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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제6강 본래의 모습이 펼쳐지는 장(場) - 원리와 기초 중 '기초'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12 조회수1,566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6강 본래 모습이 펼쳐지는 장(場) ㅡ 원리와 기초 중 '기초'

 

1. 불편심과 마지스(magis)

 

2. 원리들이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현실세계
    - 몸(건강), 재물(부귀), 심리(명예), 삶과 죽음(장수)

 

3. 온전한 깨달음을 얻음
    - 원리들을 당위적 요청에 좇아 의지력으로 살아내는 것 아니다
    - 예 : 빈곤과 부귀도 양자택일 논리에 빠져선 안 된다, 이중성 구조 원리 속에서 알아들어야
    - 중용의 의미도 이중성 논리 속에서 봐야
    - 한 단계 더 들어가, 유위적 중용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4. 영신수련 흐름 안에서의 원리와 기초
    - 인간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여정,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
    - 이 여정의 저변에는 존재의 근원을 향한 불안이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다

 

4.1 첫째주간에서의 원리와 기초
    -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초점
    - 이중성의 구조 속에서 자신을 봄
    - 일상적이고 피상적 삶에서 오는 깊은 무상감을 절실히 느껴야 동시에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감지 → 둘째주간으로 넘어가는 추진력

 

4.2 둘째주간에서의 원리와 기초
    - [91~8] : 1주간을 통해 자신의 현주소를 파악한 영혼이 미래를 향한 결단(본래성 회복)
    - 여기서 역시 불안이 내재 → 자아중심기도에서 성령중심기도에로 전이 : 묵상기도에서

       복음관상기도에로
    - [136~147] : 전혀 다른 두 시스템

 

4.3 셋째주간과 넷째주간에서의 원리와 기초
    - 하나의 사건 : 이야말로 이중성 구조의 전형
    - 존재론적 차원의 죽음--無의 근원자리로 되돌아가기를 요청 받는 죽음
    - 죽음(무의 근원)과 생명(유의 근원)

 

4.4 원리와 기초의 회귀
    - [230~7]
    - 십우도의 저잣거리

 

# 오늘 이야기 ...

우리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변화들이 있죠. 자기 지신 안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인생 여정에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런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계속 걸어가기 마련이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변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난다고 생각을 하세요? 뭔가 여러 가지 단순한 지식 차원의 알아들음

보다는 좀더 깊은 깨달음 같은 것. 이런 것들이 더 필요한 것 아닌가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 깨

달음은 우리는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 과정, 심화되어 가는 과정 그것을 한번 살펴봤으면 합니다.

 

#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이 시간에는 저희들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고,

깊고, 넓은지 그것을 알아듣고 그 본래의 모습을 현실의 삶 속에서 구현해 내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지혜와 용기와 힘을 더해 주십시오.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

속에서 저희들 일상의 삶에서 부딪치는 어려 가지 문제들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저희들의 생명과 기쁨과 평화를 더욱 더 깊게 길어올릴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지난 시간 ... 원리와 기초 중 '원리'

 

지난 주에 사실은 원리와 기초 중에 원리 부분을 설명을 할려고 했었는데 다 마무리 짓지를

못 했죠. 원리 중에서도 한느님에 대한 혹은 자연에 대한 원리, 사람에 대한 관, 자연에 대한

관, 이 부분은 채 못 건드렸죠.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오늘 원리과 기초를 좀 마무

를 할까 싶은데,

 

# 하느님에 대한 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하느님에 대한 관 하는 것. 이것을 너무 '있다' 하는 것.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강조하다 보니까 늘 우리는 있다는 유(有) 중심으로만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기

쉬운데 有뿐만이 아니고 無도 동시에 알아들어야 되는 것 아닌가? 無를 자궁으로 해 가지고

有라는 것이 탄생되어 나오는 것 아닌가? 무슨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

지마는 그렇다고 해 가지고 그 無 하는 것은 그저 허무의 無, 텅빈, 공허한, 아무것도 없는,

그런 無 하고는 다른 개념인 것 아닐까?

 

외히려 어쩌면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꽉 차 있기 때문에 有로써 채워 넣을 수 조차 없을 정도

로 꽉 차 있는 그 有를 달리 어떻게 표현할 재간이 없다보니까 無라고 표현하는 것 아닌가?

이것도 이쯤 이야기를 하면은 또 그냥 마 머리가 지끈거릴지 모르지마는 부부 생각을 해 보면

역시 그렇다 싶죠. 부부 하는 것.

