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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제3강 우리 모두는 완전한 인간 -사고의 전환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31 조회수1,034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유시찬 신부님의 성이냐시오의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3강 우리 모두는 완전한 인간 - 사고의 전환


 

1.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2. '완전'에 대한 개념 전환 : 역설적 사고에로 초대
    - 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언명들은 전형적인 역설들이다
    - 이원대립론적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나눈 가운데 반쪽만의 극대화가 완전 아니다
    - 완전이란 성장 개념과 직결 : 때문에 상반되는 두 존재가 모두 있어야
    - A형 논리에 너무 익숙할 것 아니다 : 거짓말장이 역설
    - 부분과 전체의 문제

 

3.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인가? : 양명학적 사고의 도입
    - 왕양명의 용장오도 체험(1508년, 37 세 때)
    - 개체적 내지 형체적 자아 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
    - 단순한 의식주체가 '나'가 아니라, 천리인 양지가 나임을 앎. 하나의 존재원리.

       만유가 하나
    - 모든 존재자들은 생의(生意) 를 갖고 있다
    - 나(주관) 와 혼융되지 않은 객관적 사물은 없다
    - 양지를 갖춘, 성인이 될 자질을 갖춘 존재로서의 인간
    - 양지가 시비선악(知)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호선오악(行)하는 의지활동도 겸하고 있다.

      성령의 활동과 닮았다
    - 주자학적 관점(격물치지) 과 양명학적 관점(치지격물, 치양지 )의 차이 

 

오늘 이야기 ...

 

우리 모두는 스스로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가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은 완전한 인간임에 대한 깊은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점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원대립론적인 사고를 벗어나서 역설적

인 논리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어서 왕양명 선생의 양명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완전한 존재인지 깊이 알아들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으

면 합니다.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오늘도 이렇게 건강하게 함께 자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모쪼록 저희들 이 시간을 통해서 저희들 자신이 얼마만큼 완전하고 아름다운 존

재인지 깊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죄스럽고 흠집 투성이인 것이 아니고  당신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고, 완전하고, 좋은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는 가운

데 저희들 삶에 있어서도 큰 힘과 용기를 길어올리며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저희들이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좀더 바르게 다듬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 시각의 교정을 통해서 저희들의 완전한 모습을 깊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은

총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나는 완전한 존재인가?

 

여러분들 혹시 자기 자신이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대게 누구든지 우리는

죄 많은 존재이고, 불완전한 존재이고, 약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다. 특히 창조주이신 하

느님에 비교해서 피조물인 인간은 대단히 불완전하고 흠집 투성이인 존재가 아닌가? 죄 투

성이인 존재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다 싶죠. 이점에 대해서 우리

좀 정말 그런가? 내라는 존재가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인가? 어떤 점에서는.

 

이 점을 좀 깊게 생각을 해 보고 시각을 다듬어 내고, 우리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거예요. 잘 아시다시피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창조 작업을 쭉 하실

때 늘 하루 하루 엿새 동안 창조 사업을 하시죠. 그 엿새의 창조가 끝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는 것이죠.

 

#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구약성경 창세기 1장)

 

그런데 마지막 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그 인간도 역시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시는 거죠.

그러면은 그렇게 불완전하고, 흠집 투성이고, 죄짓기 십상인 그런 어떤 면에서는 불량품 같

은 존재를 떡 만들어 놓고 당신 보시기에 좋았다. 이래 이야기를 하면 이거 뭔가 좀 어패가

있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점에 있어서 우리 정말 좀 시각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싶

은 거죠. 그래서 먼저 완전에 대한 개념부터 우리가 좀 생각을 달리 해 봐야 되는 것 아닌가?

 

# '완전하다'는 의미는?

 

지난 시간에도 얼핏 말씀을 드렸다 싶은데 영적 여정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혹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이원대립론적인 사고방식이예요.

 

# 영적 여정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원대립론적 사고방식

 

이원대립론적 사고, 이런 말을 구체적으로는 지난 시간에는 안 썼던 것 같은데 말이 좀 어

려울지는 모르겠지마는 쉽게 생각하면은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다

싶어요. 뭐든지 둘로 나누는 거예요. ?늘 둘로 나누고, 둘로 나눈 것 가운데서는 우열의 차

를 짓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우열이 지어지면은 우수한 것은 취하고

열등한 것은 버릴려고 하는 것. 그런 자세를 이원대립론적인 자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 이원론적인 사고는 우열을 나눠 우월한 것만 취하려는 것

 

 

 

그래서 이 태극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은 음양이 이렇게 있다고 그랬죠. 그런데 이

밝은 부분의 양과 어두운 부분의 음. 여기에서 양은 좋은 것이고 음은 나쁜 것이다고 생각

하는 거예요. 혹은 양은 더 좋은 것이고 음은 덜 좋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죠.

