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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제14강 세 부류의 사람들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05 조회수3,311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한국clc에서 [이냐시오 성인이 평신도에게] 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성바오로 출판사

 

평화방송 다시보기

http://web.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5653%26menu_fid%3D5657&program_fid=5653&menu_fid=5657&cid=&yyyymm=

 

유시찬 신부님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14강 세 부류의 사람들


1. 세 부류의 사람들 : [149~157]

 

1.1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
    - 원하기는 하되 아무런 수단도 쓰지 않는 사람

1.2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
    - 자기의 뜻에 하느님께서 맞춰 주기를 원하는 사람

1.3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
    - 오직 하느님의 뜻에만 따르는 사람

 

2. 세 단계의 겸손 : [164~168]

2.1 첫번째 단계의 겸손
    - 죄가 되지 않는 한 자기 방식에 좇아 사랑하는 단계

2.2 두번째 단계의 겸손
    - 불편심에 입각한 사랑의 단계

2.3 세번째 단계의 겸손
    -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은 사랑의 단계


 

 

# 오늘 이야기 ...

우리 모두는 좋은 생각과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살아가죠. 그런데 그것을 어떤 식으로 자기

삶 속에서 실현해 내면서 나가는가?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이냐시오 성인께

서는 말씀하시는 거예요. 첫 번째 부류는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있되 아무런 실질적인 행동

은 하지 않는 사람. 두 번째는 뭔가 이렇게 애쓰면서 나아가되 자기 것에 맞추어서 하느님을

끌어 당기는 사람.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하느님의 뜻에 쫓아

서 나아가는 사람. 이렇게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들 자신은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예요. 

 

#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이 여정에 함께 하시면서 필요한 용기와 힘들과 지혜를 더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둘째 주간의 작업을 통해서 더욱 더 깊이 당신을 알아듣고 더 많이 사

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당신의 꿈을 알고, 당신의 계획을 알아듣는 지금 저희들이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묵상들을 통해서 제대로 알아듣고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

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지난 시간... '두 개의 깃발' 묵상

 

이 둘째 주간 전체를 이렇게 보면은 지난 번에도 이야기 했지마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관상부터 시작을 해서 그다음에 [91-98] 천주강생, 예수님의 탄생 이런 것들을 보고나서

그다음에 12살 사건을 중심으로 보고나서 그다음에 [136-147]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을

했죠. 두 개의 깃발 묵상하고 나면은 이제 세례 사건부터 해 가지고 들어간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흘러가느냐 하면은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12살 사건에 대한 관상을

하고 나서 그다음에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을 해라. 이러면서 두 영의 움직임, 두 영 하

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과 루치펠의 영. 이 두 영들의 움직임을 봐라. 

 

그런데 우리 12살 때 사건 잘 알지마는 성전에 이렇게 축제 때 올라가셨는데  ?예수님이 부

모님께,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혼자 딱 따로 남아버렸죠. 그래서 사

흘 동안 계속 찾으면서 애 먹으셨죠. 그래 가지고는 나중에 성전에서 떡 찾으니까 "얘아, 왜

에미 속을 이래 썩이냐?" 그러니까 "아니, 내 엄마쯤 되면은 그 정도는 알아야지 내가 아버

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몰랐냐?"고.

 

뭔가 12살 밖에 되지는 않았지마는 예수님 나름대로 당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나름대로 아버지의 뜻을, 하느님 아버지의 뜻

을 식별하고 그리고 거기에 따를 선택 작업을 한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뜻을

선택하고 식별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두 영의 움직임을 잘 봐야 된다.

 

# 두 영의 움직임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식별, 선택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과 루치펠의 영, 상반된 두 영의 움직임이 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영들의 움직임을 잘 살펴야지 각자가 그리스도의 영이 이끄는 방향과 루치펠의

영이 이끄는 방향이 다르다 하는 거예요. 그리고 지난 번에 두 개의 깃발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를 했지마는 전쟁이라는 개념을 쓰긴 했지마는 그리스도의 진영이 루치펠의 진영을

완전히 쳐부수어 없애 버리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은 곤란한 거예요.