 

부부가 어디 손에 잡혀요? 남편은 잡히고 아내는 느껴지고, 보이고, 들리고 이러지마는, 부부

하는 것은 안 보이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과 아내가 둘이 이렇게 있으면

은 거기에 부부라는 존재가 같이 탁 있죠. 어쩌면은 이 부부하는 것이야말로 '無'라고 이름 붙

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자녀는 그 부부라는 無로부터, 남편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내

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둘 사이의 빈 곳 無 하는 곳. 그 無를 가시적으로 좀 손에 잡히

는 표현을 한다면은 부부라고 표현을 할 수 있지마는,

 

그 부부하는 것은 사실은 형체도, 맛도, 냄새도 없는, 소리도 없는, 그러나 부부는 엄연히 있는

그 빈 곳. 남편과 아내의 그 사이, 빈 곳, 無, 空, 거기로부터 새 생명들이, 有라는 것들이 탄생

되어 나오는 것 아닌가? 하느님을 알아듣는 면에 있어서도 이 부분을 좀 더 깊게 알아들을 필

요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느님도 이런 식으로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이 떡하니 어디에 계시

는 것인 양 자꾸 알아듣기 쉬운데,

 

# 존재가 아닌 존재로서의 하느님/ 無의 하느님

 

그것을 이해하기 하나의 방편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그것을 넘어서

맛도, 냄새도, 형체도 없는 하느님, 無의 하느님, 空의 하느님 그 부분을 깊게 알아듣고 그 속에

서 움직일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깜깜한 밤 하늘을 이렇게 보더라도 깜깜한 밤 하늘에 별들이

있고, 달이 있고 막 이러죠. 대단히 아름답죠.

 

그런데 그 별과 달, '있다' 하는 것을 有자, 있음들이 잔뜩 있는데 그걸 보고 아름답다 이러는데

사실은 진짜 별로 온 하늘이 빼곡하다면은, 별로 도배를 하듯이 더 하나의 별을 넣을 자리도 없

을 정도로 별로 가득차 있다면은 그 별이 뭐 그렇게 신통하게 아름답겠느냐 하는 거예요. 별과

별 사이에, 별과 달 사이에 깜깜한 밤 하늘, 없음이 있으니까 고 사이라는 빈 곳이, 거리가 그렇

게 있으니까 별들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 아닌가?

 

따라서 그 별의 아름다움 하는 것은 오히려 그 별과 별 사이에 있는 깜깜한 빈 곳, 어둠, 그것이

별의 아름다움을, 있음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느님을 알아들을 때 그런

식으로 알아듣는 것 하고 사랑이 가득 차 있는, 정의로운 하느님, 불변이신 하느님, 전지전능

하신 하느님이 서초구에 떡 계시면서 여러분들한테 뭐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이렇게 알

아 듣는 것 하고는 우리 살아가는 모습이 사뭇 다를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체험한 아주 드문 성인들 중에 한 분이

다. 이렇게 곧잘 이야기를 하죠. 이냐시오 성인 자신은 삼위일체 신비까지 그렇게 깊이 있게

체험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당신 자신에 대해서 이러니 저러니, 하느님은 이런 분이

니, 저런 분이니 일언반구도(一言半句)도 표현하실 생각을 안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 해가지고 아무것도 없는 맹탕인 그런 내용인가? 그게 아닌 거죠. 오히려 언설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꽉 들어 차 있는 이 모습인 것 아닌가? 이게 우리한테 익어있는 표현을 빌린

다면은 하느님께서는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어디든지 계시고, 함께 하고 계신다. 이런 표현

도 다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아닌가?

 

# 텅빈 하느님, 無의 하느님, 없음의 하느님, 空의 하느님

 

그런데 그것도 또 어쩌면은 어디든지 계신다 하다보니까 자꾸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고, 막

떨어져서, 독립돼서 그렇게 있는 것 중심으로 자꾸 이해하는 위험이 있으니까 오히려 안전하

게 알아듣기 위해서는 텅 빈 하느님, 無의 하느님, 없음의 하느님, 空의 하느님 그렇게 알아

듣는 것이 더욱더 제대로 위험성이 없이 깊게 알아듣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하느님이 이

런 모습인가 하면은 인간에 대해서 알아듣는 원리는,

 

# 사람에 대한 관/ 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

 

우리가 지지난 주에 이야기를 했다 싶은데 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 이 부분을 좀 깊게 알아

듣는 거예요. 완전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마는 완전이라는 것은 그저 아름답고, 좋고, 선

하고 이런 것들만 전부 모아서 극대화시켜 놓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랬죠. 완전은 오

히려 성장이라는 개념하고 연결지어지는 것이고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음과 양이라든지, 선

과 악이라든지, 정신과 물질이라든지, 남자와 여자라든지, 서로 이렇게 다른 것들이 함께 하

나로 결합되어 있는 가운데,

 

즉 그러기 위해서는 없는 것 없이 전부 또 다 있는 것.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고,

갖가지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는 것. 손가락이 좀 더 피아노를 잘 치든, 못 치든, 그림을 잘

