어떤 것으로 잡고자 합니까? 어떤 것? 제일 중요한 것.

처음에 스미르나 교회에 제일 중요한 포인드가 처음에 시작하면서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 도시가 어떤 도시였다구요? 죽었다가 생명을 되찾은 도시.

 

여러분 생명을 한번, 말로써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  여기서 우리 사탄의 무리가

중상 모략하는 것. 모역적인 언사. 거기에 대해서 제가 강조를 많이 했습니다. 말로써

사람을 죽이는 문화를 만들지 마시고 말로써 사람을 살리는 그런 말을 해야 되겠다

그런 생명을 중시하는 그런 말들을 우리가 만들어 내야 되겠다.

 

그러면 그럴려고 그러면 어떻게 해요? 죽어가는 이들, 아파하는 이들 그런 이들

안에 우리가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하지요. 중상 모략적인 말은

악마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입니다. 왜?

그분이 살아계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니까.

 

어떤 말씀을 이웃에게 하시고 싶습니까? "아우, 저 자매님, 형제님 미워 죽겠다."

라고 말을 할려고 하더라도 나오는 말은 "아우, 잘 하십니다. 아우, 좋으십니다.

조금 더 잘하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조금 긍정적으로 이렇게 살리는 말씀

들을 많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은 저도 이렇게 뻔지르하게 하지마는 저 자신도 이 하나 비판 시작하면 저도 막

겉잡을 수 없이 막 이렇게 나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서 자꾸 반성이 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 저녁에 양심 성찰하는 기도문에 끝기도 할 때 보면 양심성찰

하는데 하루에도 내가 말을 하는 게 얼마나 이 쓸데 없는 말을 이렇게 계속 했는가

이런 반성이 많이 돼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부족한 게 있겠지요? 그러나 그 부족함

을 인지하는 거와 부족함을 인지 못하고 멋대로 살아가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결과를

갖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화관을 위해서 우리가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 묵시 2,11: 승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니 않을 것이다.

이거는 뭐 자, 퀴즈. 첫 번째 죽음은 뭡니까? 예, 육체적인 죽음.

그런데 두 번째 죽음은? 영성적인 신앙적인 죽음. 그렇게 노력해 간다면

육체적으로 고단하고 고달프고 뭐 죽을지라도 뭐 신앙을 증거하다

우리는 지금 박해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육체적으로 고달프더라도 어떻게?

 

영성적으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런 어떤 말슴을 이렇게 합니다.

스미르나 교회는 사실 이 우리 에페소 교회에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신다고

했는데 스미르나 교회에서는 뭐 그닥 주어지는 게 뭡니까? 두 번째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이게 단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은 게 그것이 더 좋겠습니까?

아니면 이 영성적인, 신앙적인 죽음을 안 죽는 게 더 좋겠습니까?

 

둘다 좋은데. 자, 영성적인 이 죽음. 그럼 영성적으로 죽지 않는 신앙적인 어떠한

생명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간다. 이 신앙적 생명이 어떤  거겠습니까? 신앙적 생명

요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자,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역 안에 하느님과 일치한다라고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 신앙적인 죽음을 입지 않는다는

거는 신앙적인 생활을 계속해서 나간다. 그래서 생명의 화관을 이렇게 연결을 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이것도 어떻게 보면 하느님하고의 관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에서? 죽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지요?

 

구약 성경에 보면 어떻게 돼 있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면서

그이후 사람들 묘사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보시면 이 나이가 점점점점 줄어듭니다.

다 죽는 나이가 점점점점 줄어들어요. 이게 뭐냐하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멀어질수록 이제 인간은 생명으로부터 멀어진다. 죽음에 가까워진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비유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정말 사람이 800살, 900살 이렇게 살았다고 믿으십니까? 그렇게 살고 싶으시죠?
싫어요? 그러면 20대의 모습으로 한 800살까지 ^^*~~~ 아, 싫으세요?^^*~~~

나중에 한번 우리 다. 어우, 돌아가신다는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마는 그렇다면

제가 한번 다시 여쭤 보겠습니다. "돌아기시고 싶으세요?"

 

예, 하여튼 그런 어떤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겠지요? 예수님 당시의 평균 수명이

20세 후반 30세 정도였습니다. 33세면 아주 오래 시신거예요. ^^*~~~

예, 그런 어떠한 그 나이의 어떤 묘사들, 그것이 생명으로부터 점점점 멀어진다.

 

두 번째 죽음을 입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

그럼 생명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 영원한 생명. 예, 인간적인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신앙적이고 영성적인 생명이 계속 연장이 된다.

 

여기에는 그래서 뭐가 있냐하면 죽음 자체가 없어진다라는 표현을 나중에 21장,

22장 가서 천상 예루살렘에 12달이다 뭐 사시사철 이렇게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있고. 여기 12라는 숫자는 뭐라고요? 보편적이고, 영원하고, 완전하고 이런 개념

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영원히 있다.

 

이런 개념을 딱 가지고 있다면 이것을 믿어들인다면 육체의 나이 혹은 육체의 죽음

육체의 어려움, 세상적인 어려움, 고통 이런 것들은 상대적으로지나가고 모든 것이

어떻게 보이겠어요? 별로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

예요. 다 지나가면 상대적인 것이고 실재 중요한 것은 나는 영원한 생명을 지금부터,

여러분 지금부터 시작하셔야 합니다.

 

꼭 우리가 영원한 생명 이야기하면 저 세상의 어떤 선물로 생각하시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스미르나 교회에서 마찬가지로 생명의 화관을 이렇게 받는 사람은

* 생명의 화관을 받는 사람들(스미르나 교회의): 지금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

온 사람들.

 

그래서 우리가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빨리 영원한 생명을 주십시오.

주십시오라고 기대게 되고 부탁하게 되고 빌게 됩니다. 그런데 그전에 우리가

까먹고 있는 것이 뭐냐? 내 삶을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까먹고

있는 거예요. 죽을 각오하고 한번 열심히 살아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갔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거져 얻는 게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끝에 가서 "니가 한 행실대로 난 너에게 보상하겠다."

* 묵시 22,12: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녀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

 

심판을 하든, 보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관점도 니가 한 행동대로, 행실 그 일대로 내가 심판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과연 신앙적인 가치에 대해서 충실히 현재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평일에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주일에 단 하루만 이런 신앙의 가치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우리의 모든 몸짓 하나하나, 생각, 말, 행동 작은 것 하나하나에서 신앙적 가치를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어떤 충실성, 신앙적인 가치 안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

도의 어떤 참된 제자로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에페소 교회, 스미르나 교회 이제 두 개를 봤는데요. 이 설명을 하면서

자꾸자꾸 이렇게 좀 처지는 경향이 있는데 다음 시간부터는 조금 빨리 그렇게

열심히 한번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시간 예고: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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