 

제일 먼저 나눠내는 것이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을 비롯해서 자연, 이런

피조물들인 거예요. 창조주와 피조물. 그 다음에 인간(사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은 인

간과 자연을 또 나누면은 인간과 자연 안에서는 인간이 더 좋고 자연은 덜 좋은 것.

 

사람 안에서는 또 나누면은 남자와 여자로 나누는 거예요. 남자가 우월한 존재고 여자는

등한 존재다. 그런가 하면은 정신과 물질도 또 나누죠. 정신, 물질 이런 식으로 뭐든지 나누

는 거예요. 선, 악. 아름다움과 추함, 똑똑함과 멍청함. 이런 식으로 뭐든지 둘로 나누고, 그

둘로 나눈 것 중에 한쪽은 더 좋기 때문에 이것은 취하고 이것은 버릴려고 하는 것.

 

혹은 이것(양)은 상전 대접을 하고 이것(음)은 하인 대접을 하는 것. 이런 태도가 우리 안에

아주 깊게 뿌리 박고 있는 거예요. 그랬을 때 선과 악이라든지 이런 것을 가지고 볼 때도 이

양이라는 부분을, 이 양하는 것을 좋은 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음을 나쁜쪽이

라고 생각을 한다고 하면은 하느님하고 관련지었을 때는 무슨 선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정의라든지 뭐 진리라든지 이런 좋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여기(양)에 모으고 이것을

극대화시켜낸 것. 이런 존재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참으로 선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충만하시고, 지극히 아름다우시고, 참되

시고, 그런 좋은 것들만 다 모은 이것이 하느님이시고 그렇지 못한 피조물들, 그래서 인간

은 피조물로서 당연히 하느님의 이 좋음에 도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쉽게 말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모두 모아 놓은 이것을 참된 하느님이시고 이렇게 갖추어졌을 때 이걸 가

지고 완전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버린다면은 여기에 비해서 인간은 진짜 불완전하기 짝

이 없죠.

 

#  참되고 좋은 것만 갖춘 것이 '완전(完全)'인가?

 

선한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는가 하면은 악한 마음을 가지고 휘둘릴 때도 더 많고, 사랑이

많은가 하면은 미움 때문에 허덕일 때도 많고, 정의롭지 못하고, 뭔가 자기 목적을 달성하

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예사로 해버리고, 이런 자신의 모습을 생각을

하면은 우리 인간은 과연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이래 이야기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우리 인간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약하고, 죄짓기 십상이고, 타락

하기 쉬운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늘 이성적으로 깨어 있으면서 양심에 비추어

서, 의지력을 발동을 해 가지고 올바르게 살려고, 죄짓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지 않으

면은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은 여러분들은 영혼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식으

로 늘 교육받아왔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좀 다듬어 낼려고, 올바르

게 살면서, 제대로 된 인간을 만들어 내려고, 불완전한 물건을 완전까지는 못 간다 하더라

도 완전에 가깝게 변화시켜 내려고 그렇게 애쓰면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식으로 우리 몇십 년을 살아왔죠. 그런데 몇십 년 살아온 모습이 현재 우리 이

모습인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지금까지 만큼 내지는 그보다 조금 짧게 앞으로 몇십 년 더

살다가 전부 죽겠죠. 그럼 앞으로 남은 몇십 년 후에는 여러분들이 정말 이런 강의도 들었

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기도도 열심히 할테니까, 책도 읽고 공부도 할테니까 완전한 모습

까지는 못 가도 그 비슷한 근사치를 이루면,  만족하면서 위로를 얻으면서, 죽어서 좋은 곳

에 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십중팔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모습에서 거의 변화됨이 없이  죽을 때 고 상태로 거의

죽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이 모습이 죽을 때의 모습하고 진배없을 것이다. 이게 오히려 훨

씬 더 가능성도 높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야기인 것 아닌가? 그럼 그렇다면은 우리는

한평생을 불완전하게 살다가 불완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불완전하게 죽어가는 그런 존

재들이지 않는가?

 

#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가?

 

그러면은 정식으로 우리가 도전을 받는 것이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하시는 이야기가

"여러분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렇게

이야기 하시죠.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 5장)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하는 거예요. 새가 나는 모습이 아름

답다 해 가지고 "날아 봐라!" 그렇게 인간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거죠. 날개를 주고 나서,

존재적인 조건을 갖추어 주고 나서 거기에 따른 것을 요구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은 여러분들이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하신다면은 우리가 적어도 완전하거나 그 완

전한 모습이 뒤덮여 있거나 아니면은 완전할 수 있는 가능성 이런 것들을 갖추고 있어야

되지 않는가? 하는 거예요.