그리든, 못 그리든, 그것 상관없이, 그건 둘째 문제고 하나의 손가락도 빠지지 않고, 한 마디

도 빠지지 앟고, 손톱 하나도 없지 않고, 손가락 사이에 남자들 가으면은 털이라도 한 두개

났으면은 그 털조차도 빠지지 않고 전부 다 있을 때 이걸 우리는 완전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모습과 그렇지 못한 모습이 다 있을 때, 이런 점에서 우리 인간의 완전성울 깊이

알아듣는 것. 이게 인간에 대한 원리로서 대단히 깊게 자각이 되어야 할 부분인 거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인간의 그 완전성들을 알아들을  때는 그 완전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성장을 향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고 봉사하고 그것을 위해서 그대로 걸어

갈 수 있는 조건들을 전부 갖추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 자연에 대한 관

 

그것과 이제 관련지어서 또 자연을 이렇게 알아듣는다 할 때 자연에 보면은 여기 원리과

기초에 쓰는 데는 그래 놨죠. 다른 모든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

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면은 이래 놨죠.

 

# 「 영신수련」[23] 원리와 기초 中

그리고 이 세상의 다른 사물들이 창조된 것은 사람을 위해서 곧 사람이 창조된 목적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마치 자연과 같은 피조물은 사람을 위한 수단으로 도구로 만들?어져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 이해할 위험이 있는데 ?이것은 피상적인 생각이죠. 이냐시오 성인은 곧잘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 속에 깊이 잠겨들었다. 이런 표현들이 곳곳에 있지요. 이냐시오 성

인은 그 정도로 자연을 좋아하고 그랬던 거예요. 그런데 이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와 있다. 인간의 완전성 이야기를 이렇게 하면서 의상 스님의 그 화엄의 진리를

이야기하신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이런 이야기 했었죠. 하나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와 있고 많은 것 안에 하나가 있다.

 

* 일중일체 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나오는 말

  하나 안에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안에 하나가 있다

 

# 인간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와 있다

 

존재의 한 측면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여기에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을

해 볼 때 이 인간 한 명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와 있다. 우리 인간 안에는 태고적부터의

인류의 모든 역사가 다 들어와 있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 거창하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싶어요.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은 당장 우리 같으면은 지금 이렇게 말을 하는 것. 제가 이렇게 말을 하면은 여러분들 알아

듣고 무슨 의미인지 소통이 되죠. 그런데 이것을 여러분들 하고 저 하고만 이런 단어는 이런

의미를 갖는다. 이러면서 무슨 규칙을 정해 놓고 쓰는 것 아니죠.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들이 쭈욱 누적 돼 오면서 거기에 속해 있는 숱한 사람들이 이런

단어를 쓰면서 이런 의미를 전달하면서 마음에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이렇게 저렇게 표현을

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또 우리 사람을 중심으로 한 온갖 자연들, 식물들, 동물들 그리고

기후 변화를 비롯한 자연 현상들 이런 것들이 전부 얽혀 들어와 있는 가운데,

 

왜 우리가 지금 그저 이야기하고 서로 같이 나누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것을 느끼고,

공명을 하고 이러고 있지마는 여기에는 이미 몇천 년 전부터 또 그 더 올라가면은 한국 민족

으로 나뉘기 그 이전의 인류의 조상까지도 당연히 올라가겠죠. 그 인류의 조상들의 동물과의

싸움이라든지, 생존하기 위해서 어떻게 먹고 마시고 하는 문제라든지, 의식주를 해결해 오는

이런 모습들, 그런 생각들, 행동들 이게 유전인자처럼 우리 안에 전부 박혀 있는 것.

 

그런 정말 망망대해와 같은 존재의 이 바다 위에서 우리가 이렇게 떠다니면서 움직이는 거

그런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인간 안에는 모든 인류의 역사가, 인간을 비롯한 그 모든 자연

까지도 전부 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 아닌가? 한 명, 한 명 안에는 전부 그것이 다 들어

와 있는 이런 점에서 사람 한 명의 무게가 우주 전체의 무게와 맞먹는다 혹은 그것보다도 더

크다라고 이야기 한 것이 그저 단순히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닌 것 아닌가?

 

# 한 사람 한 명의 무게가 우주 전체의 무게와 맞먹는다

 

존재론적으로 참으로 큰 것이 아닌가? 그러다보니까 그저 우리 인간을 그저 성질이나 부리고

밴댕이 속 같고, 그냥 철 없고, 욕심 사납고 그런 식으로 잘디잔 좁쌀처럼 알아들어서는 내

본래의 ?모습을 놓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자, 그렇다면은 우리 우주 삼

라만상이 전부 다 내 안에 들어와 있고, 너 안에 들어와 있고,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은 이런

식으로 강의를 듣고 하고 또 식사 같이 하고 이런 모든 장면들이 하나의 드라마처럼 그렇게

펼쳐지는 것 아닌가?

