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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21강 구약성경의 다양한 나무들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09 조회수944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21강 구약성경의 다양한 나무들


 

1. 거룩한 나무 1 - 참나무

참나무와 향엽나무는 구약성경에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거룩한 나무다.

이 두 나무에 얽힌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심도 비슷한 점이 많다. 참나무를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온'과 향엽나무를 의미하는 '엘라'는 '높다, 세다, 첫째가다'를 뜻하는

고대 셈어 어근에서 파생한 단어다. 그래서 이 나무들의 이름을 직역하자면 '드높은

나무' 또는 '우두머리 나무' 정도 될 것이다. 이름에서 이미 거룩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참나무는 야훼 하느님의 성소와 관련되어 자주 등장하는 거룩한 나무다. 창세 12장에서

스켐의 성소는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곧, 참나무는 성소를 알려 주는 표지다.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창세 12, 6)

이 모레의 참나무는 그냥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곳.

이름만 대면 어느 장소인지 아는 곳이었다. 그리고 거룩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스켐에 있는 기념 기둥 곁 참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 (판관 9, 6)

이런 모레의 참나무는 널리 알려진 지명으로 쓰였다. 어떤 지점을 설명할 때 기준이 되는

지명이었다. 그리고 그 참나무 아래는 보통 장소가 아니었다. 임금을 세우는, 곧 대관식이

열리는 곳이었다. 의미있고 거룩한 장소, 참나무 아래가 그런 곳이었다. 게다가 참나무는

스켐 성소뿐 아니라 다른 성소에서도 거룩함의 표지 역할을 했다. 참 흥미롭게도 참나무

는 특히 장례식과 관련 있다.

그때 레베카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 베텔 아래에 있는 참나무 밑에 묻혔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알론 바쿳(통곡의 참나무)이라 하였다. (창세 35, 8)

2. 거룩한 나무 2 - 향엽나무

향엽나무도 참나무와 종교적 쓰임새가 비슷하다. 여호수아의 시대에, 유서깊은 성소인

스켐에서 하느님과 백성이 새로 계약을 맺었다. 모세의 후계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백성이 맺은 계약의 증거로서, 큰 돌에 모든 말씀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 큰 돌을 가져다

'향엽나무 밑'에 세웠다.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모두 하느님의 율법서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그곳 주님의

성소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세웠다. (여호 24, 26)

참나무가 장례식의 요소로 쓰인 곳을 보았다. 사울이 죽자 그의 시신을 수습한 곳도

'향엽나무 밑'이었다. 향엽나무는 참나무처럼 장사 지내는 곳이었다.

그러자 그곳의 용사들이 모두 나섰다. 그들은 사울의 시신과
그 아들들의 시신을 거두어 야베스로 모셔다가,
그들의 뼈를 야베스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묻고
이레 동안 단식하였다. (1역대 10, 12)

향엽나무의 거룩함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판관기 6장이다. 향엽나무는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앉아서 하느님의 뜻을 직접 전하는 곳이다. 이렇게 야훼 신앙과

직접 관련이 있는 향엽나무는 특별한 거룩함을 지닌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천사가 아비에제르 사람 요아스의 땅 오프라에 있는 향엽나무 아래에 와서 앉았다.

그때에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미디안족의 눈을 피해 밀을 감추어 두려고, 포도 확에서

밀 이삭을 떨고 있었다. (판관 6, 11)

3. 목재 우상

고대 근동의 다양한 민족들도 이 나무들에 깃든 거룩한 의미를 공유했다. 그들도 역시

의미의 나무를 알았다. 그래서 이 나무 아래서 의례를 거행했고, 이 나무를 깎아 신상을

만들었다. 구약성경은 일부 이스라엘인들도 이방인의 풍습을 따라 이 나무들 아래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제의를 거행했음을 전한다. 또한 이 나무들로 우상을 만들었다는 대목

도 여러 번 나온다. 이렇게 이 나무가 이방신 경배와 관련될 때, 구약성경은 이 두 나무

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호세아 예언자는 이런 나무 아래서 거행한 이방신의 종교

의례와 우상 숭배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 의례는 풍산을 기원하는 고대 근동의 성혼의식

(聖婚儀式, hieros gamos)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들은 산꼭대기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고
언덕 위에서 분향하며
그늘이 좋다고
참나무와 은백양과 향엽나무 아래에서도 분향한다.
너희 딸들은 불륜을 저지르고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한다. (호세 4, 13)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는 이유가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성찰한 사람들이다. 이사야도 그런 성찰에 동참했다. 그런데 주님께 불충한

이유가 "참나무들 때문"이라고 표현한 점이 흥미롭다. 또한 가까운 미래에 고난 받을 이

스라엘의 모습을 "시든 향엽나무처럼"이라고 말한 것도 눈길을 끈다. 곧, 이 두 나무는

이스라엘의 죄와 고난을 표현하는 데도 사용된 나무다. 이 나무에 얽힌 종교적 상징이

간단하지 않다.

너희가 좋아하는 그 참나무들 때문에
너희는 정녕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가 선택한 그 정원들 때문에
너희는 창피를 당하리라.
너희는 정녕
잎이 시든 향엽나무처럼 되고
물이 없는 정원처럼 되리라. (이사 1, 29-30)

결론적으로, 이렇듯 두 나무에 대한 구약성경의 태도는 양면적이다. 거룩한 성소나

하느님의 현존과 관련되었을 때는 무척 긍정적이지만, 우상이나 이방신과 관련되었을

때는 단호하게 부정적이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이 나무들에 얽힌 '종교적 의미' 자체는

공통적이다. 곧,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참나무와 향엽나무에 대한 종교심을 고대 근동인

?들과 공유했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만의 독특성도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인은 이 두 나무에 대한

고유한 신학적 성찰을 발전시켰다. 이스라엘 민족이 겪을 다가오는 역사적 고난과

수치가 이 나무들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난을 견디고 남을 미래도 역시 이 나무들의

그루터기로 상징되었다. 이런 중층적 상징을 이해해야만 구약성경의 영성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4. 돌무화과나무

한편 구약성경과 고대 근동의 종교심이 완전히 다른 경우도 있다. 고대 이스라엘인이

고대 근동의 중요한 종교적 상징을 완전히 탈신화한 것이다. '돌무화과나무'는 이집트

에서는 '거룩한 나무'였지만, 구약성경에는 그저 '재산'이나 '목재'다. 특히 값이 싸고

부실하고 보잘것없는 의미로 쓰인다.

솔로몬 임금 덕분에 예루살렘에서는 은이 돌처럼 흔해졌고, 향백나무는
평원 지대의 돌무화과나무만큼이나 많아졌다. (1열왕 10, 27; 2역대 1, 15; 9, 27)

아모스 예언자는 스스로를 촌뜨기라고 겸손하게 표현한다. 여기서도 이 나무는 아모스의

직업과 관련된 것일 뿐, 특별한 종교적 심성을 찾아볼 수는 없다. 돌무화과나무나 가꾸는

사람은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아모 7, 14)

그러나 이스라엘에 큰 영향을 끼친 이집트에서 돌무화과나무는 강한 신성을 지닌 나무

였다. 멤피스인들이 섬기던 대중적인 하토르 여신의 표상이었고, 18왕조와 19왕조 시대

에는 하늘의 여신 누트를 상징했다. 그런데 위에서 보듯 이런 이웃 종교의 상징성은 구약

성경에서 탈색되었다. 단 한번도 성소나 의례와 연관되지 않았고, 우상 숭배와도 관련

없는 그저 값싼 '나무'일 뿐이다. 하지만 이집트 종교와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면, 아래

구절에서 희미한 상징을 느낄 수 있다. 하느님이 이집트에서 일으키신 기적을 찬미하는

시편 78편은 이집트인들의 중요한 재산인 포도나무와 돌무화과나무가 못 쓰게 되었다는

점을 말한다. 돌무화과나무를 그냥 재산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집트를 상징한다고 해석

할 여지도 있다.