 

그냥 인격화시키고, 상징화시키고 이러다 보니까 전쟁이라는 그런 의미를 가져왔을 뿐이

지 이것(루치펠)을 완전히 쳐없앨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닌 거예요. 우리 오늘 강의 끝나

고 다음 주 강의 때부터 영의 식별에 대해서 한 3회에 걸쳐서 좀 더 깊게 볼 거예요. 영적

식별 문제. 영적 식별 때 더욱 더 깊게 다루긴 하겠지마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깃발하고 루치펠의 깃발은 우리 안에 혹은 이 사회 안에

마치 음과 양처럼 이게 그리스도의 영이라면은 이거는 루치펠의 영인 거예요. 이런 식으로.

 

 

 

혹은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가 다음에 영의 식별에 들어가면은 이거는 선신이라고 그러고,

루치펠은 악신이라고 그러죠. 안에 뒤엉켜 있는 거예요. 이것을 한쪽을 없애버리면은 반대

편도 죽는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들일 것인가? 어떻게 서로 간에 보

완 협조하는 가운에 참된 생명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가?

 

# 두 영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참된 생명의 길로

 

여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두 깃발, 두 진영의 싸움이다 해 가지고 한쪽을 완전히 죽여 없

애 버리자는 이런 이야기 아니다 하는 거예요. 이걸 염두에 두는데 이런 영들의 식별을 통

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작업이 가능해지는 거예요.

 

# 그리스도의 영과 루치펠의 영의 식별 -> 하느님의 뜻을 식별, 선택

    * 영의 식별 : 마음 속의 움직임을 보는 것

 

그래서 영들의 식별 이러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내면의 움직임들. 영들의 식별

그러니까 뭐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죠. 안에서 보면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면은

막 미워하는 마음 안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걸어가려고 하는가 하면은 막 게으름 부리고

나태해지려고 하는 이런 마음. 이런 여러 가지 움직임들이 우리 안에 고대로 녹아들고 있죠.

 

그리고 이 움직임들을 어떻게 제대로 통합시켜 내면서 조화와 균형을 이뤄내는가? 여기에

우리 개인들의 삶이 행복으로 갈 것인지 불행으로 떨어질 것인지 전부 판가름 나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 사회가 어떻게 바람직한 사회로 가는

가? 그렇지 못한 사회로 가는가? 전부 결판이 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근본적인 핵심을 이

냐시오 성인은 예수님께서 두 영의 ?대립으로 보셨다 이렇게 이해하시는 거예요.

 

# 두 개의 깃발 싸움 : 예수님이 바라본 세상의 근본 원리

 

그래서 두 개의 깃발 묵상들을 했던 거죠. 그러면은 선택 작업이 이렇게 들어가는데 그래서

이제부터는 중요한 이슈 하나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거예요.

 

■ '하느님의 뜻' 식별과 선택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듣고 선택하고 살아갈 것인가? 그런데 전에도 이야기 했

지마는 이때 하느님의 뜻 하는 것은 그저 우리랑 별개로 지엄하신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면

서 그분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 우리 각자의 고유한

생명, 그것을 키워내는 길 혹은 방법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이거죠. 그것 찾아가는 거예요.

 

# 하느님의 뜻: 우리 각자 고유한 아름다움을 키워내는 길

 

그러기 위해서는 영들에 대한 식별, 우리 안에 내면의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

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영과 루치펠의 영, 선신과 악신. 이런 대립 구도로 긴장

과 갈등 구도를 잘 읽어드리고 조화와 균형을 잡아내는 방법. 이 영적 감각. 영적 줄타기를 ?

할 수 있는 그런 기술. 이런 것들을 우리가 몸에 익혀 가는 것.

 

그랬을 때 자칫 얼핏 봐서 좋아 보이는데 계속 따라가면은 옆길로 떨어지는 그런 어떤 속임

수에 빠지지 않도록 이런 것들이 두 개의 깃발에서 봤고, 그 비전에 따른 청사진도 봤고, 거

기에 따라서 실행들도 쭉 일어났고, 영들의 움직임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여기도 쭉

봤고.

