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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죽음 너머 그곳을 먼저 이곳에서/신앙의 해[358]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4 조회수389 추천수1 반대(0) 신고

 

                                                            그림 : 수원 교구 동천 성바오로 성당

평생 죽음을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두 가지 질문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그는 어릴 때 아버지의 친구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걸 목격하고서는, 이러한 죽음에 대해서 늘 질문한 것이란다. 그의 결론은 ‘살아라!’였다. 단지 생물학적 생명 유지가 아닌 태어난 보람이 있게끔 살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진정한 삶은 ‘자신의 존재를 통하여 손톱만큼이라도 더 나은 게 되도록 노력하면서 사는 거’였다. 퀴블러 로스는 아름다운 삶, 아니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려면 ‘세상을 위해 어떤 봉사를 해 왔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늘 ‘사랑’을 목표로 살아야 한단다. 결국 그가 생각한 죽음은 삶이였고, 그게 중요한 것이었다.

영국의 호스피스 운동의 대가로 알려진 로저 콜 박사도 아름다운 죽음은 아름다운 삶을 체험할 때 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우주 저 멀리 공간 너머에 있는 게 아닌,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 한 가운데 있는 것이리라. 우리 삶 한가운데 행복이 충만한 곳, 그래서 기쁨과 평화가 깃들어 있는 게 바로 하느님 나라일 게다. 

이처럼 우리가 아름다운 삶을 사는 건 하루하루 자신의 죽음을 사는 걸 말한다. 죽순처럼 올라오는 온갖 욕망과 자존심, 부풀어 오른 자아가 죽을 때 하늘나라가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날 게다. 그래서 진정한 삶은 죽음과 분리된 게 아닌 하나이리라.  

어떤 신부님은 강론 때 이런 질문을 자주 하신단다. “여러분은 죽어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은 ‘예’라는 답을 못한다나. 무언가 걸리는 게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신단다. “여러분은 모두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다시 살릴 것이니까.” 

그렇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놓으신 분께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셨는데, 우리가 어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겠는가? 분명히 들어갈 게다. 다만 굳이 염려해야 할 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하되, 그곳에서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이곳과 그곳의 사는 게 다를 테니까. 그러니 이 세상 살면서 그곳 삶을 익히지 못하면, 그 나라에 들어간다 해도 결국은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정녕 깨닫지 못할 터이니까.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하신 그 나라는 분명 우리와 함께한다. 아기와 눈 맞추며 환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에서, 길섶과 개울가를 마냥 뛰노는 어린애의 모습에서, 그리고 그 위를 맴도는 새들의 지저귐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는 죽음 저 너머의 그 나라를 이곳에서 체험해야만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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