우박으로 저들의 포도나무를, 서리로 저들의 돌무화과나무를 죽이셨다. (시편 78, 47)

 

제21강 구약성경의 다양한 나무들

 

안녕하세요? 한님성서 연구소의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성호경 바치고 시작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그리고 집에서 이 강의를 시청하시는 여러분, 일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자, 평신도 신학자가 설명해 드리는 구약성경과 신들, 오늘은 21회

강의입니다. 지난 시간부터 우리는 이 강의의 여섯 번째 주제 나무에 대해서 지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나무에 대해서 우리가 보았는데요. 단순히 이제 목재 자원이 아니라,

어떤 돈으로 나무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든 사물을 볼 때 다 마찬가지지만 나무를

볼 때도 어떤 종교적인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그런 시선을 가지고 보았죠.

 

아마 큰 나무를 보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느낌이 있습니다. 수백, 수천 년을

컸을 저 나무가 정말 그동안 묵묵하게 인간의 역사, 동물의 역사를 다 지켜봤을 것이고,

또 그 나무에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벌레나 새들이 얼마나 깃들어 살고, 또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부터, 또 거기서 나오는 나무 열매를 또 얼마나 많은 짐승이 먹고, 그 나뭇잎을

먹고 했을까? 하면서 아, 참 귀하고 넉넉한 피조물이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들죠.

 

그런데 그런 마음이 우리한테, 우리 현대인들한테 더 좀 필요한 마음이 아닐까라는 생각

을 우리가 같이 해 봤습니다. 물론 인제 미신으로 빠지거나, 숭배하거나 그러면은 안 되

겠지만 피조물은 그렇게 의미로 보는, 우리가 종교적인 눈으로 보는 그런 게 우리한테 필

요하다 하는 걸 보았고요.

 

또 이제 제가 말씀드리지만 우리 교회가 이제 선교 3백년 대를 향해서, 신자수 5백만 명이

넘는 이런 사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신잗르은 더 많은 역활을 사회에서나 우리 문화에서나

역사에서 요구 받을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음도 잘 알아야 되지만 성경과 관련된

교회와 관련된 교양도 늘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선교지이기도 하나까, 그래서 그리스도교 교양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구약성

경을 읽으실 때 과연 이제 구약성경의 나무와 관련된 그 구절도 잘 읽으시고, 거기와 관련

해서 아, 이런 면도 있다 하는 걸 좀 알으셨으면 좋겠다 하는 거죠.

 

그래서 요번 시간에는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3가지 나무를 볼 것입니다. 세 가지 나무는

뭐냐 하면, 하나는 참나무고요, 하나는 향엽나무고요, 하나는 돌무화과나무입니다.

 

# 거룩한 나무 1 - 참나무

 

자, 그럼 지금부터 참나무를 보겠습니다. 여러분, 참나무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나라의 참나무는 참된 나무, 좋은, 되게 이름이 좋죠? 그리고 되게 단단하죠? 참나무

로 만든 몽둥이 그러면 단단하고 그렇게 쓰이는데요. 우리 말로 참나무 그러면 굉장히 좋

은 나무예요. 구약성경에서는 참나무 하고 향엽나무하고 좀 비슷하게 쓰여요. 좀 의미 체

계가 비슷해요. 그리고 굉장히 자주 나오는데요. 우리나라 말에도 참나무가 되게 좋은 말

이지만 히브리 말에서도 참나무는 좋은 말이예요.

 

 

 

앞에를 보시면 히브리 말로 참나무 하고 향엽나무가 비슷해요. 참나무는 '엘로온'이라고

그러고, 향엽나무는 '엘라'라고  하는데 엘로온이라고 제가 쓴 거는 길게 발음하셔야 되고

향엽나무 엘라도 길게 발음아셔야 되요. 엘-라. 두 말은요 말도 비슷하지만 어근이 같애요.

히브리 만의 엘로온의 '온' 그러는 건 어떤 중요한 자리를 의미하거든요.

 

그래서 보면은 헤브론, 시온 이렇게 '온'이 들어가면은 뭔가 좀 중요한 자리이고, 나무에

저런 게 들어갔다는 건 저 나무가 보통나무가 아니라는 걸 의미하죠. 이 말은 공통적인

어원은 '아왈', '울' 이렇게 발음할 수 있는 건대 '높다'라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참나무를 만약에 우리나라 말로 조금 어색함을 무릅쓰고 직역을 하자면은 참나

무는 '높은 나무' 조금 더 의미를 두자면은 '드높은 나무' 왜 참나무는 크잖아요. 아니면은

'우두머니 나무' 나무 중에서 가장 높은 으뜸인 나무 정도 될 것이고요. 이 이름 자체에서

뭔가 거룩한 기운을 여러분이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으뜸인 나무, 높다는 나무니까요.

 

* 참나무를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온'을 직역하면 '드높은 나무' 또는 '우두머리 나무'

  라는 뜻이다

 

향엽나무도 비슷하죠. 높다라는 말의 여성형 어미 '아'가 붙어서 '엘라'가 됐는데 이것도

아마 비슷할 거예요. 우리나라 말에 '참'은 높다는 뜻도 있죠. 좋고, 진실되고 하는 것의

의미가 있죠. 그러니까 이 나무는 어느 정도 우리나라 말하고 히브리 말하고 공통적인

마음이 좀 있는 나무예요. 어떤 면에서 옛 사람들의 지혜는, 참나무를 보고 들었던 지혜는

뭐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히브리 사람들이나 그렇게 많이 다른 거 같지는 않아요.

 

이런 면을 이렇게 느껴보시는 것도 구약성경을 읽을 때 다른점만 있는 게 아니라 굉장히

비슷한 점도 많다. 옛날 우리 조상들하고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들하고 이렇게 연락이 없

었을텐데도 마음이 이렇게 공통적으로 많다 하는 걸 느끼실 때도 아마 이것도 구약성서

를 공부하는 어떤 묘미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향엽나무 하고 참나무 하고 비슷하지만 구약성경에서 이 나무를 긍정적으로만

묘사하는 건 아니예요. 태도가 양면적이예요. 한때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얘기하고 또

어떤 때는 굉장히 또 부정적으로 얘기해요. 그래서 긍정적으로 얘기할 때 하고 부정적

으로 얘기할 때 하고 둘 다 말씀드릴텐데 어느쪽부터 볼까요? 긍정적인 거부터 보는 게

낫겠죠?