 

# 완전할 수 있는 가능성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인식을 좀 분명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어릴 때부터 늘 교육받아온 그 논리 체계하고는 좀 다른 논리 체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

다 싶은 거예요. 어릴 때부터 우리가 쭉 배워왔던 것은 좀 어렵게 이야기 한다면은 아리스

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적인 체계,

 

# 우리가 익숙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적 입장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고, 체계가 분명하고, 질서가 확실하게 지어져 있고, 그것들만 참된

진리이고, 참된 논리 인양 그렇게 쭉 교육을 받아왔는데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내용들

을 보면은 거의 다 역설적인 것들이예요.

 

# 이에 반해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적 논리

 

여러분들이 살고 싶으냐? 죽어야 한다. 일등이 되고 싶으냐? 꼴찌가 되어야 한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 복음서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그 이야기의 핵심

들은 전부 역설적인 논리들에 가 걸려 있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전체와 부분이라는 이 개

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은 전체와 부분은 늘 다르다. 그리고 부분보다 전체는 늘 크다.

부분의 합이 전체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 그것만이 과연 옳은가? 그런 논리 체계 밖에

없는가? 하는 이야기죠.

 

그냥 크게 좀 거칠게 나눈다면은 이건 서양식의 논리 체계가 있는가 하면은 동양식의 논리

도 있다 하는 거예요. 동양식의 논리라는 거는 대표적으로 음양을 나누눈 이 태극의 관점,

이런 관점인 거예요. 어거는 서양의 논리하고 많이 충돌하는 거예요.

 

# 에피메데스의 거짓말쟁이 역설

 

거짓말쟁이 역설 같은 거 보면은 "모든 신부는 거짓말쟁이다." 이 본래는 고대 철학자인

에피메데스가 한 거짓말쟁이 역설 하는 이야기인데, "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자기도 크레타 사람이면서 그런 말을 했죠. 즉, 모든 신부들은 거짓말쟁이다. 이런 이야기

들. 만약에 참말이라면은, 참이라면은, 그러면서 제가 이야기를 떡 하는 거예요. "모든 신

부는 거짓말쟁이다." 그러면은 나는 거짓말쟁이죠. 거짓말쟁이 신부가 거짓말을 하는 거

예요. 딱 거짓말쟁이니까.

 

거짓말쟁이 신부가 거짓말을 하는데 그 결과는 참이 돼 버리는 거예요. 진실이 되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만약에 이 명제가 거짓이다. 참이 아니고 거짓이다 이러면은, 나는 거짓말쟁

이가 아닌 거죠. 거짓말쟁이가 아닌 신부가 즉 참말을 하는 신부가 참말을 하는 거예요.

"모든 신부들은 거짓말쟁이다." 하면서 참말을 하는 신부가 참말을 하는데 결과는 거짓이

돼 버리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들을 하며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어떻게 좀 소화시켜 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까 아까 여기에 보면은 양으로 표현했던 것, 뭐 하느님이라든지, 인간이라든지, 남자라든지

정신이라든지, 선이라든지, 그런 것 하고, 이쪽에 음이라고 분리해 놨던 것 피조물, 뭐 여자

자연, 물질, 악 이런 것을 반쪽을 음에 해당하는 부분을 전부 없애버리고 그 다음에 양에 해

당하는 부분만을 극대화시키면은 그것을 완전이다. 이렇게 알아들으면은 우리 안에는 완전

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거예요.

 

# 완전은 좋은 것만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은 근본적으로 하느님 당신 자신의 완전성 마저도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

서 우리가 완전이라고 이야기할 때 근본적으로 알아들어야 될 것은 성장과 함께 연결되는

개념이다. ?완전하다 할 때는 끝없이 성장하는 거예요.

