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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25회 가시 상징과 하느님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23 조회수1,212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25회 가시 상징과 하느님

 

* 강의록 전체를 볼 수 있는 곳 안내: 성서100주간 http://cafe.daum.net/bible100weeks

* 주원준 박사님 계시곳 안내: http://www.biblicum.or.kr/

 

안녕하세요? 한님성서 연구소 주원준 토마스아퀴나스입니다.

성호경 바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그리고 집에서 TV를 시청하시는 시청자 여러분, 일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자, 평신도 신학자가 설명해 드리는 구약성경과 신들,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강의인데요. 오늘은 가시나무에 대해서 다루는 세 번째 강의이자

전체 26회 강의 중에서 25번째 강의입니다.

 

이제 이 시간하고 나면 1시간만 남습니다. 시간이 참 빨리 갔죠? 저는 언제 이게 다 가나

했는데 벌써 25회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모세의 불붙은 떨기나무를 보았는데 우리

나라 말로 떨기나무지만 이게 사실은 가시덤불이다라고 말씀드렸지요? 관목인데 가시가

있는 관목이었어요.

 

 

 

우리는 이렇게 하느님이 모세한테 처음 나타나실 때 이따 뒤에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

지만 현현했던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떨기나무, 가시덤불이 있는데 이게 불붙은 거 같은

데 타지는 않고,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

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이 현현하실 때 가시가 중요한 요소였구나 하는 걸 알 수 있

는데 고대 근동 문헌을 보니까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이 가시가 정말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이제 우리가 두 시간에 걸쳐 가지고 보았습니다. 마치 현대의 드라마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재미있는 그런 이야기의 구조를 갖고 있는데 그 재미있는

이야기 안에 또 이렇게 굉장히 깊은 심원한 종교적인, 철학적인 내용 또 반성을 담고 있

습니다.

 

훌륭한 작품이 거의 다 그러하고, 인류에 오래 남는 작품이 그러하고 우리 성경도 그러하

지만 읽을 때는 굉장히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뒤돌아서 조금만 생각하면은 아주 인생의 진

리를 또 이렇게 종교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그런 굉장히 훌륭한 이야기는 보았지요.

 

* 길가메쉬 서사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로 수메르 남부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쉬

의 일대기를 노래한 것으로 19세기 서남아시아 지방을 탐사하던 고고학자들이 수메르의

고대 도시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호메로스의 서시시보

다 1500년 가량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지금 들어서도 아, 이게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참으로

좋구나. 이렇게 느낄 수 있으면 고대 이스라엘인들도 아마 그렇게 느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은 천상에서 하느님과 같이 이렇게 붕떠서 살고 있던 분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몸을 가지고, 이렇게 피가 흐르고, 눈을 가지고 보고, 또 일을 해 가지고 먹고 살고, 또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또 이제 부모님을 봉양하고 이렇게 살던 보통 사람들이었거든요.

 

그 사람들도 고대 근동의 많은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아, 이거 훌륭한 이야기다 하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인류는 어디에 살든지, 어떤 인종이든지 나아가 어떻든지 간에

보편적인 인류로 창조되었으니까 비슷한 거를 느꼈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도 있죠.

 

다만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고대 근동인들과 조금 다른 것은 그 사람들이 매우 독특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예요. 인류사에 아주 유일한 유일신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

믿음을 표현하는데 있어 가지고 글과 말로 전했는데 아, 그때 고대 근동의 문화는 마치

거름처럼 작용했던 것이죠. 그 문화 안에서 독특한 하느님 체험이 표현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고대 이스라엘이 나오

기 전에 그 수천 년간 있었던 그 큰 광대한 지역에서의 문화는 단순히 이방인의 문화다

해서 우리가 버릴 게 아니라 어쩌면 이스라엘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미리부터

좀 준비 해 놓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문화 안에서 이스라엘은 마치 거름 위에 핀 꽃

처럼 인류한테 큰 문서가 되어서 하느님의 진리를 전해주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 수 천 년 간 축척된 고대 근동의 문화는 고대 이스라엘 신앙의 밑거름이 되었다

 

자, 이번 시간에는 가시에 대해서 조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가시가 끝나지 않았

어요. 한 시대에 가시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비슷한 이야기가 또 다른 시대에 있었고,

다른 시대 넘어져 오는 데 그중에 하나는 드디어 예수님의 가시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고 합니다. 

 

# 예수님의 가시관

 

드디어 예수님의 가시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수난 사화에서 예수님

께서 로마 병사들이 막 조롱하고, 매질하고, 모욕을 주고  십자가의 길 여정을 여러분 잘

아시죠? 그런 과정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수님한테 가시관을 씌우

고 로마 병사들이 뭐라고 조롱을 했냐 하면, '유다인의 임금님이다' 이렇게 조롱을 했어

요. 예수님은 가시관을 머리에 쓰셨죠? 실제로 그 따가운 가시관을 쓰셨기 때문에 피도

나고 굉장히 아프셨을 거예요. 고통을 받으셨죠.

 

요한복음서를 보면은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빌라도가 '에체 호모', '보라, 이 사람을'

굉장히 유명한 말이죠? 우리 성경에는 "바로 이 사람이오."라고 번역을 했어요. 이 말은

이제 후대에 우리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이 되었는데 어쩌면은 예수님의 신원이 그

대로 잘 드러나는 광경이예요.

 

가시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시고, 모든 사람들 앞에 나타나셔서 빌라도는 " 자,

보시오. 이 사람이오."라고 말했거든요. 예수님의 신원,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우리 인류

를 구원하시는 모습,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으로 잘 드러나는 장면이죠.

요한복음서 19장 5절을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면 이래요.