 

참나무는 여러분이 참나무 그러면 어떤 게 생각나실지 모르겠지만 구약성경에서 참나무

그러면 제일 많이 나오는 게 모레의 참나무예요. 들어보셨을지 모르겠는데요. 생각나시는

분도 계실 거예요. 야훼 하느님의 성소가 있는 곳에 참나무가 있었다라는 것을 우리가 많

이 찾을 수 있어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스켐의 성소로 가는데 스켐의 성소가 어디냐? 도대체 이걸

어디로 가야 되느냐? 그랬을 때 어떻게 얘기 하냐 하면은,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이예

요. 성소가 알려주는 지표가 됐던 곳인데 교재 169쪽에 있습니다. 창세 12,6인데요.

 

* 창세 12,6: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스켐의 성소가 어디 있어요?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이예요. 스켐의 성소 그러면 어떤

곳이예요? 하느님을 믿는 성전이 있거나 아니면은 어떤 제단이 있거나 해서 우리가 그

성소가 어디 있냐? 그러면 다 알 수 있는 곳인데 그 성소를 알려 주는 곳이 참나무가 있는

곳이었어요. 이런 걸 우리나라 말로 요즘 어떻게 표현할 수 있냐 하면 '랜드마크 빌딩'

이라고 있죠. 어떤 데 가면은 우리가 그곳을 기준으로 해 갖고 뭐 지명을 설명하는 것.

 

이를테면 종각은 원래 지명이기도 하지만 거기 종이 있는 각이, 누각이 있어 가지고 종각

이라고 부르다가 거기를 그냥 종각, 종각 하다가 지명이 되어 버린 거죠. 그런 곳이 여러

개 있죠. 예를 들어서 이 평화방송이 있는 곳에, 평화방송이 어디 있어?라고 물어보면, 보

통 명동 성당에서 어떻게 어떻게 와 이렇게 얘기 하죠.

 

왜냐하면 명동 성당이 누구나 다 아는 기준이 되고, 거기에서 어떻게 와라.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처럼. 유럽에 가면은 큰 수도원이나 큰 성당이 그냥 지명이 되어버린 경우가 있

어요. 노틀담 그러면 빠리에서 노틀담 성당이 있던 곳이지만 고 근처에는 그냥 노틀담이라

고 불러요. 성당이 지명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런 것도 만찬가지예요. 제가 독일에 유학한 곳도 뮌스터 슈바르작이라는 군 이름인데 

저는 그게 도시 이름인 줄 알았더니 그게 거기 있는 수도원 이름이었어요. 수도원 이름이

도시 이름이 된 거고. 쌍투 오틸리에도 마찬가지예요. 도시 이름에 쌍트, 성 이런 게 많이

들어가는 이유도 거기가 그냥 지명이 되어버린 것이죠.

 

요새는 인제 이런 랜드마크 빌딩을 성당이나 이런 데가 차지하지 않고 뭐가 차지해요?

뭐 커피숍 어디, 햄버거 집 어디, 어디 햄버거 집에서 몇 미터. 이렇게 표시하죠. 그것도

이제 시대별로 많이 달라지는 거 같애요. 지금은 뭐 햄버거 집 어디나 커피숍 어디라고

표현하지만 우리가 한 백 년 전만 해도 성당이 어디 있고, 뭐 어디 큰 절이 있고 이렇게

표현 했었지요.

 

그런데 수천 년 전에 구약성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데 옆에

스켐 성소가 있구나. 그러면 어떤 게 더 유명한 거냐 하면, 모레의 참나무가 더 유명했던

거예요. 얼마나 큰 참나무가 있었길래, 얼마나 멋있는 참나무가 있었길래 그렇게 그런 표

현을 했을까? 스켐 성소에 갔다라고 어떻게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것도 한번 생

각해 보시면은 많이 다른 사회상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다시 말하면 모레의 참나무는 그냥 참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참나

무, 누구나 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그곳이었어요. 그리고 그 모레의 참나무는 그 참나무와

관련되 지명 자체가 굉장히 거룩한 곳이었어요. 판관기 9장 6절을 보면, 교재 169쪽이예요.

 

* 판관 6,9: 그리하여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스켐에 있는 기념

  기둥 곁 참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

 

스켐으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운 게 어디서 세웠냐 하면은 참나무 옆에서 세웠어

요. 말씀드렸듯이 이런 모세의 참나무는 널리 알려진 지명인데 어떤 지명을 얘기할 때 기

준이 되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그 참나무 아래에서 아비멜렉이 임금으로 올라갔어요. 임금

의 대관식이 열리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대관식, 임금이 임금으로 즉위하는 곳 그런 것이

열리는 곳은 아무데서나 열리지 않아요. 중요한 곳에서 열려요.

 

지금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대통령 취임식이나 이런 거는 국회나 이런 헌법 기관의 중요한

곳에서 열리죠? 우리가 신부님  서품식 할 때도 보면 큰 대성당 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죠.

왜냐하면 그 하는 장소 자체가 중요하니까. 임금이 자신의 즉위식을 연다 하는 것은 그 참

나무 밑이 보통 장소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참나무 자체도 굉장히 의미있는 참나무

였을 거예요. 신명기 11장 30절을 여러분이 다시 보겠습니다. 교재 170쪽인데요. 모레의

참나무가 이런 표현도 있어요.

 

* 신명 11,30: ?그 산들은 요르단 건너편에, 서쪽으로 좀 더 가서, 아라바에 사는 가나안

  인들의 땅에, 곧 길갈 맞은쪽, 모레의 참나무 곁에 있지 않느냐?

 

어떤 산을 설명하고 지명을 설명하는데 우리와 생각이 정반대예요. 그 산 어디 돌아가면

어떤 나무가 있다라고 큰 거부터 얘기하고 작은 나무를 얘기하는 게 보통인데 이 구절은

자세히 생각해 보면은 그 산들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 참나무에서 맞은편에 있지 않느

냐? 잘 생각해 보면은 이게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대단한 참나무였을까?

 

그래서 참나무, 모레의 참나무를 생각하실 때 그냥 참나무 한 그루, 어디 성황당 마을에

큰 나무가 있었다. 이 정도를 넘어서서 이 참나무 자체가 구약성경에서 뭔가 좀 거룩한

것을 지니고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명동 성당이나 아니면 악현동 성당 이렇게

큰 오래된 성당 같은 그런 느낌이 나무에 서려 있는 거예요.

 

창세기 12장 6절,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은 아브라함 이야기였어요. 그리고 두 번째

말씀드린 것은 스켐의 참나무는 판관기 이야기예요. 벌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을 하고

판관시대였어요. 그리고 신명기 11장은 훨씬 후대의 요시아 임금 시대예요. 그러니까 남

북이 분열되고 나서. 하나의 참나무가 아브라함 시대부터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고 나서

남북이 분열될 때까지 계속해서 서 있으면서 중요한 역활을 했던 거죠.

 

이 모레의 참나무가 나올 때마다, 스켐 성소 옆의 참나무가 나올 때마다 여러분이 이런

거를 생각하시면서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래요. 게다가 참나무는 스켐 성소 뿐만 아니라

다른 성소에서도 거룩함의 표지 역활을 했어요. 베텔 성소에서도 참나무가 있었어요.

스켐 성소에도 있었고, 베텔에서도 있었고. 그런데 베텔 성소에 나오는 참나무는 조금

특이한데, 장례식과 관련이 있었어요. 창세기 35장 8절입니다.