 

# 완전하다는 것은 끊없이 성장하는 것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대되는 두 개가 결합되어져 있어야 한다. 음양의 이야기죠.

바로. 이 음과 양처럼 음양이 어루러져서 태극을 이루는 것처럼 서로 상반되는 두 개가 결

합이 되어서 하나를 이루고 있을 때 비로소 그때 성장이 일어난다. 이거는 지난 시간에 좀

이야기를 했죠. 상반되는 두 개가 결합되지 않으면은 결코 성장이 일어날 수 없고 성장이

일어나지 않으면은 완전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 상반되는 두 개가 결합해야 성장이 일어날 수 있고 성장이 일어나지 않으면은

  완전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은 선 뿐만이 아니고 악도 어느 정도

있어야만 이 비로소 선과 악이 서로 함께 있는 가운데 성장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 남자

와 여자가 서로 함께 있는 가운데 성장이 일어나는 것, 자녀들이 탄생 되는 것. 이런 것도

전부 같은 의미죠. 만약에 이렇게 알아듣는다면은 우리에게는 전부 이 완전성 하는 것을

갖추고 있는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 우리 모두는 완전함을 갖추고 있다

 

우리한테 그런데 필요한 것은 이 완전함이 균형을 잃고 있을 뿐이다. 균형을 잃었다는 것

은 양과 음이 철저하게 균형을 잡는 가운데 이 태극 전체가 성장을 향해 나아가야 되는데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양쪽으로 많이 기운다든지, 음쪽으로 많이 기운다든지 그

러면은 중(中)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균형을, 조활르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더

큰 성장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전부 완전한 존재로서 성장을 이뤄낼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 우리 모두는 완전함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은 우리는 못된 성질 가지고 있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완전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 우리는 못된 성질, 악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다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만 가득 차 있고, 선한 심성만 가득 차 있고 그랬을 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보고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고, 못된 성질, 나쁜 기질들 이걸 함께

가지고 있다 보니까 오히려 그때야 비로소 완전하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그리고 우리

한테 필요한 것은 늘 상반되는 이 두 움직임을 잘 균형을 잡아 내는 것. 시소를 계속 타는

거예요. 시소를 타면서 운동을 하는 것. 여기에 우리 인간의 완전성이 다. 이렇게 되면은

우리 모두에게 훨씬 더 큰 내적인 위로, 평화들이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 상반된 두 움직임에 균형을 잡아 움직일 때 완전성이 생긴다

 

공부하는 학생들 보고, "아휴, 애비 닮아가지고 공부를 이렇게도 못 한다고." 아빠들이 주

하니까 에미 닮았대요. 말이 더 쉽겠네. 에미를 닮아 가지고 늘 반에서 꼴찌 아니면 꼴

찌에서 둘째. 나를 닮았으면은 적어도 이 정도는 안 할텐데. 그런 얘기를 하면은 요즘은

나무라죠. 애를 자꾸 그런 식으로 윽박지르고, 구박을 주고 이러면은, 기를 살리지 않으면

은 오히려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부도 못한다. 그래서 늘 잘한다고 격려해 주

고, 힘을 돋아줘야 된다.

 

그런 것은 사람들이 잘 알고 곧잘 그렇게 하죠. 그러면서 어떻게 더 중요한 인간의 존재의

근본의 문제, 영적 차원의 문제 여기에 있어서는 어떻게 끊임없이 "너는 불완전한 존재야,

너는 타락한 존재야, 너는 죄인이야. 그러니까 늘 깨어 있으면서 똑바로 살아!" 이렇게만

요구를 해 가지고는 어떻게 우리 안에서 좋은 기운들이 올라오고 내 본래의 아름다움과

명을 키워낼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이 점에서 우리 각자가 완전한 존재임을 깊에 알아듣고 있는 것. 그래서 이 선한 면과 악한

면, 좋은 면과 나쁜 면 그 비율을 완벽하게 딱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함 면과 악한 면을 합쳤을 때 100을 이루고 있는 100% 존재들이지

누구는 뭐 90% 정도만 가지고 있다든지 이런 것은 없다 하는 거예요. 좋은 점과 나쁜 점의

비율이 다를 뿐이지. 그런 점에서 모두 완전한 존재이다.

 

나 역시 완전한 존재이고 그 점에서 하느님과 예수님과 완전히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고,

내가 원하면은, 내가 바리기만 하면은 그 모습을 쫓아서 살아갈 수 있다. 걸어갈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 확실하게 눈 뜨는 것.

 

# 내가 바라기만 하면 완전함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보면은 나는 선이 52%고 악이 48%인데 니는 보면은 선이 45%고 악이 55% 거든.

그러면서 너는 왜 선이 그렇게 작느냐고. 그러면서 함부로 비난하거나 단죄하거나 이거

가능하겠느냐 하는 거예요.

 

# 내가 다른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가? 

 

적어도 신앙생활을 한다 이러면은, 적어도 가톨릭의 영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런다면은

그런 점들을 깊게 받아들이면서 '아멘' 하고 그렇게 걸어가는 모습인 것이지 그저 무슨

거룩한 미사에서, 거룩한 예배에서 그저 뭐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고함만 질러댄다

해 가지고 그렇게 될 일이 아니죠.