 

모든 사람들과 모든 물건들이 소품으로 등장하는 참으로 장엄한 한편의 드라미인 것 아닌가?

그런데 그랬을 때 나는 나대로 독립해 있고, 너는 너대로 독립해 있고, 그런 것이 아니고 나

는 전부 이쪽에 들어가 있고, 저 사람도 전부 내 안에 들어와 있고 마치 거대한 퍼즐처럼.

 

거기 보면은 퍼즐 한 조각에는 반드시 빈 구석이 있어서 다른 퍼즐 조각이 거기 들어가서 꽉

물리죠. 그럼 들어가서 물리는 그 퍼즐 조각은 또 역시 자기도 빈 구석이 있어서 다른 퍼즐

조각이 와서 또 꽉 물죠. 그렇게 서로가 서로 물고 물리는 가운데 빈 곳이 있고, 채워 놓고

이러는 가운데 전체 한 판의 퍼즐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 인간과 자연들이 전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알아듣는 거예요. 이것은 정말 필요한 것 아닌가?

 

# 서로를 채워 전체를 이루는 퍼즐처럼 서로 연결 되어 있는 인간과 자연/

   원리와 기초 中 '기초'

 

그랬을 때 원리와 기초, 원리의 부분 이 살을 취해서 삶의 현장에서,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기초적인 것을 이야기를 한다 이러죠.

 

# 기초: 원리가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 기초부분을 이렇게 보면은 크게 두 단어로 나눌 때 우리는 불편심 그리고 하나는 마지스

정신. 마지스 이러니까 좀 죄송한데, 이 우리 말이 아니고 라틴어예요. 라틴어 maigs 이렇게

쓰는데 그냥 영신수련에서 상투적으로 쓰는 단어이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우리 말로 바꾸면 좀 더, 더욱 더 하는 이런 개념인 거예요.

 

* 마지스(maigs): 좀 더. 더욱 더

 

영어로 하면은 비교급, 소싯적에 배웠던 거 떠올리면은 more 하는 거죠. 좀 더 하는 것.

이 [23]번 여기에 보면은 이래 놨죠.

 

# 불편심(不偏心) :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니 않는 마음

 

불편심이라는 것은 아까도 잠깐 얘기 했죠. 여기에는 이냐시오 성인은 네 단계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죠. 맨 먼저 몸의 차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건강과 질병, 그 다음에 재산,

물질의 차원을 이야기를 하죠. 몸, 물질하면서 재산인 거예요. 가난과 부귀, 소유를 더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문제. 그 다음에 정신이죠. 정신 내지는 심리. 정신과 심리적인 차원

에서 명예, 모욕 이걸 대립을 시키죠. 그러고 나서는 급기야 사느냐 죽느냐는 삶과 죽음, 이

끝을 대립을 시키는 거예요. 이렇게 따지면 우리 삶의 전체적인 국면이죠.

 

# 「영신수련」[23] 원리와 기초 中

  질병보다 건강을, 가난보다 부를, 불명예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를

 

이 부분에 있어서 이냐시오 성인은 질병보다 건강을, 가난보다 부를, 모욕보다 명예를, 단명보

다 장수를 더 원하지 않을 것이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느 한 쪽

을 더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맨 끝에 보면은 "오직 창조된 목적에도 우리를 더욱 이끄는 것

을 원하고 선택하도록 해야한다."(「영신수련」[23] 원리와 기초 中)

 

그 더욱 하는 그 말이 바로 마지스 정신인 거예요. "더욱"정신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이게

현실세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장면인데 일어나는 국면은 몸이라든지, 물질, 정신, 삶, 죽음

이런 측면들이고 각 측면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이느냐 하면은 불편심과 더불어서 마지스 정신

에 따라서 움직인다. 이것이 기초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 모습인 거예요.

 

# 원리는 현실세계에서 몸, 물질, 정신, 삶을 통해 드러나며

           원리는 현실세계에서 불편심과 마지스(magis)정신에 따라서 움직인다

 

그래서 이제 이런 것들을 중용의 자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죠. 좀 전에 지난 시간에도

그렇고 원리와 기초에 대해서 읽어드린 것은 정재천 신부님이 번역한 것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 전에 오히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이 영신수련 번역한 것은 이제 돌아가셨지마는 윤양석 신

부님, 물론 예수회 신부님이신대 그분이 번역하셨던 거죠. 거기에 보면은 우리 인간은 모든 것에

있어서 중용을 취해야 할 것이니 이런 中庸이라는 단어를 쓰시는 거예요. 우리 잘 알고 있는 유학

에서도 많이 쓰는 용어죠. 중용(中庸)을 취한다.