 

* 창세 35,8: 그때 레베카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 베텔 아래에 있는 참나무 밑에 묻혔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알론 바쿳(통곡의 참나무)이라 하였다.

 

참나무 밑에 장사를 지내서 사람을 묻었기 때문에 그 참나무를 통곡의 참나무라고 했다는

것이죠. 아, 나무 아래에 사람을 묻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참나무였어요. 스켐 성소에서도 참나무였고. 현대 수목장 같은 느낌이 있기는 하는데 구

체적으로 어떻게 묻었는지는 성경에 이야기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장례 절차는 추측할 수

있어도 알 수는 없어요.

 

잠시 여기서 제가 성경에 대해서 여담을 하나 말씀을 드릴려고 하는데요. 평신도들이 알아

두시면 좋을 거 같은데. 제가 어떤 책을 봤더니 이런 말씀을 하더라고요. 성경이 왜 위대한

책인 줄 아느냐? 왜 위대한 책인 거 같애요? 그분이 말씀하시기로는 "성경은 행간이 많다.

꼭 중요한 얘기만 해 주시고 중간은 우리의 상상력으로 듣는 사람이 알아서 듣도록 해 주

는 그런 책이다."

 

* 성경은 우리에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더 큰 하느님을 만나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는

  '행간'을 많이 갖고 있다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우리가 지금 현대에 신문 기록하듯이 꼼꼼하게 적고 그

제자들의 반응, 제자들의 행적도 다 기록했으면 신약성경은 한 10권쯤 나와야 될 거예요.

두툼하게. 그죠? 만약에 구약성서, 이스라엘의 5천년 역사는 수천 권 도서관 하나 채워도

모자랄 거예요. 그런데 구약성서나 신약성서는 여기 나오는 것처럼 '장사지냈다' 한 마디

만 하고 나머지는 얘기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력을 가지고 묵상하면서 읽어야 되고

읽을 때만다 그 행간에서 우리가 굉장히 자유롭게 기도하고, 자유롭게 놀 수 있어요.

 

아, 이게 성경의 매력인 거 같고, 사실은 성경뿐 아니라 다른 경전도, 인류의 중요한 경전

은 독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공간이 많아요. 그래서 논문이 재미가 없는 거예요. 논문은

이런 상상력을 허용하지 않아요. 정확하게 써야 되기 때문에 빽빽하게 쓰는 거고, 두 글이

다른 것이죠.

 

이냐시오 성인이 이 점을 말씀하신 거 같애요. 이냐시오 성인은 "상상력을 죽이지 마라.

상상력은 우리가 기도하고 하느님을 묵상 하는데 매우 매우 중요한 우리의 탈렌트고

하느님이 우리한테 주신 선물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상상력은 억제해야 될

아니라 오히려 잘 성장시켜서 잘 사용을 하면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서, 그리고 우리

웃을 ?향해서, 그리고 성경을 향해서 상상력을 잘 쓰면 그건 굉장히 우리한테 큰 힘이

되고 우리한테 도움이 된다.

 

물론 상상력을 잘못 쓰면 나쁘게 쓸 수도 있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

우리한테 맡겨져 있는 것과 같지요. 성경은 우리한테 상상력을 잘 써서 하느님을 만나도

록 요구하고 있고요. 우리는 스켐의 이걸 보면서 "아, 나무 밑에 장사를 지냈다" 나머지

얘기를 우리가 상상을 하면 되요. 이 나무가 보통 나무가 아니구나 하는 걸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죠.

 

사무엘기에서도 참나무하고 베텔 성소하고 연결이 되요. 베텔 성소를 알려주는 표지의

역활을 하는데요. 이런 표현이 있어요. 이거는 여러분이 한번 잘 보세요. 베텔 성소 참나

무 옆에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인데 1사무 10,3입니다.

 

* 1사무 10,3: 거기에서 더 가다가 타보르의 참나무에 이르면, 하느님을 예배하러 베텔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오. 한 사람은 새끼 염소 세 마리를 끌고, 한 사람은

  빵 세 덩이를 들고, 나머지 한 사람은 술 한 부대를 메고 있을 것이오.

 

타보르의 참나무에 갔는데 타보르의 참나무에 이르면 그 참나무에서 보면은 베텔로 올라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 사람들이 뭘 들고 가냐 하면, 예물을 들고 가요. 그리고 참나

무를 지나가는데 이것도 그냥 지나가는 거 같지 않고 참나무가 어떤 표지의 역활을 해서

거기에서 뭔가 종교적인 토론을 했을까? 이거는 우리의 상상력에 맞겨야 되는 거죠. 우리

가 잘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참나무가 뭔가 들려가는 곳이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죠.

 

판관기에서도 하나 더 보겠습니다. 거기서 참나무가 나오는데 이 참나무는 이름이 굉장히

재미있어요. 판관 9장 3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교재 171쪽이죠.

 

* 판관 9,37: ?그러나 가알이 다시 말하였다. "보십시오, '세상 배꼽'에서 군대가 내려오고

  있소. 부대 하나는 '점쟁이 참나무' 쪽에서 오고 있소."

 

이것도 역시 랜드마크 빌딩처럼 점쟁이 참나무 쪽에서 부대가 오고 있다라는 걸 말씀드리

는데 재미있는 건 참나무의 이름이 뭐냐 하면, '점쟁이 참나무'예요. 참나무 밑에서 점집을

차렸는지, 거기 옛날에 무당이 하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참나무 자체가 보통 참나무가

아니었던 거예요. 이제부터 구약성경에서 참나무 보실 때 그냥 참나무가 아니라 어떤 의미

있는 참나무다 하는 걸 보시기 바래요.

 

자, 이제 참나무의 긍정적인 거는 말씀을 드렸고, 다음에는 향엽나무의 긍정적인 거를

말씀들릴께요.

 

# 거룩한 나무2 - 향엽나무

 

향엽나무도 참나무하고 종교적인 쓰임새가 비슷하죠. 이제 우리가 여호수아를 잠깐 볼텐

데, 여호수아는 어떤 인물이예요? 모세의 뒤를 이은 인물이예요. 구약성경 안에서 하느님

제외하고 가장 큰 존재, 가장 큰 인물이 누구냐? 그러면  아마 모세일 거예요. 모세.

 

구약성경의 가장 큰 예언자이고 모세의 후례자가 누구예요? 여호수아죠. 눈의 아들 여호

수아. 여호수아는 그 비중이 정말 요새 시쳇말로 하면 장난이 아니예요. 굉장히 중요하신

분인데 여호수아가 어떤 일을 하셨냐 하면, 백성과 새 계약을 맺었어요. 여호수아기 맨

밑에 가면. 그래서 큰 돌에다가 자, 이제 하느님하고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이

있지만 다시 한번 맺었으니까 큰 돌에다가 말씀을 기록했어요. 그런데 그 말씀을 기록한

것을 어디에 두었나 비석을. 잘 보세요. 여호 24,26입니다.

 

* 여호 24,26: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모두 하느님의 율법서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

  다가 그곳 주님의 성소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세웠다.