 

                         영신 수련 둘째 주간

 

*   그리스도의 나라                       그리스도의 꿈

*     천주 강생                          꿈에 대한 청사진

*     예수 탄생                              꿈의 실행

*   두 개의 깃발                        두 영의 움직임

 

이냐시오 성인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제 영신 수련 둘째 주간에 들어

와서 한 4일 정도에 걸쳐서 여기까지를 전부 보게 되는 거예요. 둘째 주간 딱 들어오자마자

아주 무겁고 중요한 묵상 내지 관상 테마들을 전부 다 던져버리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부터 8일 정도를 세례 사건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복음 관상을 하기

시작하죠. 조금은 여유로운 가운데 좀 더 깊게 예수님께 젖어드는 거예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우리 그런 이야기 했죠.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관상에서 [98]번

기도 같은 것이 지성이나 의지 차원에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두 개의 깃발에서 보는 것이

그저 단순히 지성 차원에서 옳은 것, 그른 것 따지고 의지력을 뭘 이쪽으로 가야 된다.

그리스도의 진영으로 가야 된다. 루치펠의 진영을 배척해야 된다. 이래가 무슨 의지력으로

결심한다 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영의 차원에서 깊은 움직임들을 알아 들어야 된다.

 

# 둘째 주간의 묵상과 기도는 의지가 아닌 영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둘째 주간 전체가 은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영의 차원에서, 깊은 데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우리가 깊게 알아 듣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까지 이런 모든 것들을 여러분한테 다

알려줬다. 이냐시오 성인은 그런 식인 거예요. 여러분들한테 예수님의 꿈도 주었고, 계획도

가르쳐 주었고, 그에 따를 실행도 가르쳐 주었고,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영들의 양상 이

것도 다 가르쳐 주었다. 이제 여러분들한테는 더 이상 숨기거나 가르쳐 줄 것이 없다. 다

알게 된 여러분들이 이제 그렇다면은 행동을 어떻게 취하겠느냐? 이게 오는 보고자 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 하는 거예요.

 

'세 부류의 사람들'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보니까 이냐시오 성인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고 보신 거예요. 세 부류의

사람들.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인가라고 묻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나뉘는데 첫째 부류, 둘

째 부류, 셋째 부류 이렇게 나뉘는데 첫째 유형, 둘째 유형 그래도 되겠죠.

 

# 영신 수련 [149-157] 세 부류 사람들에 대한 묵상

 

뭐라고 이야기를 해 놓는가 하면은 그저 뭐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서 돈이 엄청 많이 생긴

거예요. 이 영신 수련 책에 보면은 '일만 독가도' 원문에는 그래 돼 있다고 그러죠. 일만 독

가도인데 최소한 1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정제천 신부님이 얘기 했는데 엄청난 돈이

이렇게 생긴 거예요.

 

그런데 세 사람 다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런 돈 같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똑바로 걸어가고 싶은 이런 열망들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보통의 신자들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쫓아

서 올바르게 살고 싶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까 돈이 잔뜩 생긴 거예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은 그 유혹에 떨어질 건대 그런 것들을 막으면서 어떻게 걸어갈 것인

가? 그런 상황 설정으로 떡 해 놓는 거예요. 그래 놓고는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거예요.

 

# 첫째 부류의 사람들 : 원하기는 하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자기 영혼 구원을 위해서 뭔가 특별한 조취를 취하지

않고 그저 바리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면서. 이게 첫째 부류의

사람들.

 

#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 : 자신의 뜻에 하느님의 뜻을 맞추려는 사람

 

이 사람들도 역시 올바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많은 돈이 있으면은 이 돈을 가지고

"에이, 내 멋대로 좀 써 봐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예요. 올바르게 써야지 그러

면서 올바르게 쓰고,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광도 그러내고 내 영혼도 구원해야지 이러는 거

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그 돈을 돈에 대한 집착을 놓지는 않는 거예요.