 

# 중용(中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중용 하는 것도 이렇게 때문에 중용을

취한다 하는 이 말 속에도 즉 불편심(不偏心)을 취하는 중용에도 역시 이중성의 원리 혹은 이중

성의 구조가 그대로 녹아들어와 있지 않는가 하는 거예요.

 

# 중용의 의미도 이중성의 구조 안에서 이해

 

부귀와 가난, 혹은 빈곤 하는 것. 이런 이야기만 보더라도 우리 수도자들 같으면은 서원을 할 때

3대 서원을 하죠. 3대 서원. 그렇게 살겠다 하는 약속인데 그 3대 서원 중에 하나가 청빈, 정결,

순명. 즉 청빈하는 거예요. 가난하게 살겠다하는 거를 서원하는 거예요. 그러면은 부귀나 가난

중에 택일을 해야 되는, 양자택일해야 되는 관점. 그래서 가난이 좋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시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러시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가난은 취해야 하고 부귀는 여러분들 같이 욕심 사나운 사람들이나 하는 거다. 이거는

존재의 차원이 낮은 사람들이 하는 거다. 그래서 이것을 버려야 되는 것. 이런 식으로 알아들으

면은 그 가난을 취했다 한들 ?그게 무슨 별 의미가 있겠느냐? 그럼 만약에 그런 식으로 가난이

양자택일을 해 가지고 이원론적으로 나눠놓고 가난이 더 좋으니까 가난을 취해야 된다. 이런

입장이라면은 하느님의 그 부(副), 하느님의 그 풍요로움을 절절히 평가하지 못하고 오히려

폄훼하는 것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이런 이야기인 거예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가난한 게 좋을 바에야, 그것이 목적일 바에야 뭐 하려고 하느님께서 식물

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먹는 과일만 해도 그렇고 어떻게 그렇게 갖가지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많은 것을 만드셨을까? 과일 같으면은 그냥 기껏 사과 하나만 내 놔도 "성은이 망극하여

이다." 하면서 계속 고거만 먹고 있을 건대. 그런다 해 가지고 우리가 입이나 뻥긋하겠어요?

 

고기 먹고 싶냐? 동물 같으면은 닭 하나만 딱 해 가지고 닭고기, 키친만 계속 만들어 먹어라.

그래 얘기하실 수도 있고, 치킨인데  ^^*~~~ 계속 졸고 있는 줄 알았더니 졸고 있는 건 아니고.

그런데 이 내용의 심오한 면을 탁 건드렸을 때 "아저씨, 그게 그건 아니고 이거잖아요." 이래 나

오면 내가 업고 다니고 그래 할텐데 ^^*~~~ 그러네, 키친이 아니네 ^^*~~뭐 하나만 이렇게 만

들어 놓고 그거 먹어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을테고, 건강 유지하는데 별 문제 없을 것 그

럴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수도자들이 청빈 서원하는 거, 가난하게 살겠습니다 하는 이것도 가난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수녀님들 같은면은 스타킹이 구멍나면은 그걸 일일이 꿰매고 꿰매고 이래가지고 무슨

꿰맨 자국이 더 많아지고 먹는 거라고는 늘 불어터진 라면만 먹고 그래서 얼굴은 퉁퉁 부어가

누렇게 떠서 다니고 그걸 가지고는 청빈을 깔축없이(조금도 축나거나 버릴 것이 없다) 살아내고

있는, 수도생활을 아주 올바르게 하고 있다. 이렇게 알아들으면은 아주 잘못된 거 아니냐 하는

거예요. 가난 속에는 부귀라는 것이 그대로 들어와 있다고 보는 거예요.

 

# 가난 속에 부귀가, 부귀 속에 가난이 있다

 

부귀 안에는 가난이 그대로 들어가 있고 이 두 개는 손바닥과 손등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지 않는가? 이 아름다움을 충분히 드러내 보여주지 않으면은 부귀 자체가, 부유함 자체가 얼마

나 소중하고 귀하고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을 놓쳐버릴 것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은 또 부유함의

그 풍요로움의 좋음과 가치로움을 깊게 바라보지 않으면은 가난이 갖고 있는 또 그 아름다움을

역시 놓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서로가 서로를 넘겨주고 바라보는 가운데 가난은 가난에만 함몰되는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아

름답게 펼쳐져 나가는 것이다.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하는 것을 깊게 알아듣기 위해서 부귀가

필요한 것이고, 부귀는 또한 함부로 경계를 넘어서서 자기 맘대로 막 할 수 있고 방탕하게 흘러

버릴 그 위험을 막아주는 제방뚝과 같은 역활을 하기 위해서 가난의 그 아름다움이 꼿꼿하게 서

있을 때 비로소 그걸 보면서 풍요로움은, 부귀는 자기 한계를, 경계를 넘지 않으면서 그 귀함과

좋음과 아름다움을 역시 드러내는 것. 이런 식으로 함께 가는 것. 늘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추어서

