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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양심을 저버리는 그 불의에는/신앙의 해[330]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17 조회수503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림 : 대전 교구 홍성 성당 

누구나 오해를 받고 오해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억울하게 오해를 받는다. 그걸로 앙심과 보복이 떠오른다면 조용히 극복해야 할 게다. 감정에 휩쓸리면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로 돌아간다. 인내와 기도로써 ‘주님의 뜻’을 헤아리려 애쓴다면 ‘예수님을 닮는 행동’이 된다. 내 인생을 떠받칠 또 하나의 ‘십자가를 지는 행위’가 되리라. 

허나 모르면 엉뚱하게 대한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도 예수님을 몰랐기에 독한 앙심으로 옭아매고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을 망가뜨리러 오신 분으로 오해했기에. 결국은 이게 그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직감하셨지만 타협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만을 꿋꿋이 하셨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47-54 요약) 

역사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는 사회의 지도자들과 싸워야 했고, 더러는 군중과 맞서야 했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에게 수난을 당해 왔다. 하느님의 말씀과 세상의 욕심이 가는 곳마다 충돌했기에. 그 충돌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예언자가 있었다. 이 예언자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교회가 예언자 직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더 이상 하느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게다.  

이렇듯 예언자의 삶은 고통 그 차체 이었다. 하지만 고통이 싫어 피하려만 든다면 말씀을 전할 수 없을 게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의에 대해 끝내 말을 아끼지 않았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여기에 정면 승부수로 대어들어 결국은 자신의 말을 내세웠다. 나중엔 자신의 말을 하느님의 말인 양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무서운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끝내 꾸짖으신다. 거짓 예언자로 바뀐 그 실체를 폭로하셨다. 그러기에 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하려 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어느 단체든 조직이든 예언자는 존재해야 할 게다. 그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정의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에. 어쩌면 있어야할 이런 정의가 사라지기에 불안한 조직이 되기도 한다. 신앙인들도 이런 예언자의 주장인 진리와 정의의 삶을 가끔은 피하려 하기에 악한 기운이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는 때로는 억울한 오해를 받을지라도 정의의 양심을 저버리는 그 어떤 불의에도 그 옛날 예수님마냥 당당하게 맞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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