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우리의 길
작성자함형춘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28 조회수622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의 길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현세의 부귀영화를 쫓아서 돈을 따라 사는 길, 권력을 따라 사는 길, 명예를 따라 사는 길, 쾌락을 따라 사는 길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마치 돈이나 권력, 명예,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요, 전부인 양 그것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소진 시킵니다.

수많은 가난한 이들은 먹고 사는 데 바빠서 다른 여유를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길을 따라 사십니까? 어느 길을 따라서 살고 있든,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 아닌 다른 길을 살아갈 때, 그런 길을 따라가면 갈수록 오히려 우리 마음은 어두워지고 불안해집니다. 이와 더불어 사람은 누구나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인생엔 왜 고통과 고생이 산재해 있는가? 이 고통과 모순투성이의 인생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사랑하는 사람과는 영원히 함께 있지 못하는가? 사랑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서로 위하기보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가? 왜 서로 죽이는가? 전쟁은 왜 하는가? 사람은 왜 죽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가? 후세란 과연 있는가? 우리는 이런저런 의문을 많이 지니고 살아갑니다.

특히 인생고에 시달리거나 병고나 시련을 겪을 때, 실패의 쓴 잔을 마실 때 이런 의문은 점점 커져 가고 우리는 회의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에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습니까? 인생의 수수께끼를 누가 다 풀어 줄 수 있습니까? 누가 이렇게 방향 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그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그런 것이 답을 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공산주의 내지,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동구라파의 붕괴에서 보듯이 그들이 꿈꾼 지상 낙원 건설에도 실패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필요한 빵조차도 넉넉히 주지 못했습니다. 북한도 지금 식량난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분명히 자유 경쟁의 시장 경제를 통해 물질적 발전에는 이바지한 바가 큽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보듯이 부익부, 빈익빈의 격차를 낳고, 사회 공동체적 일체감을 해치며,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를 낳음으로써 인간을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기 쉽습니다.

유물론적 공산주의가 인간 본성에 반하는 반인간적인 것이라면 자본주의는 수정되지 않으면, 또 도덕적 뒷받침이 없을 때면 약육강식을 낳음으로써 반인륜적 이데올로기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니 그 어느 것도 인간으로 하여금 참으로 인간답게 살게 하지 못하며, 인간이 던지는 근본 문제, 인생의 의미를 묻는 물음에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럼 현대에 발달한 자연 과학은 답을 줄 수 있습니까? 오늘날 자연 과학은 인공위성을 띄워 우주의 신비를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언제 어떻게 우주가 시작되었는지 정확하 모르고, 어디에 끝이 있는지도 모르는 망망대해 같은 우주, 천억이 넘는 별을 담은 은하계 그 자체만도 한없이 큰데, 또 이런 은하계가 1천억 개나 있다는 무한히 넓은 그 우주의 신비를 겨우 벗기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연 과학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 우주 만물의 정점에 서 있는 인간의 신비에 대해 알 수 없고 인간이 던지는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을 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자연 과학뿐 아니라 인류가 지니고 있는 모든 지식의 총체를 향하여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해도 그 지식의 총체는 답을 하지 못할 만큼 인간이란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도대체 우주 만물 중에서 자기의식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 인간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도, 자연과학도, 세상 모든 이가 얻기 위해 부지런히 추구하는 돈도, 권력도, 명예도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을 줄 수 없습니다.

1980년 7월에 김재문 신부라는 젊은이가 신부 된지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신부전증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 신부는 합병증으로 죽기 4,5개월 전, 약 1개월 사이에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시력을 잃는 과정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굉장히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김 신부는 저에게 "주교님, 제 나이 이제 겨우 스물 여섯인데 왜 이렇게 되어야 합니까?" 라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저는 그를 껴안고 위로의 말을 하고자 했으나 사실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 신부가 실명한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병실을 가보았을 때, 김 신부는 마침 수녀님 한 분과 간병하는 이와 함께 실명된 후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갔을 때에는 말씀의 전례는 막 끝나고 봉헌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김 신부는 봉헌 기도문을 읽을 수 없으니 말로써, "하느님 아버지, 이 제물을 저 보다 더 고통 받는 병자들을 위해 바치오니 받아주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성찬 전례문은 제가 옆에서 도우면서 미사를 계속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차례가 되었는데, 김 신부는 "천주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라는 말씀을 외우는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갑자기 두 눈의 시력을 잃고, 앞 못 보는 소경이 된 이래 누구의 도움 없이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예수님은 참으로 나의 길이시다' 라는 말씀을 굳게 믿습니다. 그분 없이 저는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의 길이십니다. 우리의 길이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바칩시다."

이 말씀을 듣고 제가 받은 감동은 실로 깊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정 우리의 길이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사제가 되어 많은 강론을 했지만 그 강론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길이시다' 라는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전할 수 있었는지요!

그런데 여기 김 신부는 신부가 된지 불과 1년밖에 안 되는 사람인데 이렇게 한마디 말로써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이 되심을 깊이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그 신부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길이심을 확신하게 하였고 또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전달할 수 있게 하였습니까?

저는 김 신부가 그 불치병의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깊이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실명으로 말미암아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 김 신부와 함께 계시며 그의 마음을 당신 빛으로 밝히고 계셨습니다. 김 신부는 육신의 눈은 잃었으나 영혼의 눈은 떠서 주님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런 강론이나 생각을 통해서는 지적으로는 조금 더 깨달을지 모르나 마음 깊이 만나기에는 아직 너무나 부족합니다. 우리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것은 많은 경우 김 신부나 많은 병자들 또는 사형수들이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에서 보듯이 고통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정화될 때입니다.

우리 마음이 참으로 주님 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 빈 마음이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고 그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또 빛이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 <바보가 바보들에게>에서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