 

 

 

이 장면, 수난사화 가운에서도 여러 장면들이, 우리 십자가의 길 뭐 모든 처가 중요하지

않은 처가 없지만 특히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시고 사람들한테 나타난 바로 이 장면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한테 굉장히 인상적으로 남았던 게 학실해요. 그래서 복음서에

도 기록됐고, 후대에도 아, 예수님의 그 고난받으신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그분이 과연

왜 이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서 돌아가시면서 왜 우리의 그리스도라고 하실까?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묵상하는 데서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어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오신 분은 황금 관, 다이아몬드 관을 쓰셔도

사실 모자라는 분인데 오히려 그분은 좋은 관을 쓰시고, 좋은 것은 입으시고 많은 사람

들 앞에 나타나시기는 커녕 오히려 가시관,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관을 쓰셨어요.

 

그리고 그 아픈 관을 쓰시면서 과연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게 가장 잘 드러나게 되었어요.

왜 그러셨을까? 왜 고통의 관을 쓰셨을까? 그리스도는 임금이신대. 과연  세속의 임금과

는 다르시구나. 이 시대를 잠깐 살다 간 임금과는 달리 영원한 임금이시구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표현이죠. 그래서 가시관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상징 가운데 하나

가 되었어요.

 

* 예수님의 가시관은 그리스도교 신비를 드러내는 핵심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분이 십자가의 길도 마찬가지고, 개인적인 묵상이나 할 적에 아니면

예술가들이 가시관을 즐겨 사용합니다. 수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고요. 또 십자고

상에 가시관을 쓰시고 매달려 계신 그 예수님 표현을 우리가 쉽게 찾아볼 수가 있는 것

이죠.

 

 

 

 

 

 


이 가시관이 과연 언제부터 이렇게 중요한 상징이 되었을까? 우리 그리스도교에.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자면 길가메쉬 서사시부터 굉장히 중요했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사이에서는 언제부터 그렇게 중요한 상징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바로

신약성서 시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가시관에 대한 이야기가 신약성서 안에 들어

와 있어요. 그거를 우리 히브리서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9을 보면,

 

* 히브 2,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에체 호모', '이분을 봐라' 그랬는데 우리는 가시관을 쓰신 그 가시관이 어떤

가시관이냐 하면 그냥 아픈 관, 보잘 것 없는 관 이런 관이 아니라 '영광과 존귀의 관'이

예요. 예수님의 영광, 예수님의 존귀하심이 바로 그 관에서 잘 드러난다. 아, 그러면 정

말 예수님한테 가시관은 정말 하느님의 신원을 잘 드러내는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 상징

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시관을 생각해 볼 때 하나 여러분이 같이 생각해 봐야 되는 면이 있는 거 같애

서 제가 말씀드리려고 해요. 우선 크고 길게 생각하는 눈을 가지시는 게 좋아요. 구약성

경은 아주 작은 이야기 하나를 아주 미시적으로 들어가서 꼼꼼히 따져서 성찰하는 것도

중요하고, 때로는 굉장히 큰 눈을 가지고 길게 보는 게 중요한 게, 종교는 이렇게 짧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우리가 큰 눈으로 봐야 되는데 세월이 지나면 인간이 했던 어떤 것은 분명히 다음 세대로

넘어 가게 됩니다. 어쩔 수 없어요. 후대 사람들이 넘겨 받게 되요. 인간은 한 세대를 그냥

살다가 갈 뿐이고 우리는 우리 전 세대에서 무엇을 받아서 잘 운영하다가 다음 세대로 그

냥 넘겨 주고 가는 존재예요. 그런데 이게 그래서 어제의 일은 어제에 끝난 일이 아니예요.

보통. 우리가 어제 배운 건 그게 오늘의 일이 되고 나중에 내일의 일이 되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고대 근동의 사람들이 미신적이다. 이 사람들은 과학 기술도 없고 뭐

컴퓨턷 없고 이렇게 비판을 한다면 우리는 천 년 후의 사람들한테 더 비판을 받을 수도 있

어요. 정말 천 년 후의 지금은 엄청 미개해 보이는 사회가 될 거 아니예요? 그래서 가시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길가메시의 처음에 가시 이야기는 모세한데 넘겨져서 우리 구약성경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전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상징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다시 구약성경으로 넘어

와서 구약성경 안에서도 중요한 상징이 되고 다시 신약성경으로 넘어 왔습니다.

 

특히 길가메쉬 서사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가시 볼 때 그랬죠. 길가메쉬 서사시 이야기

의 구조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으니까 지금은 간단하게만 말씀드릴께요.

 

굉장히 훌륭한 영웅 둘이 있었어요. 둘이 처음에 딱 알아보고 그 둘이 처음으로 한 일이

"아, 우리가 힘을 합쳐서 숲속의 괴물을 무찌르자." 그랫는데 이 젊은이들한테 그게 무서

운 일이었어요. 아무리 자기가 힘이 세도 겁나는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길가메쉬가 자기

엔키두 친구한테 그랬죠. "죽음이 두려운가?" 그런데 이 처음 청년일 때는 죽음이 별로

안 두려웠어요. 그게 뭔지 모르고 그냥 지나가 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영웅이 되어서 여인의 질투를 샀어요. 여인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걸 잘 몰

랐죠. 그래서 신의 벌을 받았어요. 자기의 교만 때문에 자기가 힘이 있다고 해서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죠. 그래서 이슈타르가 자기 아버지인 초고의신인 하늘의 신 아누한테

얘기해 가지고 결국 신들이 회의를 해서 길가메쉬를 혼내줘야 되겠다 했는데 혼난 게

자기가 죽은 게 아니라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어요. 정말 둘도 없는 친구가 죽은

거죠.

 

그때 길가메쉬가 깨달은 게 "아, 아무것도 소용없구나!" 이 영화도, 힘도, 이 권력도 다

소용없다. 영생이 무엇이냐? 영원히 사는 게 무엇이냐? 죽음을 내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영생을 찾아서 떠났는데 이야기는 이제 굉장히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다

생략하고 결국은 영생을 찾았어요.