 

그 돈을 내가 쥐고 있으면서 그러면서 올바르게 걸어가야지, 돈을 올바르게 써야지. 이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른다 하는 것 보다는 내 뜻이 ?먼저 앞

서는 거예요. 내 뜻이 있고 그래서 하느님, 당신을 위해서 내가 이 돈의 일부를 떼 가지고

예수회에다가 기부를 하려고 하는데요. 그리고 교육의 혁신을 위해서 서강대학교에도 기부

를 하려고 하는데요.

 

당신도 이거 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이죠? 그러면서 돈을 툭툭 떼 가지고 쓸려고 하는 거

예요. 그럼 이거는 하느님께서 진짜 그것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과 맞을 수도 있지마는 안

맞을 수도 있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내가 이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이야 하고 추량을 하면서

내식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하느님은 내 뒤쫓아 오면서 거기다 결재 도장 찍어주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인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세 번째 부유의 사람은,

 

# 셋째 부류의 사람들: 오직 하느님의 뜻에만 따르는 사람

 

내가 어떻게 돈이 이렇게 생겼는데 돈에 대한 집착 내지는 애착도 완정히 놓은 거예요. 돈

을 누가 가져가겠다 이러면은 하느님의 뜻만을 찾고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은 돈을 누가

가져가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거예요.

 

오직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된다면은, 봉사가 된다면은, 이거 말 바꾸면은 하느님께서 원

하시는 내 자신의 아름다움과 생명을 키워내는데 참된 길이라면은 돈을 내가 가지고 있어

도 좋고, 돈을 내 놓아도 좋고, 돈을 여기에 써도 좋고, 저기에 써도 좋고, 이렇게 움직이는

사람이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인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 여기서 어떤 사람입니까? 이렇게 묻는 건대 사실은 두 번째 부류하고 세

번째 부류하고를 이렇게 보면은 중요한 테마가 떠오르는 것이 불편심의 문제인 거예요.

 

# 불편심(不偏心):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

 

이 불편심이라는 단어 생각나죠? ?전에 원리와 기초 하고 이랬을 때 했던, 거기에 나왔던

단어. 뭐 질병보다 건강을, 모욕보다 명예를, 가난보다 부귀를, 단명보다 장수를 더 원하지

않을 것이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 이런 이야기였죠.

 

여기에 이렇게 보면은 두 번째 단계의 사람은 비록 하느님의 뜻을 쫓아서 살아내려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하는 뜻이 우선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이거는 불편심을 잃어버렸다고 생각이 되는 거예요. 이 불편심 하는 이 문제는 좀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마는 둘째 주간 전체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성령의 활동 속에서

전개되는 작업들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죠.

 

여러분들 두 개의 깃발 지난 주에 강의 했던 거, 두 개의 깃발만 이렇게 떠올려도 거기에

면은 가난과 부귀, 모욕과 명예 이런 이야기들을 했었죠. 그런데 이게 우리가 보통 가난

사람과 부유한 사람 그런 식으로 상대적으로 갈라놓은 그런 의미의 가난이 아니다 그랬죠.

여기에서는.

 

# 부귀나, 명예나, 오만이나 이런 것은 전부 나 중심으로

 

그래서 상대적으로 차별화 시켜내는 세상의 논리인 그 중심을 향한 움직임들이죠. 거기에

비해서 이것은 가난, 모욕까지 다 포함한 부귀를 끌어안은 가난, 명예를 끌어안은 모욕, 오

만을 끌어안은 겸손. 이런 점에서 이쪽 부분(가난, 모욕, 오만)은 이미 여기 가난에는 현실

적으로 내가 가난하냐, 상대적인 지평에서 가난하냐, 부귀하냐? 그런 것들을 뛰어넘어 벌

렸다고 그랬죠. 내가 명예를 갖고 누리고 있느냐, 모욕을 당하고 있느냐? 그거 뛰어 넘었다

고 그랬죠.