 

# 예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가?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이 사회를 어떤 눈으로

좀 똑똑하고 잘난 사람과 좀 모자라고 못된 사람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수용하고 계시는

지 깊게 알아듣고 걸어갈 필요가 있죠. 그런데 이제 이런 스스로의 완전성에 대해서 깊게

눈을 뜨기 시작하면은 이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내 자신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 내 자신에게 큰 위로

 

내가 이렇게 살다가 가도 한평생을 정말 아름답고, 귀하고, 좋게 살다가 갔다. 나도 정말

밥이나 축내는 인간이 아니고 진짜 괜찮은 존재다. 이 점에 대한 깊은 자각인 거예요. 이게

우리 안에서 얼마만큼 큰 힘을, 위로를, 희망을 불러 일으켜 내는가? 이것은 제일 중요하다

고 보여지죠. 이런 완전들을 좀 알아들었으면 좋겠는데,

 

이 논리 체계에 대해서는 사실은 뭐 A형 논리라든지 E형 논리라든지 이렇게 구분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좀 할 수가 있어요. 이것은 김상일 교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계셨는데 A 하는 거는 사람 이름의 두(頭)문자를 딴 거예요. 아우구스티누스 할 때 A, 그 다

음에 토마스 아퀴나스 할 때 아퀴나스 A, 그 사람들의 이름이 마침 A로 시작을 해 가지고

그래서 A형 논리다. 이러는데 주로 서양식 논리를 대표하죠.

 

* A형 논리 :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ㅡ 서양적 논리

 

이 E는 아까 얘기했던 에피메니데스라든지 에우불라이데스라든지, 에크하르트의 그 E를

따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 건대, 이거는 주로 동양식 논리죠.

 

* ?E형 논리 :  에피메니데스, 에우불리데스, 에크하르트    ㅡ 동양적 논리

 

그래서 이 동양식 논리, 서양식 논리 이런 식으로 크게 그냥 거칠게 나누어서 이야기를 해

보면은 서양식의 논리는 철저하게 체계를 잡고, 질서를 잡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분석하고

정리하고 하는 그런 부분에 큰 촛점을 두고 있는가 하면, 동양식 논리는 혼용상태, 함께 가

는 것, 조화를 이루는 것. 이런 쪽에 좀 더 촛점을 두고 있는 것이 동양식 논리라고 보여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양면을 우리는 함께 볼 필요가 있겠다

 

* 서양식 논리: 체계적, 질서 중심, 분석, 정리

* 동양식 논리: 혼용, 조화

 

요 앞에 얼핏 그런 생각도 드는 거예요. 얼마 전에 삼위일체 대축일 하는 게 지나갔죠.

삼위일체 하는 것.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것도 하느님이라는 한분을 가만히 보는데,

성령적인 측면, 성자적인 측면, 성부적인 측면 이거를  그렇게 분석을 하고, 나누고, 위계

질서는 탁 잡는 것. 이런 게 서양인들의 사고인 거예요. 그런 걸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가 세 면을, 그러니까, 성령 같으면은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생각이라고 그럴까? 내면의

깊은 움직임 그 부분을 따로 부각시켜 내 가지고 성령이라는 존재로 만들어 냈다. 이렇게

볼 수도 있죠.

 

그런데 우리 동양 같으면은 그냥 그걸 뭉뚱그려 가지고 하나의 통합체로서 직관적으로 바

라보면서 인간 혹은 하느님, 혹은 도, 이래버리는 것을 이 서양 사람들은 인간도 가만 보니

까 몸뚱아리가 있고, 정신이 있고, 영혼이 있고 이런 식으로 분석해 가지고 막 쪼개 내고,

그 사이에 질서를 잡는 것처럼. 이런 움직임들이 계속 있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하느님 같은 삼위일체 논리에 있어서도 일단 셋으로 분석을 해 놓고, 쪼개

놓고는 그것을 다시 하나라고 묶어 내려니 어려운 것 아닌가? 그래서 무슨 위격이 어떻고,

본성이 어떻고,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 데 동양 같으면은 좀 더 관계적인 측면에서

이렇게 읽어 내면은 훨씬 더 이해하기는 수월하겠다 싶죠.

 

 

 

 

태극의 이야기를 했지마는 태극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좀 더 깊게 들여다 본다면은 삼태극

의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이 삼태극은 이 양과 음이 여기 있고, 여기에 황극이 있

고, 그러면서 이 전체가 태극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양과 음이 있고, 또 그 전체가 들

어와 있는, 이 전체가 부분으로서 들어와 있는 이런 이야기인데 이 전체와 부분 이런 이야

기도 서양의 논리에 의하면은 이것은, 전체가 부분 속으로 들어 간다 하는 것은 말도 안 되

는 이야기죠.