 

그런데 그 영생이 우리가 사는, 우리가 보통 생각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이예요. 영생은

그냥 영원히 식물인간처럼 그냥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영원한 젊음'이었어요. 그래서

그 영생의 핵심은 가시나무였어요. 그 가시나무의 이름은 '늙은이가 젊은이가 되다'

그게 바로 영생의 핵심이죠.

 

그랬는데 잠깐 잠든 사이에 그 가시나무가 없어졌어요. 뱀이 물고 지나갔어요. 길가메쉬

는 가시나무를 보자마자 꽉 움켜 쥐었어요. 쓰라리고 힘들어도, 피가 나도. 진리는 그런

거예요. 그래서 꽉 움켜 주었고 그리고 길가메쉬는 "야, 인제 내가 영생의 식물을 얻었으

니까 이거 같고 큰 돈 벌어야 되겠다."가 아니라 이거를 맘 껏 나눠줘야 되겠다. 내 고향

에 가서 우리 고향의 노인들한테 먹이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알 수 있었죠. 진리를 원하는 자는 어떤 고통이 있어도 진리를

무릅쓴다. 내가 만약에 이게 정말 좋은 데, 내가 "아, 이거 하면 아플 거 같애." 하며 뒤로

움찔 물러서면 그거는 영원한 진리를 찾는 참된 구도자의 자세가 아닌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진리를 얻은 사람은 그 진리를 통해서 자기가 사욕을 채우기 보다는

만인한테 공평하게 나눠주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마치 예수님이 훌륭한 가르침을 그냥

공짜로 주셨잖아요. 예수님이 돈 받고 팔지 않았잖아요. 그거하고 비슷한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사이비를 구별할 때 돈을 받고, 돈을 바쳐야지만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영원한 진리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고, 누구나 함께 와서, 나한테 와서 먹고 마셔라.

아무 값도 없다. 이렇게 하면은 "아, 그거는 조금 진리에 가까운 거다."라고 볼 수 있다고

그랬죠. 그런데 이제 여러분한테 말씀드릴 건 가시를 움켜 잡았는데 가시는 없어졌어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길가메쉬 이야기에서, 거기서 길가메쉬한테 남은 건 가시에

찔린 흉터밖에 없어요. 뭔가 깨달았어요. 아, 뭔가 하느님을 조금 체험했어요. 우리가 성

경을 보면서 뭔가 조금 깨달을 때가 있어요. 보통 사람들도. "아, 이런 건 이런 거구나!

아, 하느님이 이래서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예수님이 그래서 한 데나리온의 비유를 하셨

구나. 예수님이 그래서 이런 비유를 드셨구나." 하는 걸 조금 우리가 깨달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잠든 사이에 다 잊어버리는 거 같애요. 길가메쉬는 살짝 잠든 사이에 없어져 버렸

어요. 그런데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어요. 내가 깨달은 그 기억이 내 몸 어딘가에 있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 생각나기도 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늘 옅어져요.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는 잊어먹기도 해요. 왜 그럴까?

 

아마 길가메쉬 서사시는 이것도 아마 진리의 한 측면이라고 얘기하는 거 같애요. 마치

돈오돈수(頓悟頓修, '한 번 깨닫고 나면 더 이상 수행을 닦을 것이 없다.'는 것으로 만약

다시 더 닦아야 한다면 아직 덜 깨달은 것임을 의미한다. 무술로 치자면 단번에 9단의

경지가 될 때까지 계속 수행을 닦아야 함을 뜻한다.), 돈오점수[ 頓悟漸修 ]  같이.

내가 깨닫고 나서 또 수련을 해야 되는 것인지, 한번 깨달으면 끝인지 뭐 이런 거 같지요.

 

만약에 길가메쉬가 내가 지금 흉터가 나서, 가시를 움켜 잡아서 ... 만약에 길가메쉬가

"내가 지금 흉터가 나서, 이 가시를 움켜 잡어서 여기를 봐라." 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다행인데 ?이게 다 아물면 증명할 길이 없어요. 내가 그걸 만졌다고.

 

오직 길가메쉬의 말과 행동, 그 사람의 실천으로 보여줄 수 밖에 없을 거예요. 자기가

진리를 체험했다는 걸. 그래서 맨 마지막의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게 가다가 거기서

허무하게 끝난다고 그랬죠.

 

구약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이라면 하느님 빼 놓고 모세인데 그럼 구약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이라면 창조 빼 놓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건

인데, 모세가 직접 나타나실 때 이 가시떨기, 가시덤불 안에서 나타나셨어요.

 

 

 

아마 모세도 거기서 두려워하였겠지요? 그러고 나서 하느님을 모세도 두려워하잖아요.

내가 가서 당신이 말한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내보내라." 하고 이집트

파라오한테 얘기하면 누가 나를 믿어주겠느냐? 내가 하느님을 만났다고. 그럴 수밖에

없어요. 모세는 이제 그거를 해야 되는 거예요. 비슷한 체험이예요. 어떻게 보면은.

가시라는 상징을 통해서 뭔가 비슷한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시대가 되었어요. 예수님의 시대가 되어서 누구나 다 가시 이야기,

가시덤불 이야기 그러면 탈출기 3장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실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 전에

그분의 신원이 다 드러났을 때 그분의 머리에 가시관이 있었어요.

 

 

 

이게 우연일까? 우연이 아닐 거예요. 신약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이거를 굉장히 인상 깊

게 생각을 했고, 복음서에 기록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복음서의 가시 상징을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찾을 수 있는 거였죠.

 

 

 

신약시대에 유다인들이 탈출기 3장의 그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 불붙은 가시덤불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이것이 성경 밖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어요. 성경

밖의 예수님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유다인 학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필론이예요.

이 필론, 이 사람은 대단한 학자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책을 많이 남겼는데, 그 책들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 필론 책을 보면은

아,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어요. 필론 자신도 구약

성경 이야기를 굉장히 잘 알고 있었어요.