 

그 말은 이런저런 쪽에 역시 사로잡히지 않는다 하는 말이고 그 말은 결국 역시 불편심인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다음에 복음 관상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될 때 복음 관상 기

도로 관상을 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어떤 점을 이끌어주시는가? 그

점에 있어서 완전히 놓여있는 자세.

 

# 성령의 은총 안에서, 영적 차원에서, 불편심으로

 

이런 점에서 세 부류의 사람들 하는 것도 불편심의 차원에서 깊게 알아들을 문제지 "그래,

내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이 길로 가야 된다. 그런 식으로 무슨 의지적으

로 내가 결심한다 이래 가지고 세 번째 부류를 갈 수 있고 이런 것들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 불편심(不偏心)으로 세 부류의 사람들을 이해

 

그래서 그냥 여기 무슨 10억, 100억 많은 돈이 생겼다 이랬을 때 당장 그저 잠깐만 생각해

봐도 능해 알 수 있죠. 그런 돈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을 그렇게 쉽게 놓을 수 있는가? 결심

하고 "그래, 이거 놔야지!" 이런다 해 가지고 돈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는가?

 

여러분들이 모욕에 대해서 그런 모욕, 예수님께서 달게 받으셨으니까 나도 달게 받겠다.

그렇게 결심한다 해 가지고 현실적으로 누가 나를 모욕하고 업신여길 때 태연하게 그게

소화가 되는가? 이런 문제들을 훨씬 깊은 차원에서 성령에 의해서 감도되지 않으면은, 성

령의 기운이 우리를 사로잡으면서 변화싴켜 내지 않으면은 안 되는 문제들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첫 번째 부류는 우리 존재의 깊이 차원에서 보면은 이거는 거의 어떤 생명력 같은

것이 약간 무기력증에 떨어져 있는 사람인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이 첫째 부류 이게 가장

어려운 문제죠. 우리도 간혹 이렇게 보면은 머리로 다 알고, 뭘 원해야 될지도 알고 또 자

기 딴에는 난 이렇게 살고 싶다, 저렇게 살고 싶다 하는 그런 바람이 다 있고 그럼에도 불

구하고 안에서 정말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살아있는 기운, 움직임 이런 것들이 약한, 생

명력 자체가 아주 얕은 이런 사람들 가끔 보죠.

 

이 병 중에 큰 병이다 싶고 바라는 게 있고 막 움직이는 놈이 있어야 "야, 이놈아, 그쪽으로

갈 게 아니고 이쪽으로 와야 된다." 뭐 이렇게라도 하지. 머리로만 빙글빙글 생각을 하지 손

끝 하나 까딱 안 하고 가라 앉아 있는 이런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는 이거는 진짜 어렵다 싶

어요.

 

어쨌거나 존재의 차원에서 첫째 부류는 깊은 무기력에 잠겨 있거나 떨어져 있는 이런 사람

이고, 두 번째 부류는 자기 뜻이 우선 된, 그러면서 하느님이 늘 자기를 쫓아오면서 추임새

주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리 되면은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우리는 아주 많이 볼

수 있죠. 그래서 이게 두 번째 부류 하면은 아주 형편 없는 사람들이 아닌 거예요. 우리 주

위에서 꽤나 열심히 제대로 신앙생활 잘한다, 영적 여정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 하는 사람

들에서 곧잘 벌어지는 모습이 이 모습인 거예요.

 

성직자, 수도자들 안에서도 곧잘 보이는 모습들이 이 모습인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이 하느님을 위해서 내 온 전신을, 자신을 봉헌하고 그래서 수도 생활을

야 되겠다. 성직 생활을 해야 되겠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움직여 나가는데 의지가 있고, 주위 여건이 괜찮고, 마음이 편안하고 할

때는 괜찮죠. 그런 식으로 쭉 나가다 상황이 비틀어지면은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

이라든지, 역경에 부딪치면은 자기 뜻을 뒤집어 엎어버릴 가능성이 아주 많죠.

 

요즘 와서 그냥 이혼하는 게 예사라고 그러죠. 뭐 3쌍 중에 1쌍 정도는 이혼한다 그러니까.