 

자, 주님과 이집트에서 탈출해 가지고 온갖 고난을 광야에서 다 겪고, 약속된 땅에 들어

갈려고 하는데 모세는 못 들어갔죠. 여호수아가 들어 갔어요. 여호수아가 들어가 가지고

이제 "야, 너희들 하느님하고 이제 다시 계약을 맺는 거다." 이제 확인하는 계약을 맺었는

데, 그게 얼마나 중요해요. 그 문서가. 그래서 맺은 계약을 다 이제 돌에 썼어요.

 

그런데 ?이 돌을 어디에 둘 거냐? 당연히 성소에 둬야 되는데 아직 성소가 있기 전이죠.

그 돌을 어디에다 두었냐 하면은 향엽나무 밑에 놨어요. 이게 장소를 그냥 고른 게 아니

예요. 아까 참나무가, 참나무 밑에 장사를 지냈다는 걸 보셨죠? 향엽나무 밑에도 장사

지낸 곳이 있어요. 그것은 1역대 10,12에 있는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 1역대 10,12: 그러자 그곳의 용사들이 모두 나섰다. 그들은 사울의 시신과 그 아들들의

  시신을 거두어 야베스로 모셔다가, 그들의 뼈를 야베스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묻고

  이레 동안 단식하였다.

 

사울은 구약성경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임금은 아니예요. 그래도 이스라엘의 임금이

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장사를 잘 지냈겠죠. 중요한 임금의 시신을 묻는 것이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그게 어디냐 하면, 야베스로 모셔다가 구약성경은 아주 콕 찝어서 야베스

의 어디도 아니고 야베스의 향엽나무 밑에 묻었다라고 딱 정해 주세요.

 

이것도 역시 향엽나무가 임금의 중요한 시신을 묻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는 것이죠. 향엽나무 근처를 우리가 보았고요. 그 다음에 아까 스켐 성

소와 참나무를 보았는데 스켐 성소와 향엽나무도 관련이 있어요. 그런데 이거는 아마

여기서 처음 들으시는 분들도 많을텐데 창세기 35장에 굉장히 재매있는 구절인데 이스

라엘의 옛날 풍습 한 면을 알 수 있어요.

 

이거는 교재에 없는 구절로 제가 읽어서 보충 설명을 드릴 거예요. ?창세기 35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야곱한테, 야곱이 인제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라 야곱이 이제 식솔들 하고

하인들 하고, 자기의 처자식 하고 ?다 데리고 어느 정도 유목민처럼 가족이 움직이고 있

는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 창세 35,1: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베텔로 올라가 그곳에서 살아라.

  그곳에 제단을 만들어, 네가 너의 형 에사우를 피해 달아날 때 너에게 나타난 그 하느

  님에게 바쳐라.

 

자, 베텔로 가야 되요. 베텔은 중요한 성소가 있는 곳이었죠. 야곱 일행은 이제 하느님이

명령하신 베텔로 갔어요. 그리고 베텔에서 제단을 만들려고 해요. 그런데 하느님의 제단

을 만들기 전에 우리가 부정한 게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야곱이 이렇게 말해요.

 

* 창세 35,2: ?야곱은 가족들과 자기에게 딸린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너희에게 있는

  낯선 신들을 내버려라.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낯선 신들을 버리라니? 조그만 낯선 신상들을 지녔다는 말이예요. 아마 부적 같은 걸

지니고 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는 우리가 계속 보지만 고대 근동 사회는 다신교

사회여서 야곱의 식솔들 가운데서 그런 것을 어떻게 자기가 알았든지 몰랐든지 무의식

적으로 어떤 물건이 들어왔을 수 있죠.

 

하느님의 제단을 우리가 베텔로 만들러 가는데 거기에 낯선 신상을 우리가 우리도 모르

게 주머니나 어디나 짐 속에 들어 있으면 안 되는 얘기죠. 그러니까 그거를 다 버려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곧 야곱의 일행 가운데는 낯선 신상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분명

히 있었던 거 같고, 또 그것이 어찌 보면은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좀 사람들이 그냥 알

고 있었을 수도 있어요.

 

그것을 야곱은 아마 이렇게 말했던 거 같애요. 추측이지만 이것도, 그런 것을 평소에 지

니고 있는지 돌아봐라. 다시 한번 각자의 짐을 찾아봐라. 아마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 짐 속에 그런 것이 섞여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태도는, 그 당시에 "나는 신

상이 없으니까 나는 괜찮아, 나는 그런 거 안 갖고 다녀" 이렇게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가

영성적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 같애요.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러 갈 적에 혹시라도 뭔가 나의 생활과 나의 생각과 나의 몸 어디

선가 더러운 게 있으면 깨끗하게 씻고 가야 되겠죠? ?그래서 야곱이 이렇게 말하니까 그

들은 지니고 있던 신상과 패물을 다 땅에 파묻었어요. 그런데 이 신상을 어디에 파묻었

냐가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하시겠지만 이것도 역시 향엽나무 밑에 파묻었어요.

이거는 교재에 있어요. 교재 172쪽에 있는데요.

 

* 창세 35,4: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낯선 신들과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들을

  내놓았다. 야곱은 스켐 근처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그것들을 묻어버렸다.

 

땅에 묻는다는 건 아까 장사지낸다고 그랬죠? 그런데 고대 근동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

했냐 하면, 땅은 저승이고 땅에 묻어버리면 죽은 거고 없는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

서 우리가 낯선 신들, 우리가 낯선 도시를 쳐들어가서 거기서 낯선 신상들 같은 거는 다

땅에 묻어버려요. 땅에 묻으면 끝나는 거예요. 다 죽는 거라서.

 

그런데 그 땅에 묻은 그곳이 어디냐? 그곳이 바로 향엽나무 밑이라는 것이죠. 아마 향엽

나무 밑에 묻어야지 아마 거룩하게 우리가 완전히 다 묻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

같애요. 향엽나무는 보통 나무가 아니었던 것이고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여러분들은

아, 이런 걸, 신상을 지니고 다녔구나라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이 구절이야말로 우리가

성전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하느님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우리의 태도를 좀 알려주는

좋은 구절로 남아서 지금까지 전승해 왔던 거 같애요.

 

향엽나무의 거룩함이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판관기 6장인데요. 하느님의 천사

가 내려오는데 하느님의 천사가 어디에 내려오냐 하면, 하필이면 향엽나무에 내려와요.

그래서 거기서 어떤 말씀을 전해주는데요. 172쪽 판관기 6장 11절입니다.

 

* 판관 6,11: 주님의 천사가 아비에제르 사람 요아스의 땅 오프라에 있는 향엽나무

  아래에 와서 앉았다. 그때에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미디안족의 눈을 피해 밀을

  감추어 두려고, 포도 확에서 밀 이삭을 떨고 있었다.

 

하늼의 천사가 아무데나 내려오시지 않죠. 그리고 우리가 저번 시간에 봤지만 나무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은 다윗이 했던 일이예요. 그런데 여기서도 향

엽나무예요. 콕 찝어 가지고. 계속 지금 보고 있지만 참나무 하고 향엽나무는 보통 나무

가 아니라 뭔가 좀 일어나는 장소의 나무예요.