더 큰 성장, 더 큰 아름다움을 빚어내기 위해서 중(中)을 잡아내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수도자들이라 하더라도 아주 풍요롭데 부족함이 없이 마음껏 먹고 마시

즐기는 것. 그것이 중(中?)을 취하고 그것이 불편심이고 그것이 참된 가난일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은, 평소에 아주 풍요롭게 잘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진짜 라면 하나 정도 끓여

먹고 아주 검약하게 진짜 연명에 필요한 최소한으로 확 줄이면서 걸어갈 줄도 아는 것. 그럴 때

그 부자가 제대로 부유함을 드러내면서도 중용을 지키면서, 불편심에 사로 잡혀서 그렇게 살아

내는 것. 이런 점에서 여러분들의 모습들이 어떤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알아듣는데 우리가 조심해서 알아들었으면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완전성

을 이해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원리와 기초를 이렇게 읽어보면은 대게 표현들이 그렇죠.

중간쯤에 가 보면은 이런 이야기들이 있어요.

 

# 「영신수련」[23] 원리와 기초 中

그것들이 목적에 도움이 되면 그만큼 사용할 것이고, 자기 목적에 방해가 되면 그만큼 버려야

한다. ... 초연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 더욱 이끄는 것을 원하고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전부 ... 해야 한다.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적혀 있죠. 좀 어렵게 표현해 가지고 당위의식 하는

거예요.

 

*  당위(當爲):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불편심을 유지해야 된다. 마지스 정신에 철저해야 된

다. 초연해져야 한다. 그런 식으로만 계속 이야기하기 쉬운데 그러면서 자, 그렇게 살아내기 위

해서 나는 의지의 칼날을 갈면서 입술을 깨물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 원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 강한 의지력으로 노력하면 되는가?

 

그런데 보면은 사실은 질병보다 건강을, 가난보다 부귀를, 모욕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를

더 원하지 않을 것이요. 이것 자체가 이미 완전히 내가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하고는 다르

죠. 뭘 여기에 불편심을 가져. 몸이 조금만 아프면은 요즘 하도 암이 유행하다 보니까 "야, 이것

도 죽을 병 아닌가? 암 아닌가?" 간이 철렁 내려앉죠. 조금만 아프면은 병원에 가서 검사해 가지

고 빨리 나으려고 나리를 치죠.

 

가난과 부귀? 할 수만 있다면은 주식시장 돌아가는 게 아주 복잡해서 그렇지 조금만 지식이 있

으면은 주식투자라도 하고, 부동산 투자라도 해서 재산을 좀 불리려고 난리죠?

 

모욕과 명예? 자존심 좀 건드리면은 "당신 집안 맨날 그렇잖아. 장인 어른 봐도 그렇고." 이러면

벌써 그냥 대판 가정 파탄에 이를 정도로 싸움이 일어나죠. "자존심을 건드려? 내가 당신 돈 못

벌어다 주는 거는 내가 참는데 우리 집 가문을 욕보이고 자존심 건드리는 거는 내가 절대 못 참

는다."고 펄쩍 뛰죠.

 

단명보다 장수? "아이고, 내가 이꼴저꼴 안 보고 일찍 죽어야지!" 그런데 거짓말이라고 그러죠.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죽어도 끝까지 살려고 날뛰는. 이런 식으로 하는데 무슨 불편

심이냐?

 

그러니까 우리는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동해 가지고 이런 부분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애써야 된

다. 그런데 사실은 살아내는 모습을 만약에 매일 매일 자기 전에 하루를 이래 성찰을 해 본다면

은 이 불편심에서 늘 미끄러져 버렸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늘 미끄러지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에 대한 깊은 자괴감, 죄책감 이런 것들에 휩싸이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게 알아들으면은 곤란하다 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들을 원리와 기초를 떡 읽으면서 나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전부 안

되고 있는데 내 꼴은 이렇는데 무슨 이게 내 모습이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원리와 기초에서

나오고 있는 이야기는 본래의 내 모습이다 그랬죠? 타고난 내 모습이 이건 거예요. 그런데 우

리는 이런 식으로 다 망가져 있는 게 내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 본래의 내 모습에 대한 착각

 

이것을 이렇게 몸뚱아리로 떨어져 있고, 이런 생각이나 마음의 느낌으로 떨어져 있는 이 한 물

건을 가지고 계속 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몸을 가만히 보면은 먹는 거나 탐하

고, 자존심 건드리면 막 고슴도치 털을 세우듯이 세우고 난리 법석을 떨고, 이 놈만 이렇게 떨

어져서 보니까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불편심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존재로 아주 딱 보이죠.