그런데 다음에 하느님의 뜻을 선택할 때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겠지마는 이냐시오 성인이

봤을 때는 우리가 선택을 뭘 하면은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결정들을 하죠. 번복할 수 있는

선택이 있는가 하면은 번복할 수 없는 선택이 있다는 거죠.

 

옷이야 한 벌 사 가지고 그냥 위에 셔츠가 마음에 안 든다. 세일 하는 맛에, 싼 맛에 샀더니

마음에 안 든다. 그러면 그냥 옷장 속에 쳐박아 버리면 되죠. 딴 사람들 줘 버려도 되고. 그

런 것들은 바꿀 수가 있지마는 결혼을 했다든지, 수도생활을 하면서 종신 서원을 한다든지,

평생 그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이런 선택들에 대해서는 번복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거죠.

 

그런데 세상도 많이 변했는데 요즘은 종신서원 하고 나서도, 신부가 되고 나서도 옷 벗는

거 그냥 심심치 않게 일어나죠. 결혼을 하고 나서도 수틀리면은 이혼하는 거 그냥 예사로

해 버리죠. 어쨌거나 그랬을 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심

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보니까 이것이 늘 우선이 되다 보니까 불편심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 불편심(不偏心)을 방해하는 개체적인 자아

 

다음에 하느님의 뜻을 선태갛고 식별한다는 이런 것들이 그런 작업들을 해 나갈 대 무엇보

다도 중요한 것은 이 불편심인 거예요. 불편심이 제대로 안 갖추어지면은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다 그냥 자기 욕심 차리면서 자기 뜻대로 하고, 자기 수틀리면은 얼마든지 뒤집어

엎을 수 있는 그런 식으로 흐를 위험들이 너무나 많죠. 그래서 이 두 번째 단계가 그런 것

인데 세 번째 단계는 여기에서는 뚜렷한 특징이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불편심을 갖추고

있는 거예요.

 

# 셋째 부류의 사람들: 불편심(不偏心)을 갖추고 있는 사람

 

돈을 가지고 있든, 안 가지고 있든, 이 일을 하든, 저 일을 하든, 어떤 것이든 괜찮다는 거

예요. 오직 하느님의 뜻이라면은,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되고 봉사가 된다면은 기꺼이 그

렇게 하겠다 하는 이야기인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것도 기꺼이 하겠다 하는 이게 나중에

겸손의 3단계 곧이 어서 이야기를 할 텐데 거기에 보면은 역시 겸손의 둘째 단계 하는 불편

심의 영역하고 연결이 되는 부분인 거예요.

 

그래서 불편심이라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한가? 그런데 이제 이런 기도들을 하고 나서 이냐

시오 성인은 마지막에 기도를 마무리 할 때 우리가 전에 묵상기도를 이야기 할 때는 기도

마무리하면서 예수님과 주로 담화를 해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죠. 그런데 지난 번에 두 개

의 깃발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그 부분이 설명이 누락이 됐었는데 두 개의 깃발 이야기를

할 때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 수련 책에 그래 놓은 거예요. [147]번에 그런 기도가 나오거든

요. 삼중 담화를 하라. 이래 돼 있는 거예요.

 

■ 기도하는 방법  [147] '삼중 담화'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전체를 해 나가면서 대단히 중요한 대목에 부딪칠 때는 그리고

이 은총은 반드시 얻어야 된다 하는 이런 생각이 들 때는 삼중 담화를 하기를 요청하시는

거예요. 그 삼중 담화 하는 것은 먼저 성모님과 담화를 하고, 성모님과 담화를 하고 나서,

성모송을 한번 외우고. 그다음에는 예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담화를 하고, 역시 그리스도

의 영혼 하는 그것을 한번 외우고. 그다음에는 성부께 기도하는 것. 성부께 담화를 하고 나

서 주의 기도를 바치는 거.