 

그런데 불교에서도 그런 이야기 곧잘 들어보셨겠고 ?우리 동양에서는 이런 이야기 많이 들

어 봤죠. "티끌 속에 우주 만물이 다 들어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 부분으로 들어와 있는 전체

 

 

 

우리 의상 스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보면은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一中一切多中一(일중일체다중일), 하나 안에 전체가 다 들어와 있다. 그리고 많은 것 안에

하나가 있다. 일체나 다(多)나 이거는 같은 소리죠.

 

# 우리 각 존재 안에는 전체가 다 들어 있다

 

우리 각 존재들 안에는 전체가 다 들어와 있다. 이거는 다음 주 강의에서 과정 철학 하고

관련지어서 이야기를 할 때 좀 더 깊게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 싶은데 우리 모두는 그저

한 사람, 막말로 얘기해서 밖에 나가면은 발에 채이는 게 돌하고 사람이다. 그럴 정도로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죠. 내 같은 녀석 하나 죽어 봐야 눈도 깜짝 안 하고 이 세상은 잘도

굴러가겠죠.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 이야기 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그저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거예요.

 

*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ㅡ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 25장

 

존재론적인 언명(言明: 말이나 글로써 의사나 태도를 똑똑히 나타냄)을 그대로 하시는 거예요. 정말

인간 같지도 않은, 없어져도 아무도 울어주지도 않고, 눈 하나 깜짝 안 할 그 인간 한 명 

안에 우주 전체가 다 들어와 있다고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주 전체인

당신 자신과 또 보잘 것 없는 이 한 사람이 완전히 동격의 관계에 놓이는 거예요.

 

# 우주 전체의 주님과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인간이 동격으로

 

 

 

인간을 이렇게 알아 듣는 것. 전체가 부분 안에 완전히 들어가 있다. 여기에 보면은 이 태극

이라는 전체가 한 부분으로서 이렇게 들어와 있는 것. 전체하고 부분하고 이 관계하고 관련

지어서 좀 우리가 양명학적인 입장에서 인간의 완전성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싶죠.

 

# 양명학적 입장에서 본 인간의 완전성

 

이 왕양명 선생(王陽明, 1472~1528), 왕양명 선생이 1508년에 그분 나이가 서른일곱이 되던

해 였죠. 1508년에 용장 오도(龍場悟道)라는 체험을 하시죠. 용장이라는 것은 지명인데 롱짱

하는 거. 용장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때 그 깨달음의 내용이 모든 인간들 안에는 양지

라는 것이 잇다. 이것을 알아들으시죠. 양지, 좋은 앎. 그런 이야기인 거예요.

 

* 용장 오도 체험: 모든 인간들 안에는 양지(良知)가 있다

* 양지(良知) : 마음 속에 있는 도덕적 양심

 

그런데 왕양명 선생의 당시 상황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겠는데 과거에 급제해 가지고 말단

관리가 됐죠. 말단 관리가 됐는데 당시에 환관 세력들이 조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거예

요. 그래서 상소를 했더니 그걸 환관 눈에 요즘 말로 찍혀버렸죠. 그래 가지고는 유배를 보

내는 거예요. 용장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그 보내는 데서 도중에 죽여버리려고 자객을 계속

보냈는데 실패하죠. 그래서 어쨌든 용장에 도달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분이 그때 계속 여러 가지, 가족들, 왕양명 선생의 당시 부친은 아주 세도가였어

요. 우리로 치면은 거의 영의정 수준에 올라가 계셨고, 대유학자였고, 그래서 집안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이 생긴 거예요. 그런데에 대한 집착이라든지, 건강, 이 뭐

이렇고 저렇고 하는 문제라든지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놓여 놨던 거예요. 나름대로 그 체

험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다 풀려 났죠.

 

그런데 삶과 죽음에 대해서만은 도대체가 풀리지는 않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면은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아예 석관을 하나 짜 놓고 그 앞에서 기도에 들어갔죠. 그

래서 죽으면 죽으리라. 관 앞에서 계속 수행에 들어갔는데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이

왔었는데 그 깨달음이 우리 모든 피조물들 안에 인간을 비롯한 이 자연들 안에는 '생의'가

있다. 살고자 하는 의욕, 이 생의(生意).