 

* 필론: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다 학자로 훌륭한 성경 주석가이자 철학자요

  관상적인 그리스 철학과 유다인의 유일신 신앙의 융합을 추구했으며 신약성경 해석

  에 탁월한 판단 기준을 제공한 학자로 평가 받는다

 

필론은 성경 주석가였고, 철학자였고, 또 관상적인 시비가였어요. 그리고 굉장히 뛰어난

작품집을 남겨서 우리 신약성경 해석에 탁월한 판단 기준을 남긴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

가 남긴 책 중에서 [모세의 생애]라는 책이 있어요. 두 권으로 된 건대. Vita Mosis.

 

거기에서 필론이 재미있게도 우리가 지금 봤던 가시나무 대목, 탈출기 3장 대목을 얘기

해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여러분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가시를 그리스 말로 '바토스'

라고 한다고 그랬지요? '바토스 대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

 

제가 다른 설명을 생략하고 '모세의 생애'라는 작품을 여러분들이 보시면 좋겠지만 우리

말로 아직 번역이 다 안 돼 있어서 교재 192쪽 보겠습니다. 그 모세의 생애, 그 보세의

생애라는 작품은 모세가 어떤 사람인지를 필론이 다시 한번 쓴 거예요. 구약성경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에 불붙은 떨기나무 대목을 말할 때 필론이 요런 말을 덧붙였어요.

 

 

 

"거기에는 바토스가 있었는데, 매우 가시가 많고 가장 약한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떨기나무는 그냥 회양목 같은 관목이 아니라, 가시가 있는 가시덤불 같은 뜻

이예요. 가시가 있었다는 말이예요. 그리고 이렇게 얘기 했어요.

 

" 그 바토스는, 앞서 말했듯, 가장 연약한 종류의 것이었으며 분명히 가시가 존재했기에

손에 닿으면 사람을 찌릅니다." 하느님께서 나타났던 그 떨기나무는 분명히 가시가 ?있는

것인데 그 가시가 큰 거는 아니고 관목이니까, 이제 작은 가시가 있었던 거 같애요. 그래

서 분명히 사람을 찌른다는 것이죠.

 

필론은 저희 한님성서 연구소에서 송혜경 박사가 [필로의 생애]로 나온 ?단행본이 있는데

관심 있는 분들은 그 책을 보시면 좋을 거 같애요.

 

자, 필론은 이제 아, 모세의 생애에 대해서 우리 유다인들아, 그리스도인 말고 우리 유다

인들아, 우리 조상 모세에 대해서 이런 거를 좀 알아야 되겠다 해 가지고 불타는 가시덤불

에 대해서 굉장히 길게 기록을 해요. 거기에서 하느님께서 어떤 뜻으로 말씀하셨고 이런.

 

나중에 우리도 한번쯤 읽어보시면,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신앙에

유익한 책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가 모세의 그 탈출기 3장 이야기를 하면서 주로

어디에서 머무냐 하면은, 가시하고 불에 머물러요.

 

왜 하필이면 가시인가? 왜 우리를 찌르시는가? 이 말씀을. 이거하고. 왜 하필이면 불인가?

왜 우리를 활활 태우시는가? 그래서 가시하고 불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한테 설명을

해요. 왜 기시, 불에서 나타나셨는가? 자세한 설명은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생략하겠어요.

 

저는 필론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아, 필론도 역시 고대 근동 사람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

요.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필론은 분명히 길가메쉬

서사시를 몰랐어요. 왜냐하면 길가메쉬 서사시는 저 땅 밑에 묻혀 있다가 18세기가 되서

야 새로 발굴해서 새로 우리가 해독한 텍스트예요. 그전에는 그냥 나라가 망하고 바빌론

제궁이 망하고 나서 페르시아가 다 묻어버려 가지고 그런 문서가 있는 것도 몰랐어요.

사람들이 잊어먹은 거예요.

 

길가메쉬 서사시를 하나도 몰랐는데 필론은 가시에 대해 가지고 아, 정말 진리는 우리를

찌른다. 아프게.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아, 그래서 역시 이 사람도 길가메쉬 서사시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근동의 종교심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고대 근동인이어구나.

만약에 한국 사람이라면 우리가 한국 문화를 대학에서, 고등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아도

한국 문화를 잘 알게 돼요. 익숙해지죠.

 

김치도 알고, 밥도 알고,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이 어땠는지 잘 알죠. 한국 문화만 익숙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 동아시아, 중국 문화 전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죠.

그런 걸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요. 필론도 아마 그랬던 거 같애요. 그래서 가시라는 상

징에 오래 머물렀다는 거죠.

 

한편, 이 이야기는 필론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 초대 교회 교부들한테도 넘어가요. 2세기

교부 중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라는 교부가 계세요. 이 교부의 작품은 안타깝게도

많이 남아 잇지는 않은데 그 중에서 [교사이신 그리스도]라는 문헌에서 제가 이 불타는

떨기나무 대목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재미있게도 클레멘스는 필론을 알고 있었던 거 같

애요.

 

필론이 모세의 생애를 적어 놔서 아, 이 탈출기 3장에서 하느님이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필론이 유다교적으로, 유다인들한테 얘기했냐

하면은 클레멘스는 아, 이 성찰이 참 좋다. 그런데 이거는 너무 유다교적이니까 우리 예

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적으로 이거를 한 단계 엎그레이드 해서 내가 좀 사람

들한테 설명을 해야 되겠다 해서 쓴 거 같애요.

 

클레멘스는 자기 책에서 그런 말 한 번도 안 썼는데 학자들이 그 책을 보니까 아, 클레멘

스는 필론을 알았을 거다. 필론이 유명한 거 같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클레멘스는

필론도 마찬가지고 구약성경에 굉장히 정통했던 인물이예요. 그리고 물론 신약성경에도

클레멘스는 정통했죠.