 

하느님의 천사가 향엽나무에 앉아서 뜻을 정한 거와 더불어서 이제 기드온이 그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천사한테 예물을 바치는데 하느님의 천사가 그 예물을 어디서 잡수시냐

하면, 역시 향엽나무 아래에서 잡수세요. 그거는 판관기 6장 19절이예요.

 

* 판관 6,19: 기드온은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잡고 밀가루 한 에파로 누룩 없는 빵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기는 광주리에, 국물은 냄비에 담아 가지고 엽나무 아래에

  있는 그분께 내다 바쳤다.

 

자, 향엽나무는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오는 곳이고, 신상을 파묻은 곳이고, 하느님의

천사한테 우리가 제물을 다시 드리는 곳이기도 해요. 이제 잘 보시면 향엽나무 밑에

여러분 혹시 지나가시면 함부로 지나가시지 않을 거예요. 의미있는 나무라는 걸 알

수 있으시겠죠?

 

그래서 지금까지 보면은, 정리해 보면 향엽나무는 주님과 계약을 맺고 기념비를 세운 곳,

임금을 묻은 곳, 잡신들의 신상을 파묻은 곳, 주님의 천사가 내려오는 곳, 그리고 주니의

천사한테 제물을 바친 곳이예요. 거룩한 나무죠. 이렇게 긍정적인 향엽나무 상은 참나무

의 긍정성 하고 거의 비슷해요.

 

* 향엽나무는 주님과 계약을 맺고 그 기념비를 세운 곳, 임금을 묻은 곳, 잡신들의 신상

  파묻은 곳, 주님의 천사가 내려오는 곳, 그리고 주님의 천사에게 제물을 바치는 곳으로

  긍정적인 상은 참나무와 비슷하다

 

이사야서 6장은 ?이제 두 가지를, 향엽나무와 참나무가 동시에 한 구절에서 나오는 곳이

예요. 두 나무 모두 매우 긍정적이고요. 이사야는 이렇게 얘기 했어요.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너희들이 이제 유배를 갈 것이다. 너희들 다 없어진다. 너희

들 민족의 10분의 1만 남기고 다 멸망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이 마치 향엽나무가 뎅강

잘리듯이 너희들 나무가 잘릴 것이다.

 

그런데 향엽나무 하고 참나무는 뎅강 잘려도 그루터기가 남아 있어서 가끔 나뭇가지가

나올 수 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도 그루터기에서 뭔가 다시 나올 수 있다. 하느님은

너희들을 다 죽이시는 분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희망을 살려두시는 분이시다라는 말이

예요. 그거를 이렇게 표현을 해요. 이사 6,13절인데요.

 

* 이사 6,13: 아직 그곳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하여도 그들마저 다시 뜯어 먹히리라.

  향엽나무와 참나무가 잘릴 때 거기에 남는 그루터기와 같으리라.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

 

그냥 그루터기가 아니고 참나무와  향엽나무의 그루터기이고, 여러분이 이제 참나무,

향엽나무 나올 때마다 잘 보시기 바래요. 지금까지는 긍정적인 것이었어요. 이제부터는

부정적인 걸 여러분한테 말씀드릴텐데 나무를 그렇게 거룩하게 보고, 향엽나무와 참나무

는 정말 보통 나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거는 이스라엘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이스라

엘 바깥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애요. 이 언어 자체가 '높은 나무', '드높은

나무', '우두머리 나무' 이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향엽나무 밑에서 이방신한

테 의뢰를 했던 거 같애요. 전례를 하고. 그리고 이거는 우상을 섬기는 행위였어요. 그러

니까 여기에 대해서 구약성경은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를 해요. 그리고 참나무와 향엽나

무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게 거룩한 장소이기는 해도 거기서 하느님을 섬기고 또 천사

는 맞이하기는 했어도 그 나무를 깎아서 우상을 만들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밖의 다는 사람들은 아, 그거를 깎아 가지고 참나무 우상을 만들었던

거 같애요.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거를 우리가 목재우상, 나무로 만든 우상이라고

하는데 그 나무로 깎은 우상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몇몇 구절을 더 보겠는 데요.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곳곳에 우상숭배가 만연했음을 개탄했어요. 아, 우리나라

큰일 났다. 이렇게 우상숭배를 일삼다니, 그런데 이렇게 표현을 해요.

 

* 에제 6,13: 높은 언덕마다, 산봉우리마다, 푸른 나무 아래마다, 잎이 우거진

  향엽나무 아래마다, 자기들의 온갖 우상에게 향기로운 제물을 바치던 곳에, ...

 

그러니까 산에 올라가서, 그리고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그리고 나무 아래서, 특히 향엽

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벌이고 있다 하는 것을 개탄한 거예요. 호세아 예언자는 더욱더

강하게 비판했는데요. 이방신의 종교 의례를 하던 곳이 바로 나무 밑에서 였는데 호세아

예언서를 잘 보면, 우리가 구약성경에 가끔 나오는 성혼의식(聖婚儀式, hieros gamos)

히에로스 가무스라고 그러는데 그걸 알 수 있어요. 호세아 예언서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 호세 4,13: 그들은 산꼭대기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고 언던 위에서 분향하여

  그늘이 좋다고 참나무와 은백향과 향엽나무 아래에서도 분향한다.

  너희 딸들은 불륜을 저지르고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한다.

 

참나무, 은백향이 나오고 향엽나무 다 나오는데요. 나무 아래서 불륜을 저지르고, 간음

을 한다. 이게 무엇일까? 이거는 성혼의식(聖婚儀式, hieros gamos)인데요. 아무래도

성을 매개로 하는 의식이예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게 있는데 상징적으로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자는 씨앗 여자는 밭.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 어떤 의례를 행할 수 있는데

고대 근동에서는 일부 이거를 직접 남녀가 성적 교접을 그 제의에 한 거 같애요.

 

이건 되게 이상한 거죠. 그래서 구약성경은 이런 의식을 굉장히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

고, 이렇게 직접 묘사도 안 하고 살짝 에둘러서 표현하는데 이걸 믿는 사람들, 이 성혼의

식을 했던 사람들이 어디서 했냐 하면 참나무와 향엽나무 아래서 했던 거 같애요. 역시

이 사람들한테도 이걸 아무데서나 하는 게 아니라 이 나무 밑에서, 중요한 나무 밑에서

했던 거 같애요. 그러니까 구약성경은 엄청 부정적으로 묘사하죠.

 

이런 구절이 몇 군데 더 있는데요.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그래서 이렇게도 얘기를 해요.

신명기계 신학을 한마디로 ?정리해 드리면, 이스라엘이 왜 고난을 받는가? 왜 선택받은

민족이 이렇게 막 유배도 가고, 이렇게 다른 나라에서 고생을 하는가? 하면은 한마디로

너희들이 야훼 신앙이 투철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래서 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느님한테 더 마음을 드려야 한다. 너희들 회개해야 된다. 이런 걸 많이 강조하는 신학

이었는데 이렇게 표현을 해요. 너희들이 주님한테 충실하지 못하다. 왜냐? 참나무들 때

문이에 그렇다. 하도 참나무 밑에 가가 지고 다른 신 믿고 또 이러니까 아예 어떻게 표현

을 하냐 하면 니들이 잘못하고 있는 게 참나무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할 정도로 그런 게

성행했던 거 같애요. 이사 1,29-30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 이사 1,29-30: 너희가 좋아하는 그 참나무들 때문에 너희는 정녕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가 선택한 그 정원들 때문에 너희는 창피를 당하리라.