 

# 나 하나만 떼어 놓고 보면 불완전한 존재로 보인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아까 이야기 했던 것처럼 모든 존재자들이 내 안에 다 들어와 있는 그

상황 속에서 그렇게 나를 알아듣는다면은 모든 존재가 다 들어와 있는 가운데 한 퍼즐의 조각

으로서, 한 단면으로서 이런 모양과 이런 생각, 이런 취향을 가진 존재의 모습으로 떡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 그러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옆에 있는 다른 존재자들과 전부 하나로 엮어

져 있는 가운데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알아들을 때 비로소 본래의 모습에서 완전한

내 존재를 알아듣는 거예요.

 

# 모든 존재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할 때 본래의 완전한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들이 이런 모양으로,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떡하니 앉아 있는 것을 "이게 난 대요!" 하고 고함을 질러대지마는 사실은 배우들의 배역에 불과

하다. 드라마 촬영할 때 드라마 속에서는 뭐 실연도 당하고,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사업에도 망

하고, 온갖 일들이 일어나죠.

 

그런데 드라마 실컨 촬영하고 집에 돌아가서 편하게 자기 옷 갈아 입고 나면은 실연했다고 울

고불고 자살을 하니 마니 난리를 치다가고 자기 집에 돌아오면은 옷 갈아입고 느긋하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쉬고, 놀고, 즐기고 그러겠죠. 우리도 사실은 그런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본래의 내 모습은  불편심을 그대로 지켜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고, 봉사하면서 내

존재의 아름다움을, 창조의 목적을 그대로 달성하기 위해서 더욱 더 유익한 것만 찾아서 계속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게 내 모습인 거예요.

 

# 완전하게 창조된 본래의 내 모습

 

그러니까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은 그만큼 중요해지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식 차원에서 인간은 이렇다, 저렇다 막 이야기하는 그것이 아니고 훨씬 깊은 차원에서

깨달음의 차원에서 이것들을 알아듣지 않으면은 안 된다 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차원에서 원리와 기초를 알으듣지 않으면은 안 된다.

 

# 머리와 지식이 아닌, 깊은 영(靈)과 깨달음의 차원에서 이해

 

여기에는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는 분석하고, 쪼개고, 나누는 그런 차원에서 더 들어간 깊은 영

(靈)의 차원, 존재의 차원에서, 깨달음의 차원에서 알아듣고 있는 그 깨달음의 차원은 존재의

이 넓은 바다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전부 하나를 이루고 있는, 그러면서 각

자 안에는 또 전부가 들어와 있는 이런 차원에서 스스로를 알아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 내

가 부유하고, 건강한 모습을 취하고 있을지 모르지마는 진짜 나는, 본래의 나는 배역의 이 나가

아니고 참된 나는,

 

이번에는 이런 모습을 다음에는 저런 모습을, 이전에는 아주 젊고 예뻤던 모습으로,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돼 가지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배역들을 바꾸어

함께 움직여 나가는 것. 여기에 대한 이해들이 필요하고 이점에 대한 깊은 자각 속에서 우리가

움직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 알아듣는 과정 이것이 영신수련의

과정이고 우리 인생살이의 과정이고, 영적 여정의 과정이고, 신앙생활하는 과정이 역시 이런

과정이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 본래의 참된 나를 이해하고 살아내려는 것이 영신수련의 과정이자,

  우리 인생 여정의 과정

 

그저 막  "믿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저것 달라고 고함질러대는 모습이 아닌 거죠. 그랬을 때 이

원리와 기초가 앞으로 구체적인 흐름들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는가? 원리와 기초의 구체적인

흐름은 첫째 주간, 둘째 주간, 셋째 주간, 넷째 주간, 그리고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이런 과정

을 거쳐서 진행 되죠.

 

# 원리와 기초의 구체적인 흐름

 

첫째 주간에서 진행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인 거예요. 좀 전에 우리가 원리와 기초

에서는 본래의 내 모습을 본다고 그랬죠.

 

# 「영신수련」[23] 원리와 기초 / 본래의 내 모습

  첫째 주간에서는 본래의 내 모습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

* 첫째 주간 :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 둘째 주간 :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보는 나

 

이 말은 배역으로서의 내 모습은 또 어떤가? 아무리 완전한 모습이 이렇게 돼 있다손 치더라도

본래의 내 모습이 있다손 치더라도 현실에 뿌리를 박고 내 자신을 키우나가고 움직이지 위해서

는 현실의 거점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 거점하는 것이 지금 여러분들이 이 모습, 이 생각,

이런 취향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여러분들의 이 모습들인 거예요.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어떻는가? 그런데 이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본래의 내 모습이라는

이 관점 속에서, 이중성의 관점 속에서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 속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으면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못 본다 하는 거예요.