 

그래서 그가 구약의 하느님이 가시덤불에서 나타나셨고, 거기서 진면목을 처음으로 보여

주셨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쓰시고 당신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 보

여 주었다면 그러면 하느님은 곧 그리스도 아니신가? 이러면서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되

기도 전에 아, 이 두분이 어쩌면 같은 분이다라고 하는 얘기를 '가시' 상징을 통해서 내

놔요. 그러니까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되는데 있었서도 큰 역활을 하는 셈이 되는 거예요.

 

* 구약과 신약에 능통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그리스도를 '가시'라는 상징을 통해 성찰하며, 2세기 경에 이미 삼위일체의 신비까지

  접근하는 놀라운 성찰을 보였다?

 

제가 클레멘스의 택을 직접 번역을 했는데 교재 193쪽 한번 읽어보세요. 클레멘스는

이렇게 적어요.

 

 

 

"이제 덤불은 가시로 가득찼습니다." 불빛이 아니라 가시로 가득찼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늘에 있다가 말씀으로, 요한복음서 1장에서 내려오셨잖아요?"

다시 돌아가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말씀이 사람들 사이에 계실 때 즉, 우리 사이에

육으로서, 하느님으로서 존재하실 때 신비힌 상징으로 가시관을 쓰셨다는 거예요.

 

최초로 나타나실 때엥도 가시덤불, 그리고 우리 안에 신비한 상징으로서 가시관, 그러

면서 이렇게 이야기 해요.

 

* 그분은 맨 처음 가시덤불에 나나타셨으며, 훗날 가시로 둘러싸이게 되신 것입니다.

  이로써 이 모든 일이 하나의 동일한 권능께서 하신 일이란 점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는 한 분이고, 영원한 시작이요 끝이십니다.

                   ㅡ '교사이신 그리스도' 중에서 ㅡ

 

클레멘스는 최초에 나타나셨을 때 가시덤불이니, 그분이 그리스도를 보여주셨을 때

또한 가시관이다. 그러니까 한 분이 두 번 시대가 다르게 똑같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니 이 두 분은 한 분이시다 하는 건대 이걸 쓸 때는 우리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기 전이예요. 이게 대단한 상징이죠. '가시'라는 상징이. 굉장히 훌륭한 작품

이죠.

 

교부들은 이렇게 교부들의 작품은 우리한테 굉장히 큰 가르침을 줄 때가 많아요.

클레멘스는 가시라는 단 하나의 상징을 성찰해서 성서적 상징의 핵심을 완전히 요약해

버렸어요. 모세에게 가시덤불로 현현하신 그분께서는 가시관을 쓰심으로써 그분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죠.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가시'라는 단 하나의 상징을 성찰해 가시덤불에 싸인

  '성부'와 가시관을 쓰시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보여주신 '성자'는 한분이라

  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가시는 최고의 상징, 최고의 체험의 상징에서 이제 유일신의 상징으로 우리 그리스도교

에서는 다시 한번 탈신화해서 재신화 된 것이죠. 만약에 여러분이 탈출기 3장에 있는

가시덤불을 인식하지 못하고, 교양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거는 가시나무가 아니야.

그러면 가시관에 계신 예수님 하고 다른 존재로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중요한

상징 하나를 놓치게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게 인제 초대 교부시대 클레멘스, 거의 2세기 정도 되는데 거깃에서 끝나

는 게 아니라 더욱 나가요. 중세를 거치면서 가시라는 상징이 유럽 그리스도 교회에서

계속 살아 남아요.

 

여러분한테 그림을 하나 보여드리려고 하는데요. 구텐베르크 성겨이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본 성경인데요. 여러분 아실 거예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어 가지

고,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보다 조금 더 빠르지요. 직지심경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나

라 금속활자는 잘 이어지지 못했는데 구텐베르크는 계속 이어져서 유럽 인쇄술의 혁명을

이끌었어요. 앞에 그림을 봐 주세요.

 

 

 

이 구텐베르크 성경에 보면, 옛날 성경은 지금 성경과는 달리 그냥 글자만 있는 게 아니

라 활자를 이렇게 찍어 놓고 옆에 이렇게 장식을 둘렀어요. 그런데 이 장식은 찍은 게 아

니라 손으로 화공들이 그린 거예요. 그러니까 굉장히 화려한 그림들을 그리게 되는데 이

렇게 금박도 입히고, 은박도 입히고 아주 좋은 물감을 써서 몇 백 년 가도 읽을 수 있도록

 

이런 책은 집에서 혼자 읽는 책이 아니라 전례 때 뭐 사제나 아니면 주교님이나 추기경님

이나 이런 큰 분들이 큰 전례 때 들고 나가서 읽어야 되는 책이니까  이렇게 훌륭하게 했

던 거고, 하나의 값은 당대에도 굉장히 비쌌지만 지금은 또 어마어마하게 더 바싸죠. 이

건 말도 안 되는 가격일 거예요.

 

 

 

 

 

한번 쭉 보시면 성경 둘레에다가 이렇게 예쁜 장식을 했어요. 한장 한장 다 그린 거죠.

예, 훌륭한 작품들이예요. 그런데 여기에 이제 여러가지 모티브를 써요.

 

 

 

옆에다가 이것 저것 화려하게 넣기도 하고, 이렇게 이런 장식도 넣고 하는데 여기에 많이

쓰인 장식 중에 하나가 '가시 상징'이예요. 최초에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가시덤불에 나

타나셨고, 예수님 수난하실 때 가시관을 쓰신 것이니까 그분의 말씀을 가시로 모시는 것

은 ?당연한 거죠. 그래서 보시면,

 

 

 

 

 

이렇게 가시 같은 게 있죠? 이런 것들을 계속 써요. 보면은 이런 거 볼 때마다 가시가

시 쓰였는지 보는 것도 포인트 중에 하나가 되요. 이런 것도 가시예요. 뽀족 뾰족하게.

찔리는 거죠. 덩쿨에. 이렇게 뾰족뾰족하게 찔리게. 하느님의 말씀을 보고 찔려라.

마음을 콕 찌르게. 하느님이 나한테 오래 머무실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얘기를 하는

같죠?