  너희는 정녕 잎이 시든 향엽나무처럼 되고 물이 없는 정원처럼 되리라.

 

재미있어요. 참나무들 때문에 너희는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는 참나무들 때문에 잘못하

고 있는데 너희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면은 잎이 시든 향엽나무처럼 된대요. 하필이면

여기서도 향엽나무예요. 참나무 하고 향엽나무는 이렇게 자주 종교적으로 빗댈 수 있는

재미있는 나무예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참나무와 향엽나무를 보실 때 구약

성경에서 두 나무에 대한 태도가 양면적인 걸 아셔야 되요.

 

한면으로는 굉장히 거룩한 나무예요. 거룩한 성소가 있던 곳, 그리고 굉장히 모레의 참

나무 같이 유명한 나무가 있어서 그거를 중심으로 해서 지명을 알 수 있었던 곳, 그래서

하느님의 현존과 관련이 되었을 때 참나무나 향엽나무는 거룩한 것,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도 의미 있는 곳. 그런데 참나무와 향엽나무 밑에서 이방신을 믿거나 이방신

에게 의뢰를 하거나, 그것도 아주 역겨운 짓을 할 때는 아주 안 좋은 것.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죠.

 

* 참나무와 향엽나무에 대한 구약성경의 태도는 양면적으로 나타나는데 거룩한 성소나

  하느님 현존과 관련이 되었을 때는 무척 긍정적이지만, 우상이나 이방신과 관련 되었

  을 때는 단호하게 부정적이다

 

두 경우 공통점은 그 나무를 우리 같은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현대인들처럼.

두 경우 모두 나무를 어떤 의미의 나무로 봤어요. 의미의 나무로 보되 어떤 믿음으로

보냐 하면 중요한 거겠죠. 종교적인 나무, 의미의 나무를 어떻게 묘사하든지 간에 현대

인과 되게 다른 시각인 것은 확실해요.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냥 이런 나무를 그냥 갖다 쓴 거는 아니예요. 자기네들의

독특한 믿음이 있는데 이스라엘 민족의 다가오는 역사적 고난 이것도 역시 나무에 빗댔

어요. 이런 건 다른 나라 종교에서는 알 수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향엽나무 같이 되리라. 시들은 향엽나무 같이 되리라. 잘려진 향엽나무나

참나무 밑기둥,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새싹 같이 되리라. 이런 표현은 굉장히 재미있는

표현들이죠. 그래서 구약성경 안에 나무에 어린 마음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여러 겹이

예요. 하나의 단일한 마음이 아니라 복잡한 마음들이 이렇게 마치 카스테라 빵처럼

한겹 한겹 이렇게 쌓여져 있어요.

 

그거를 이제 뚫고 봐야지 구약성경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나무 돌무화과나무를 여러분한테 말씀드리겠습니다.

 

# 돌무화과나무

 

돌무화과나무는 구약성경에서 굉장히 독특하게 나오는 경우인데요. 어떤 나무에 종교적

인 마음이 서려 있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없어요. 돌무화과나무는

그냥 진짜 말 그대로 돌무화과나무예요. 진짜. 어떤 의미가 없는 나무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도 그냥 나무를 지금 우리가 보듯이 목재 자원이나 이렇게 의미 없이 보지는

않았는데 그 의미가 들어가는 의미의 양은 나무마다  달랐던 거 같애요.

 

 

우리나라 말도 마찬가지죠. 돌 그러면 다 안 좋은 거잖아요. 돌사과 뭐 이런 식으로 다

안 좋은 것이죠. 그런데 이름도 번역을 잘한 이름이예요. 돌무화과나무. 이런 나무의 표

현도 있어요. 참나무는 되게 좋은 나무였죠. 구약성경에서 그래서 고대 근동의 종교심과

완전히 다른 탈색된 이름도 이렇게 써요. 그게 돌무화과나무인데 여러분 앞에 돌무화과

나무는 이름도 이렇게 써요.

 

 

 

따라해 보세요. 쉬크마. 쉬크마. 별로 이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죠? 아까 하고 틀리게 돌

무화과나무인데 이게 다른 나라에서는 거룩한 나무였어요. 이따 말씀드리겠지만 이집트

에서는 파라오를 상징했던 거룩한 나무인데 구약성경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그냥 정말

재산이나 목재로 나와요. 그런 나무도 있었어요.

 

특히 이름이 돌무화과나무에서 보듯이 값이 싸고 부실한 나무, 보잘 것 없는 나무, 이런

의미로 나와요. 우리나라 말에 돌무화과나무라는 이 이름은 이런 변변찮은 느낌, 별 것

없는 느낌을 잘 살린 매우 좋은 번역이예요. 제가 지금 인용할 거는 열왕기인데요. 솔로

몬의 시대에 예루살렘의 영화를 묘사하는 거예요.

 

솔로몬은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양면적인 평가를 받은 분이예요.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

로서 이스라엘을 영화로 이끌었죠. 그래서 그 당시 이스라엘이 부강하게 되고 또 이제

주님의 성전도 짓고 하는, 그리고 솔로몬의 시가도 편찬하고 큰 업적을 남긴 임금인데

외교에 힘쓰다가 어떤 실수를 하나 저질렀죠.

 

이스라엘에 이방신들이 들어오게 하고, 많이 결혼을 하면서 그런 역사적인 과오를 남긴

인물이예요. 그런 걸 보면은 아까 구약성경에서 행간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구약성경의 인물들도 무조건 우리가 구약성경에 나왔으니까 그래서 성인이 되고 우리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니까 다 받들어 모셔야 된다.

 

물론 다 존경심을 가져야 되지만 한 인물에 대해서 성경이 입체적인 평가, 장점도 전하고

단점도 전하는 것을 우리가 다 볼 수 있어요. 뒤에 느헤미아기에서도 나오지만 솔로몬에

대해서 실랄하게 비판을 하는 구절도 구약성경에 있거든요. 솔로몬의 죄, 이방신을 이스

라엘에 끌어들인 죄라고 하잖아요.

 

구약성경은 중요한 인물들에는 양면을 다 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의 인물이나 아니면

성경의 인물들을 볼 때도 우리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나름대로 생각하고 또 이렇

게 상상하고, 또 이렇게 성찰하고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런 좋은 예를 전해주는 분이죠.

 

어쨌든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영화를 누렸어요. 그래서 솔로몬의 시대에 향백나무

는 굉장히 비싼 건축재료였어요. 향백나무가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부유하다는 뜻이었는

데 향백나무가 얼마나 많은가? 돌무화과나무처럼 많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돌무화과나

무, 쓰잘데기 없는 나무니까 그렇게 흔했다 하는 것이죠.

 

1열왕 10,27과 똑같은 구절이 2역대 1,15 하고 9,20절, 벌써 구약성경에 세 번이나 나오는

표현인데 이런 표현이 있어요.

 

* 1열왕 10,27: 솔로몬 임금 덕분에 예루살렘에서는 은이 흔해졌고, 향백나무는

  평원지대의 돌무화과나무만큼이나 많아졌다(1열왕 10,27; 2역대 1,15; 9,27).