  

못 볼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본다한들 맨날 반성이나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이

런 데에서 욕심이나 부렸고, 죄책감에만 깊이 빠져들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첫째 주간에 하는

작업이 아닌 거예요. 본래의  모습과 현재의 내 모습이 어떤 함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 첫째 주간 : 본래의 내 모습과 현재 내 모습의 어우러짐을 보며 기쁨과 위로

 

그러면서 내가 어떻게 고유한 내 아름다움을 통해서 전체의 드라마의 아름다움을 계속 펼쳐

나가고 있는가? 그것을 깊게 음미하면서 기쁨과 위로를 담뿍 맛보는 것. 이게 첫째 주간에 하는

작업인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하다 보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현실의 그저 타성에 젖은

그저 돈이나 밝히고 몸뚱아리나 챙기려고 그러고, 이러는 삶에 대해서, 일상의 삶에 대해서 깊

은 허무감이라고 그럴까? 건강한 의미에서의 허무감, 무상함

 

# 타성에 젖은 일상에 대한 무상감을 절실히 의식해야 한다

 

" 내 한편생을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괜찮은가? 인생이 이것 밖에 안 되는가? 이런 점에 대한

허무들이 우리 안에 많이 올라올 필요가 있다. 그냥 "아뇨! 이 세상은 너무나 좋은데요." 그렇게

헤~ 웃고 있어 가지고는 아다다와 같이 그렇게 웃고만 있어 가지고는 그게 능사가 아니다 하는

거예요. 아다다 하니까 아무도 안 웃네 ^^*~~ 백치아다다 ^^*~~

 

그런 것처럼 맹하게 넋빠진 가운데 웃고만 앉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삶, 그저 타성에 젖은, 매너

리즘에 빠져 있는 이 사람에 대한 깊은 무상함을 느끼는 거. 그리고 나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와

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내 존재의 근원 자리는 어디인가? 여기에 대한 깊은 불

안감, 이런 건강한 의미의 무상감이라든지 불안감 이것이 이 때 자리 잡으면 잡을수록 첫째 주간

작업을 깊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 첫째 주간: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내 존재의 근원은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둘째 주간에 들어가는 거예요. 둘째 주간에는 「영신수련」[91-98]

그리스도의 왕국 하는 것을 관상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 둘째 주간 : 「영신수련」[91-98]

   그리스도의 왕국 ㅡ 모든 미신자들을 데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 들어 가는 것

 

이 그리스도 왕국 하는 것이 모든 미신자들을 데리고, 과학적이 아닌 미신 그런 이야기가 아니

고 아직도 믿지 아니하는 사람 이 말이죠. 모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아버지의 영광

속에 들어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꿈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당신의 꿈. 우리의 꿈인

거예요. 우리는 아직도 완전히 통합된 깨달음을 깊게  일구어 낸 그 지평 위에 서 있지 못하다

보니까 어떤 면에서는 미신자들이죠.

 

그래서 이 미신자가 온전한 깨달음 속에 들어 가는 것. 그 지평에서 움직이는 것. 이중성의 구조

예수님의 관점 속에서 확실히 움직이는 것. 이게 아버지의 영광 속에 들어가는 것. 이게 우리의

목적인 거예요. 이게 둘째 주간에서 일어나고 셋째 주간과 넷째 주간에서는 수난과 부활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이야기 하죠. 그 한 사건이라고 이야기하는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중성의 원

리를 드러내는 거죠.

 

# 셋째 주간. 넷째 주간 : 이중성의 구조로 보는 수난과 부활

  ㅡ 수난과 죽음, 삶과 부활이 하나로 이어짐

 

수난 속에 부활이 깊게 들어와 있고, 부활 속에 수난이 깊게 들어와 있는 그래서 수난과 부활이

삶과 죽음이 하나의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이 과정을 거친다는 게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들이 한 차원 더 높게, 깊게 성장하는 계기를 이뤄내는 거예요.

 

* 셋째 주간. 넷째 주간 : 우리 존재들이 한 차원 더 높게, 깊게 성장하는 계기

 

그래서 수난과 부활이 일어나고 그 결과 이 세상 전체를 우리는 사람을 얻기 위한 관상 속에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 「영신수련」[200ㅡ207]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ㅡ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

 

모든 존재자들과 사건들 안에서 이중성의 구조를 발견해 내고 하느님의 현존을, 활동을 읽어

드리는 거예요. 이럴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지평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깊에 알아들어지면서 그렇게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의 여정은 거기를 향해서 지금부터

또박또박 걸어갈 거예요.

 

따라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좀 어려운 이야기나 개념적인 단어들이 나왔는지 모르지마는 현학

적인 지식 놀음 하자는 거 절대 아니고 전부 다 이것을 좀 더 생명을 길어 올리고 평화롭게 더욱

더 큰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기 위한 현실적인 목적 속에서 쭈욱 논의를 해 온 것이고 그렇게 움

직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인 거예요. 그래서 이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와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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