 

# 우리 모든 피조물 안에는 '생의(生意) ㅡ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생의(生意)를 가능하게 하는 양지(良知)가 인간 안에 있다

 

삶에 대한 집착, 살고자 하는 이 의욕이 있고, 그 의욕이 가능해지도록 양지라는 것이 우리

인간 안에는 전부 있다. 이 양지는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별할 뿐만 아니라 호선오악

(好善惡惡) 하는 힘도 갖추고 있다. 시비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진리가 뭐냐? 참되게 옳은

것이 뭐고, 그른 것이 뭐냐? 객관적으로 천리(天理)가 뭐냐? 이런 이야기 하고 통하는 것들

이죠.

 

* 시비선악 ㅡ 진리가 무엇인가? 참된 것과 그릇된 것이 무엇인가?

                   하느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그런 것들을, 그러니까 어느 것이 참되게 옳고, 어느 것이 참되게 그른 것인지를 분별할

뿐만 아니라 그 중에 옳은 것을, 좋은 것을 취하면서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힘, 열정, 의지

적인 에너지. 이런 것들도 있다. 그래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 호선오악: 좋은 것을 취하며 계속 나아가려는 의지

 

그런데 주위할 거는 여기에서 선, 악, 시, 비 이런 이야기들은 그저 상대적인 지평 속에서

둘로 나누어 놓고 한쪽은 취하고, 한쪽은 버리려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그 양쪽을

통합해 낸 가운데 참되게 옳은 것, 참되게 그른 것, 참된 선, 참된 악 이런 이야기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시(是) 안에도 시비(是非)가 들어 있고, 비(非) 안에도

시비(是非)가 들어 있고, 선(善) 안에도 선악(善惡)이 들어 있고, 악(惡) 안에도 선악(善惡)

이 들어 있고. 이런 것들을 전부 모아서 균형을 잡으면서 제대로 성장에로, 더 큰 생명에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참된 시비선악인 거예요.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피해야 하고, 싫어 해야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듣고 살아내고자

하는, 그랬을 때 참된 생명을 얻고 살아낼 수 있다 하는 여기에 대한 의지들, 에네지, 힘

이런 것들이 모든 피조물 안에 있고 특히 우리 인간한테는 양지라는 형태로 있다.

 

# 진리를 확실이 알아듣고, 그렇게 살려할 때, 참된 생명을 얻고 살아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볼 때는 성령의 활동이라고 우리 식으로 알아들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싶은 거예요. 다음에 우리 여정이 한참 지나가면은 그런 이야기 나오겠지마는 영적

위안, 하느님께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영적 위안을 곧잘 주시죠.

 

#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위안

 

그럼 그런 영적 위안을 받아서, 힘을 내서 걸어가기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께

서는 우리는 이끄실 때 이것이 옳은 길이다. 저것은 그른 길이다 하는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까지도 반드시 주신다 하는 거예요.

 

* 성령은 옳은 것을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도 반드시 주신다

 

그래서 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실 때는 그저 그냥 머리로만 이렇게 알아듣고 아, 그렇구

나, 그렇구나 ?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옳다고 생각한 것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의지적인 힘

이것까지도, 행하는 힘까지도 함께 주신다.

 

자, 그런 점에서 이 양지인 거예요. 이 양명학, 왕양명 선생이 나오면서 유학의 한 갈래로

양명학이 나오기 전에 주자 선생을 중심으로 주자학 하는 게 있었죠. 이 주자학 하고 양명

학 하고는 참 다른 거예요.

 

# 주자학과 양명학

 

그런데 이런 걸 이렇게 보면은 참 인류 전체의 역사적인 흐름을 이렇게 보면은 참 좀 묘하

다 싶은데 우리 가톨릭에서는 신학의 토대를 닦은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시죠.

스콜라 신학인 거예요. 그런데 그 비슷한 시대에 동양에서는 주자 선생이 주자학이라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중심으로 해서 방대한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그 스콜라 체계랑 주자학의 체계랑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 몰라요. 그런가

하면은 그 한계점인 스콜라 신학이 쭉 내려오다가 우리로 치면은 이냐시오 성인, 이냐시오

성인은 우리 교회사에 있어서 종교 개혁 운동이 막 일어나서 반동종교개혁, 루터가 종교

개혁, 교회 안이 얼마나 부패되고 잘못되어 있는가 그걸 지적하면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

셨죠. 그래서 개신교가 떨어져 나가게 되죠.