 

왜 하느님의 말씀, 성경을 우리가 장식하는데 다른 모티브와 함께 하필이면 가시를 썼겠

는가? 가시덤불로 현현하신 하느님이요, 가시관을 쓰신 그리스도이니 거룩한 말씀을 가

시 안에 모시는 것이 어쩌면 온당하지요.

 

그래서 13세기까지는 특히 성경의 테두리 장식 또는 성화를 그릴 때 아브라함 이야기나

 이사악 이야기를 할 때 성화 테두리에 자세히 보시면 가시 덩쿨이나 가시 이야기를 자주

썼다고 해요. 후대의 교회사에서도 가시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으니까. 이제 우리 그리스

도인의 마음이 머무는 자리가 되는 것이죠. 가시는.

 

* 13세기까지 성경의 테두리 장식이나 성화의 테두리 등에 즐겨 사용되던 가시 장식은

   후대 교회의 역사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심이 머무는 '구세사의 가시나무' 역활 

   했다.

 

이것도 굉장히 재미있는데 우리가 구약성경을 볼 때마다 그랬죠. 하느님은 굉장히 크고

훌륭한 나라, 페르시아 제국이나 아시리아 제국 이런 걸 선태하셔서 일을 하시면 좋았는

데 굉장히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마리아를 선택하실 때도 마찬

가지죠. 뭐 훌륭한 귀족 가문에서 돈도 많고 땅도 많고, 집도 많고 하는 가정이 아니라,

저 시골 팔레스티나 촌 구석에 있는.

 

그래서 약한 것을 선택하셔서 큰 일을 이루시는 그분의 신비를 우리가 볼 수 있는데,

핵심 상징으로 하필이면 예쁜 꽃도 많고, 맛있는 풀도 많고, 큰 나무도 많은데 하필이면

또 가시를 또 이렇게 해 주시는 것도 어쩌면 일관된 하나의 하느님의 신비 같애요.

 

여러분이 가시를 묵상하실 때 이런 점도 함께 묵상하시면 개인 신심에도 도움이 될 거

같애요. 그래서 어쩌면 제가 이 책에도 썼지만 '구세사의 가시나무'라고도 할 수도 있어

요. 그래서 이런 가시 상징이 이제 지금부터 드는 예는 별로 좋은 예는 아닌데 아직도

영화 같은 데 쓰여요.

 

여러분이 이제 바티칸을 좀 이상하게 묘사하는 영화 많죠. 뭐 음모가 있다느니 이런 식

로. 별로 안 좋은 예인데, 그런데 보면은 가시를 이렇게 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몸 속에. 다빈치코드 이런 영화에 나와요. 그런데  그런 상징도 역시 이런 전통을 사실은

있는 것이긴 해요. 현대에서는 뭐 많이 없었죠.

 

그래서 다빈치코드 나오는 거 보고 제가 여러분한테 한 마디 드리고 싶은 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고 하면서 중세에 그런 식의 ?고행을 하는 전통이 있기는 있었어요. 몸에

아픈 걸 하나 꾹 찌르고 늘 아픔을 느끼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한다 하는 게 있었는

데 이제 현대에 오면서 그런 신심은 많이 없어졌어요.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의미는 그렇게 되면, 내 몸을 학대하면서 동참

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길이 아닌 거 같고, 많은 사람한테 권장할 길도 아닌 거 같애요.

우리의 몸은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어서 우리가 그것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나

의 몸 뿐만이 아니고 타인의 몸도 잘 지켜주면서 그렇게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일

을 우리가 건강하게 하는 데 써야 되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바뀌었고.

 

주님 수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산상수훈에 많이 나와 있을 거예요. 산상 수훈의

첫 번째 마태오 복음서 보면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고 "하늘 나라가 그

들의 것이다."라고 해 놓고. 진복팔단이죠. 그리고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뭐 이렇게

쭉 해서 각자 위로를 받고, 땅을 차지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맨 마지막에

뭐라고 나왔냐 하면,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다시 한번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처음에 했던 게 한번 더 나와요.

 

그리고 또 무엇이 나오냐 하면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들을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

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라고 한번 더 하죠. 그리스도

의 일을 하다가 마치 내가 가시를 잡는 것처럼 박해를 당하면 고난을 받는 것이고, 우리

가 거기에서 같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건대, 굉장히 멀쩡한대 내 몸을 학대하고

가시로 찌르고 가시가 중요한 상징이라고 해서 중에의 우리가 그런 걸로 돌아가서는 안

될 거 같애요. 그점은 노파심에서 말씀드렸어요.

 

자, 그러면 우리가 25회 이번 강의를 슬슬 마무리 하면서 여러분한테 하나, 저번에 말씀

드린 얘기힌데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의미에서 해 보겠습니다. 전에 해 드린 이야기를

두 세 가지 끄집에 내면서 이제 마무리 하려고 해요.

 

우선 구약성경에 대해서예요. 구약성경은 저번 시간에 우리가 ET라는 영화를 보면 굉장

히 유행하고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홀딱 빠져들었는데, 사실은 그 이야기의 구조가 신약

성경하고 굉장히 비슷했어요. 그쵸? 하늘에서 굉장히 착한 외계인 하나가, 생긴 것은 우

리하고 다르고 사람들의 오해를 받았지만 마음은 참 순수한 분이 내려왔는데 사람들이

다 오해를 했어요. 그 외계인한테.

 

단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몇 몇만 알아봤어요. 그런데 권력을 가진 사람, 힘이 있는 사람

은 더 오해를 해서 더 박해를 할려고 그랬죠. 그러다가 온갖 수난과 모험을 겪고 이러다가

결국 죽었어요. 굉장히 슬펐어요. 그런데 부활했어요. 부활해서 자기를 알아본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아, 이게 해로운 존재가 아니었고 참 좋은 존재였구나라는

걸 알려주고 다시 하늘 나라로 가버렸어요. 신약성경의 예수님 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죠.