 

은이 돌처럼 많다. 알죠? 은이 돌처럼 많으니까 은이 돌처럼 굴러다는다는 거 아니예요.

부자라서. 그런데 향백나무가 돌무화과나무만큼이나 많다. 그러니까 은은 향백나무이고

돌무화과나무는 그냥 돌이죠. 진짜. 돌무화과나무는 여기서 그냥 쓰잘데 없는 흔하고

값싼 나무 이런 식의 표현으로 그냥 쓰였어요. 그런 표현이 하나 더 나오는데,

 

* 1역대 27,28: ?평원 지대에 있는 올리브 나무와 돌무화과나무는 게데르 사람 바알

  하난이, 기름 창고는 요하스가 관리하였다.

 

돌무화과나무는 그냥 재산 중에 하나로만 나와요. 이 재산은 누구, 이 재산은 누구,

이런 식으로 어떤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또 하나가 나오는데 이것도 역시 향백나무와

비교 되서 나와서 좀 돌무화과나무한테 제가 미안한데요. 이사 9,9에 이런 표현이 있어요.

 

* 이사 9,9: 토담이 허물어졌으니 네모 돌로 쌓자. 돌무화과나무가 부서졌으니

  향백나무로 대신하자.

 

부실한 건축 재료가 하나  부서졌으니까 좀 좋은 걸로 이번에는 수선하는 데 갖다 대자

하는 그런 의미지요. 이사야서에서 나온 얘기인데 돌무화과나무가 그냥 부실한 건축

재료의 하나로 나와요. 이런 나무도 있다는 것이죠. 구약성경에 나무라고 그래서 모두

다 거룩하고, 모두 다 안 좋고 이런 나무가 아니라 어떤 나무는 매우 의미 있고, 어떤

무는 그냥 나무토막, 부실한 재료, 이렇게  쓰인다는 거예요.

 

아모스 예언자 얘기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께요. 아모스 예언서를 여러분이 한마디로

표현하면은 요즘의 운동권하고 좀 비슷해요. 사회 개혁, 정의, 부자들에 대한 비판,

그런 게 굉장히 집중 돼 있어요. 아모스 예언서하고 미카서에 그게 많죠.

 

그런데 실제로 아모스는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중앙에서 제대로 교육

받고 이런 출신이 아니라 시골에서 올라 온 분이었어요. 그래서 아모스가 이렇게 자기

를 표현을 해요. 자기를 표현할 때 177쪽에 있어요.

 

* 아모 7,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자기 출신을 얘기하는 거예요. 나는 원래 예언자 가문에서 나지도 않았고, 그런 예언자

도 아니었고, 예언자의 제자 그러니까 제대로 예언자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그런 목동이고 돌무화과나무나 그냥 가꾸던 시골의 촌뜨기였을 뿐

이다라고 자기 자신을 폄하하는 거예요. 그럴 때도 역시 돌무화과나무는 시골에서 그냥

보통의 그냥 쓰잘데기 없는 그런 별 것 아닌 그런 식으로 스스로 겸양해 표현한 것이죠.

 

그런데 지금까지 봤듯이 돌무화과나무는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지도 않고요. 나올 때마다

별 것 아닌 걸로 나와요. 그런데 돌무화과나무는 이집트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나무였어요.

바로 옆나라에서. 하토르 신을 우리가 본적이 있는데요. 피의 신 볼 때도 봤고, 이집트에

서 굉장히 사랑 받는 여신이었어요.

 

왜냐하면 하토르 여신은 이집트의 여신, 신들을 보면 이집트는 이렇게 옆으로 그리잖아요.

주로. 그런데 하토르 여신만 정면을 보고 있어요. 그리고 엄마 같이 아주 푸근한 우리 말

을 다 들어 주고 사람들을 치유해 주고 굉장히 좋은 엄마 같은 여신인데 그래서 인기가

굉장히 많은 여신인데 하토르 여신의 상징이 이 돌무화과나무였어요.

 

그리고 이집트의 18왕조, 19왕조 시대에서는 하늘의 여신 누트(Net)도 역시 돌무화과나

무가 상징이었어요. 그런데 이웃나라, 큰 나라 이집트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나무였는데

이게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도 안 중요한 그냥 건축 재료고 쓰잘데 없는 그냥 시골의 나무

로 표시됐지만 이것도 학자들은 굉장히 재미 있는 현상으로 봐요.

 

* 이집트에서 돌무화과나무를 강한 신성을 지닌 나무로 대중적인 하토르 여신의 표상이 

  었고, 18왕조와 19왕조 시대에는 하늘의 여신 누트를 상징하는 등, 큰 영향력을 끼지는

  존재였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상징성이 탈색되어 성소나 의례와 연관되지 않았고

  우상 숭배와도 관련이 없는 값싼 '나무'일 뿐이었다

 

혹시 돌무화과나무를 일부로 이집트는 중요한 나무지만 그런 종교적 의미가 없는 거다.

자기네들이 원래부터 알고 있던 참나무와 향엽나무는 중요했지만 이거는 일부러 이집트

를 약간 폄하할려고 이집트의 중요한 상징이니까 그런 게 아니었나라고 하는데 시편

78편에서 혹시 그런 답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그런 희미한 구절이 있는데요.

 

* 시편 78,14: 우박으로 저들의 포도나무를, 서리로 저들의 돌무화과나무를 죽이셨다.

 

이 돌무화과나무를 이집트를 하면은 하느님께서 우박이나 서리로 치셨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요 구절에서 굉장히 희미해요. 이것도 많은 추측과 가설이 필요한 건

대 이러한 추측으로 우리가 볼 수는 있어요.

 

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세 가지 나무를 봤어요. 참나무 봤고, 향엽나무 봤고,

이거는 굉장히 중요한 나무고, 또 이방인들도 중요한 나무였기 때문에 부정적으로도

많이 나오고, 그런데 마지막으로 돌무화과나무는 별 것 아닌 나무, 세 가지 중요한

나무를 봤는데요. 이 나무를 본 이유는 사실은 구약성경에 가장 중요한 나무, 가시나무

를 보기 위해서예요.

 

그런데 가시나무는 이제 저희가 다음 시간에 할텐데요. 가시나무 보기 전에 다음 시간

예고를 잠깐 드리면 다음  시간 은 히브리어 문자에 대해서 그림을 많이 보는 좀 재미있

는 시간을 가질려고 해요. 이 교재에도 없고 제가 대중 강연으로는 처음 하는 강연인데

여러분들한테 아, 히브리  문자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문자인가를 많은 그림을 보면

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가 있을 거예요.

 

이것도 역시 고대 근동와 이스라엘이 중요한 관계에 있고 우리 신자들이 그리스도교

교양으로 좀 알아두는. 사실 한국 신자들이 히브리어, 그리스어 그러면 외국어라고

그러면 아주 그냥 겁부터 내세요. 히브리어는 대단한 전문가들이나 배우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이제 히브리어 전공이기도 해요.

 

그래서 히브리어 성서 언어학적으로 좀 쉽게 설명드릴 수도 있다라는 것을 준비한 강의

니까  다음 시간 여러분들이 기대를 하시고 많이 시청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

면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고맙고요. 저희는 일주일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다음 시간 예고: 제22강 히브리 문자의 탄생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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