 

# 삼중 담화

* 성모와 담화, 성모송   * 성자와 담화, 그리스도의 영혼 기도   

* 성부와 담화, 주님의 기도  

 

이렇게 삼중 담화 이러는데 이거는 그냥 우리의 어떤 심리적인 요인이라고 그럴까, 현실에

서도 일어나는 그런 모습들이죠. 자녀들이 아버지한테 가서 직접 뭔가 청을 드릴라 할 때

아버지는 좀 엄하시고, 요즘 아빠들은 안 그런 것 같기도 한대. 저희들 때만 해도 아버지

이러면은 한참 어려운 분으로 주로 자리매김 돼 있죠.

 

뭔가 필요한 게 있는데 내가 직접 가서 아버지한테 이거 해 주십시오. 저거 해 주십시오 하

려니까 혼날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를 살살살 꼬득이는 거예요.

"엄마, 엄마, 이거 얘기 해 줘." 그래서 엄마의 힘을 빌려 가지고 아버지로부터 내가 얻고자

하는 뜻을 이뤄내는 것. 그것을 마치 우리 영적인 기도에 있어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

리고 성모님께 대한 그런 관계성 속에서도 그것을 고대로 써라 하는 거예요.

 

내가 직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것 좀 해 주십시오. 이러려니까 그냥 간도 옴찔옴찔

하고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모님께 먼저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먼저 나를 위해서

성자께 그리고 성부께 이것 청좀 드려 달라고, 내가 이야기 하면은 성부께서 꼭 안 들어 주

실지 모르지마는 성모님이, 어머님이 청을 놓으시면은 성부께서 들어주실 가능성이 훨씬

높은 거 아닌가?

 

그래서 성모님과 담화를 좀 하는데, 물론 이거 한 시간 기도가 끝나면, 자명종이 울리면서

한 시간이 됐다 그러면서 담화에 들어갈 때가 되면은 그때 성모님과 함께 좀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내가 두 개의 깃발에 대해서 뭔가 아직도 잘 못 알아듣는 게 있는데, 혹은 가난에

대해서 내가 영 마음이 안 움직여지는데 나도 정말 정신적인 가난, 불편심ㅇ르 갖출 수 있

도록 그렇게 사람이 변화될 수 있도록 아버지께 좀 청해주십시오. 그러면서 어머님과 담화

를 좀 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성모님 손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께 가는 것. 성자께 가는 것. 그러면은 성자께

서도 혹시 내 얘기를 안 들어주시려고 하시다가 어머니 빽으로 어머니가 와서 "아이고, 얘

야, 좀 보나벤뚜라 이 놈이 저런 식으로 자꾸 원하는데 좀 들어줘라." 그러면은 우리 비근한

예로 카나의 혼인잔치 있죠.

 

"어머니, 아직 제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는데도 어머니께서 부탁하시자 예수님, 카나

의 혼인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것을 술을 넉넉하게 채워버리시죠. 어머니의 파워가 그 정도

로 강한 거예요. 그래서 성자께 또 담화를 하고, 그다음에 이제 한 손에는 어머니 손 잡고,

한 손에는 예수 그리스도 손 잡고 든든한 양쪽 빽을 대동해서 성부께 최종적으로 나아가는.

그러면은 성부께서 안 들어 주실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이런 은총을 꼭 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 때는 삼중

담화를 해라. 대표적인 게 두 개의 깃발인 거예요. 그토록 중요한 거예요.

 

# 삼중 담화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은 은총을 청하도록

 

영들의 움직임을 분별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혜요, 힘이

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은총을 청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세 부류의 사람들, 그런 모든

인식의 바탕 위에서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이것하고 직결되니까 세

류의 사람들에서도 역시 여러분들은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해라.

 

그런데 삼중 담화 하는 이것도 그저 그냥 빽을 대동해 가지고 내 목적을 관철 시켜야지. 그

런 어떤 너무 막 세속적인 조폭 같은 그런 무슨 관점이라기 보다는 그정도로 내 안에서 원하

는 바가 간절한 거예요.