 

그런데 이냐시오 성인고 교회가 얼마 만큼 지금 부패가 되었는지 정확하게 보셨던 거예요.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 그런데 루터 같은 경우에는 교회가 이러니까 교회 바깥으로 나

가서 새롭게 움직여야 되겠다. 이렇게 나간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움직임이고, 이냐시오

성인을 중심으로 해서 가톨릭 내부에서 일어났던 거는 밖에 나가서 정화 작업을 할 게 아

니고 안에서 정화 작업을 하자. 그래 놓으니까 이 역사 학자들을 루터를 종교 개혁이라고

그러고, 이냐시오 성인은 보면은 반동종교 개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어쨌거나 이냐시오 성은은 보면은 왕양명 선생보다 한 20년 뒤늦게 태어나고 그 정도 이

렇게 늦게 출발을 하죠. 왕양명 선생은 서른일곱에 큰 깨달음을 얻지마는 이냐시오 성인

같으면은 서른하나, 둘 요때 큰 깨달음, 만데사 체험이라는 것을 하게 되죠.

 

다음 시간에 야기 하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걸 보면 비슷한 시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움직임들이 이렇게 일어나고 있는 것. 지구 전체를 감싸고 있는 하나의 기운이

비슷하게 같은  양상으로 흐르는 것 아닌가? 그런 느낌을 받는 거예요. 어쨌거나 이 주자

학에서 주자 선생이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은 가장 중요한 게 견물치지 하는 이야기죠.

 

* 주자(朱子)의 격물치지(格物致知?) :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그 나름의 근본 이치가 있고

  그 이치를 깊게 연구하면 앎에 도달한다

 

격물치지, 모든 사사물물에는,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그 나름대로의 근본적인 이치가 있다.

그래서 그 물(物)에 즉 다가 가서 그 물(物)의 이치를 깊게 연구하다 보면, 궁리하다 보면은

앎에 도달한다. 이를치(致)자로 보는 거예요. 그렇게 앎에 도달하면은 거기서부터 제대로

알게 되면은 행함이 나온다.

 

부모님이 누구신지, 부모가 가지고 있는 그 이치를 깊게 알아들으면은, 자식과 부모의 이

치를 깊게 알아들으면은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된다 하는, 그런 행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점에 있어서 왕양명 선생이 아주 어려움을 겪었고 여기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거예요.

사사물물에 이치가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놓으니까,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대나

무 앞에 앉아 가지고 일주일 동안을 궁리에 들어갔죠. 대나무도 분명한 이치가 있겠다.

그런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거듭 하다가 너무 생각을 깊게 해 가지고 병이 나버릴 정도가

되었어요. 그러고는 포기하죠.

 

그 다음에 알아듣는 게 이분은 치양지(致良知), 양지를 확충하는 것. 그리고 격물하는 이

격물(格物)하는 이 격(格)자는 물(物)을 바로 세운다. 치지, 치양지에 이르고 나면 그 결과

격물이 된다. 이런 식으로 보는 거예요.

 

* 왕양명의 치양지(致良知):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옳고 그름, 선과 악을 알고 있다.

  그 밑으로 사건에, 사물에 다가가 바로 잡으면 된다

 

우리 안에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지 배우지 않아

도 선천적으로 다 알고 있다. 그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가지고 사사물물에 다가 가면은

뒤틀려 있는 것을 바로 잡으면 된다. 부모 자식 간에 관계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알고 있는 것을 깨달음을 통해서 얻고 나면은 다서 보니까

부모님께 잘못했구나 싶으면은 바로 잡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하고, 옳게 행할 수 있는 이 힘, 이 앎,

양지를 모든 구석구석까지 확장시켜 나가는 것. 여기에 양지로서의 어떤 힘이 있고 그걸

통해서 모든 사사물물들을 다르게 제자리에 잡게 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주자학적인 입장에서는 앎과 행동을 분리시켜 놓은 거예요. 그래서 앎이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행함이 온다. 주자학에서는 앎이 있어야 행함도 있다. 이러다 보니까 우리 요즘

살아가는 모습하고 아주 비슷하죠. 이것저것 공부를 많이 해 가지고 많이 배워야만 되는

걸로 아는 거예요. 그래야 그다음에 인간답게 똑바로 살 것이다.

 

그런데 이 공부가 언제 끝나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하다가 날 새 버리는 거예

요. 러면서 올바른 행동으로 못 나가고, 이러다 보니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전부 따로

놀아버리는. 요즘 우리 사회가, 우리 대학이 안고 있는 지독한 병폐가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죠. 그런데 왕양명 선생은 앎과 행함이 같이 가고 있는 것이다.

 

* 양명학에서는 앎과 행함을 동일하게

 

앎과 행함은 동일한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평화방송 다시보기

http://web.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5653%26menu_fid%3D5657&program_fid=5653&menu_fid=5657&cid=&yyyy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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