 

그런데 ET가 이렇게 사람들한테 큰 히트를 칠 수 있었던 건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구조

와 같이 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익숙해져서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 아줌마들

이 좋아하시는 드라마도 보면은 어떤 이야기는 빨간 머리 앤하고 비슷하고, 어떤 이야기

는 콩쥐 팥쥐하고 비슷하고, 어떤 거는 장화 홍련전하고 좀 비슷하고 그러지요.

 

왜냐하면 인류가 만든 이야기들은 그렇게 구조적으로 유형별로 나눠보면 몇 개 안 되요.

어떤 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생각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길가메쉬 서사

시도 마찬가지요.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게 어디 드라마 같기도 하고 이렇단 말이예요.

 

이런 이야기가 참 이해하기 쉽고, 파급력이 높고, 우리 속에 이미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이

야기 그조로 자리잡아 있기 때문에 딱 보면은 내가 그 이야기의 의미를 ?누가 설명해 주지

안항도 잘 알 거 같애요. 인문학과 예술을 이해하는 데는 이런 구조가 중요해요. 그리고

이런 구조를 잘 알고 있으면 우리가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고 우리가 수준 높은 문화생

활을 영유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책?이 어디 있냐 하면은 성경이예요.

특히 구약성경의 많은 이야기들, 엘리야 이야기가 됐든, 또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됐든,

구약성경은 그 안에 조금 조그만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 이야기들을 어렸을

때부터 잘 읽고 익숙해지면 어디 가서 말도 잘하게 되고, 만약에 작가가 되고 한다면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가 있겠죠.

 

우리나라가 지금 싸이도 엄청 잘 나가고, 한국 영화도 잘 나가는데 컨텐츠 산업이라든지

더 이렇게 깊이 갈려면 괜히 돈만 쏟아 붓는 게 아니라, 학생들한테 어렸을 때부터 성경

이라든지, 클래식을 어렸을 때부터 읽히는 게 더 좋아요. 그 이야기에 익숙해지면은 나중

에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지 말라고 그래도 자연스럽게 쓸 수가 있을 거예요.

 

그래서 고전의 으뜸은 성경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가시나무 이야기도 그렇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이 가시 이야기도 누군가 잘 써서 또 쓴다면은 또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 탄생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다시 우리는 또 성경과 함께 살아가는 민족이 될 수도 있을 거

예요. 그래서 성경 이야기는 재미없는 이야기도 아니고, 쓸데없는 이야기도 아니고 그 이

야기를 알고 있으면 지금 우리한테는 굉장히 의미있 는 이야기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계속해서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지만 선교 300년은 어떻게 보면은

좀 애매한 시간이예요. 전체 인류사적으로 보면은 별로 오래된 시간이 아니예요. 다른 나

라는 2000년도 되고, 1500년도 되고 하지만 또 짧은 것도 아니예요. 인간의 인생을 생각

해 보면 선교 250년 넘어 300년 된다는 건 어느 정도 그래도 돼 있는 거고, 500만 신자는

그래도 굉장히 많은 신자예요. 적은 숫자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럴 때일수록 더욱 그리스도교 교양을 늘려서, 공부도 같이 하면서 우리

문화와 그리스도교 우리 원래 담고 있던 예수님이 전해 주신 진리와 같이 이렇게 좀 뭉뚱

그려지는 융합이 일어나서 더 훌륭한 문화를 창달할 수 있게 끔. 이게 우리 그리스도교가

이제 우리나라에 제대로 공헌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있는 거죠.

 

끝으로 남은 시간 동안 또 하나를 말씀드리고 싶은 건, 구약성경은 단일한 책이 아니예요.

여러분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는 이 구약성경과 신들, 이 책에서 여러 걸 보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뽑아 왔어요. 제가. 성경을 통으로 읽는 것도 굉장히 좋지만 이렇게 연관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뽑아서 읽으면 ?조금 더 공부하기는 쉽죠. 성경을 통으로 베끼거나 읽으

면 약간 지루한 때가 나오잖아요.

 

성경은 그런데 단 한권의 책이 아니라 마치 도서관 같은 책이예요. 예를 들어서 창세기

하나를 보면은 창세기에 세상 창조 이야기도 있고, 노아의 이야기도 있고, 아브라함 이

야기도 있고, 뭐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 한 권 한 권이 사실은 책과

같애요. 창세기가 이미 책 모음집 성격을 갖고 있어요.

 

* 오랜 세월에 걸쳐서 축척된 다양한 체험을 담고 있는 구약성경은 단일한 책이면서

  동시에 복합성을 지나 도서관 같은 책이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성찰과 이런 게 축척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책이죠. 모세 오경만 해도 이미 하나의 도서관이예요. 그런데 성경 전체를 봐요.

시도 있지요, 시편인. 아가 같은 재미있는 노래도 있지요. 그 다음에 예언서는 시도 있고

산문도 있고, 어떤 거는 시인지 산문인지 헷갈리는 애매한 것도 있어요.

 

이렇게 훌륭한 도서관 같은 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치 제 책 이거 하나는 제가 혼자

쓴 책이니까 제가 "이게 무슨 뜻이다." 이렇게 설명해 줄 수 있지만, 구약성경은 안 그래요.

하느님 외의 어떤 사람도 이 책은 이런 거야라고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든지 아니

중에서 어떤 한 대목만 깊이 알 수 있다든지, 아니면 여러 대목을 모아서 알 수 있다든

아마 그럴 거예요.

 

신약성경은 조금 달라요. 신약성경에서 복음서는 그대로 옛님의 이야기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 이야기로만 되어 있지만 구약성경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특강

에서 말씀드렸지만 독일에서 굉장히 최고의 구약성경 학자라고 할 수 있는 에리히 쳉어

신부님이 '구약성경 개론',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그 책 첫머리에 그러거든요.

"구약성경은 단일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마치 도서관 같은 책이다."

 

우리는 ?도서관에 들어가서 자기가 만약에 찾아보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 찾아요?

아, 내가 이렇게 찾아가지고 나는 과학 서적이 필요하니까 과학 서적이 있는 코너에 가가

지고 책을 찾듯이 구약성경 안에서 아,내가 뭐가 필요하다 그러면 내가 찾아서 읽는 책

이어야 된다는 거죠. 구약성경을 딱 펼치고 보면 그 안이 마치 도서관 같다는 거예요.

그런 느낌을 가지고 구약성경을 대하시는 게 좋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도서관 안에서 내가 원하는 자료를 찾아서 책을 읽으면 다행이예요. 만약에

읽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되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여러분 도서관 가서 어떤 책을 찾

고 싶어요. 내가 마음이 허텃하고, 아니며은 뭐가 지혜가 필요해서 지혜문학 어디 가가

지고 책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혜문학이 어딘가 막 다녀봤는데 시간이 없어요. 이

도서관 문 닫는다고 그래요. 내가 빨리 나와야 되요. 나왔어요. 못 찾았어요. 그러면 어

떻게 해야 되요?

 

"구약성경과 신들을 본다." 정답이예요.^^*~~~ 그렇지만 더 좋은 대답은, 더 정답은

도서관에 다시 가는 거예요. 그쵸? 그러면 내가 처음에 가가 지고는 바뻐서 눈에 못보고

못 찾았던 책이 나올 수도 있고요. 아니면 있었던 책을 내가 다시 한번 보고 이 책이구나

할 수도 있어요. 구약성경이 그래요.

 

한번 보고 "아, 이거 내가 알던 책이 아니야. 나 요기서 찾던 게 없어." 이렇게 하면은,

냥 덮고 "나 이제 성경 안 읽어. 재미 없어." 이렇게 하지 마시고 다시 보셔요. 그러

또 다른게 나와요. 도서관 안에서는요. 요즘 도서관들은 가면 그 안에서 커피도 마시고,

사람도 만나고, 잡지도 읽을 수 있고, 잠시 이렇게 졸아도 아무 말도 안 해요. 누가.

구약성경은 ?그런 책이예요.

 

그러고 나서 제가 그런 말씀도 드렸죠. 구약성경이 왜 그렇게 훌륭하고 유명한 책이냐

하면, 빡빡하지 않아서 그래요. 행간이 많아요. 그 사이에. 예수님이 나셨던,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모든 가르침과 제자들의 반응과 그런 걸 다 적었으면 신약성경은 열 권, 백

권이 될 거예요.

 

* 성경에는 '행간'이 많아서 우리가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해 더 큰 하느님을 만나도록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 모든 걸 다 적잖아요? 지금 우리가 뭐 이렇게 신문에 나오듯이. 뭐 모세

한 사람 인터뷰만 따도, 인터뷰 하나만 해도 책 한 권이 될 거예요. 모세의 생애를 그렇게

쓰면 구약성경은 수천 권 책이 나와야 되요. 그런데 다 빼버리고, 쓸데 없는 거 다 떨어

뜨려 버리고 고렇게 단촐한 책 하나로 만들었어요.

 

정말 이거는 엑기스 중에 엑기스의 책이예요. 그 안에서 여러분들이 들어가서 뛰어놀

공간이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그 뛰어놀 공간의 힘은 뭐냐 하면 여러분의 상상력이예요.

구약성경은 답답하게 옛날 경전이라서 이건 이렇게 해야 돼! 하면서 나를 답답하게 묶어

두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이예요.

 

내가 상상력ㅇ르 가지고 구약성경 안에서 아, 왜 아브라함이 또 이런 말을 하시지?

모세가 왜 또 이렇게 했지? 왜 파라오는 이때 이런 말을 했지? 이런 걸 다 상상하면서

읽으면 오히려 그 안에서 궁금증이 일게 되고 또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사람들과 나누고

토론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가진 궁금증이 있고, 다른 상상력이 있고,

 

물론 이런 걸 하면서 이제 잘못하면 이상한 길로 빠지니까 교회 신부님이라든지, 교회

가르침을 적절하게 같이 ?보면서 해야 되요. 그렇게 한다면 성경은 굉장히 좋은 책이예요.

 

이냐시오 성인이 이걸 아주 잘 말씀하셨어요. 여러분도 영신수련 하셨으면, 뭐 수도회

서도 많이 하고 하니까 기회 되면 한번 해 보세요. 거기서도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쓰라고

하세요. 예수님의 장면 하나에서 예수님이 왜 이 말을 하셨을까? 하고 보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성경은 정말 빈틈을 우리한테 열어줘요.

 

얼마나 훌륭한 도서관이냐 하면 들어갔을 때는 내가 책 하나만 찾아야지 하고 들어 갔는

데 도서관 안이 너무너무 재미 있어서 이 책도 읽고, 저 책도 읽고, 중간에 잠시 놀러 가

기도 하고, 커피도 한잔 마시고, 그리고 나중에 나오면은 해가 떨어져 있거든요. 시간이

몇 년이 흘러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어찌 보면은 신앙생활도 우리가 행복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인간의 상상력은 인간의 모든 능력이 그렇듯이 잘못 쓰면 무기가 되는데 하느님이 우리

한테 원래 원하신 대로 좋은 방향으로 쓰면은 굉장히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성경을 읽을 때도 여러분 스스로를 억누리게 하지 마시고, 다양한 상상력을

가지면서, 그리고 이렇게 지금 강의해 드린 가시라는 상징 같은 것도 교양으로 배우 두시

면 그 상상력이 더욱 더 올바르게, 그리고 더 자극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더 많은 것을

여러분이 스스로 깨달으실 수가 있겠죠. 그러한 의미에서 제가 이 강의를 준비했었고,

지금까지 25회 강의를 다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26회 강의는 일주일 후에 이 강의를 총정리 하면서 몇 가지 이야기들을 여러분들

한테 말씀드릴 거예요. 지금까지 잘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다음 강의 예고: 고대 근동 신화와 이스라엘이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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