 

# 절심함이 담긴 삼중 담화

 

삼중 담화를 할 정도로 내가 절실히 원하고 있는. "너 정말 원하느냐?" 이래 물었을 때 "예,

그렇습니다." 하는 그 표시가 바로 삼중 담화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두 개의

깃발에서 그리스도의 진영의 깃발에, 참된 영의 움직임에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저를 변화

시켜 주십시오 하는 것은 머리로만 대충 원하고 이게 옳으니가 저길로 가야 된다. 이래서

입으로만 원하고 있고, 그래 가지고는 도대체가 은총을 받을 수가 없을 거다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무슨 성모님 빽 동원하고, 성자 빽 동원한다 해 가지고 이루어질 턱이 없죠.

 

내면의 깊은 곳에서 진짜 뭘 원하는가? 절실히 원하는가? 이런 점들이 전부 바로미터가

되고,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가 올바로 청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청하고, 원하시고 걸어

가셨던 것을 우리도 정말 하기를 원하는지 이런 점에 있어서 계속 스스로를 점검해 보고

따라갈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이런 바탕 위헤서 그다음에 우리가 겸손의 3단계를 보는데

 

# [164-168] 겸손의 3단계

 

영신수련 책으로 치면은 [164-168]에 겸손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

렇게 겸손의 3단계 이래 놓는다 해 가지고 이 겸손을 아, 유신부는 아주 똑똑하고, 핸섬하

고 그런데... "타이밍이 맞게 웃음이 탁 나와야지 한참 생각을 해 보고 이걸 웃어줘야 할 대

목인지, 아닌지 그러고 있어 가지고야." ^^*~~~ 한참 똑똑하고 잘생기고 그랬는데 인간이

참 겸손하다. 이런 식으로 보통의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 사람 겸손하다, 아니다 하

는 그런 차원하고는 좀 다른 이야기다 싶은 거예요.

 

그런 식의 겸손이라가 보다는 사랑의 3단계라고 알아들으면은 별 대차가 없겠다 싶은 거예

요. 그러면서 1단계의 겸손, 2단계의 겸손, 3단계의 겸손 이것이 있는데 이냐시오 성인께서

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전제 조건을 갖추어야 되는데 적어도 겸손의 둘

째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은 들어갈 수가 없다. 이래 돼 있는 거예요. 이 둘째 단계 하는 것

이 불편심의 이야기인 거예요. 영신 수련 책을 보면은 첫째 단계, 1단계의 겸손이죠.

 

* 영신 수련 [165] '첫째 단계의 겸손'

첫째 방식의 겸손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데, 우리주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하

나를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 되게 한다 할지라도, 혹은 내 목숨을 건지기 위해

서라도 신법이나, 인간이 정한 법에서 대죄로써 의무 지어진 계명을 고의로는 하나라도

기지 않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 내 구원을 위해서 대죄는 하나도 범하지 않는다 이래 이야기를 떡 하느 바람에

마치 1단계는 대죄를 안 범하면은 1단계의 겸손이고, 2단계는 소죄를 범하지 않으면은 2단

계의 겸손이다. 이런 식으로  종래는 이야기를 좀 해 왔는데 이런 식으로 알아 들으면은 곤

란하죠. 요즘 와서는 그렇게 잘 안 하는 것 같애요. 몇십 년 전 이야기들이죠. 둘째 방식은

이래 놨어요. 첫 번째 보다 더 완전한 겸손인데,

 

* 영신 수련 [166] '둘째 단계의 겸손'

둘째 방식은 첫 번째보다 더 완전한 겸손이다 ... 가난보다 부를, 불명예보다 명예를, 단명

보다 장수를 더 원하지 않고, 거기에 마음이 더 끌리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고자 한다. 그리

고 더 나아가서 온갖 피조물을 두고서나, 혹은 내 목숨을 잃는 일이 있더라도 고의로 소죄

하나라도 범하지 않는 것이다.

 

이리 이야기를 떡 해 놨거든요. 그래 놓으니까 대죄도 안 범하면은 1단계의 겸손이고, 소죄

까지 아주 경미한 죄까지 범하지 않으면은 2단계의 겸손이다. 이래 이해를 하는데 그렇게

해석 하면은 곤란하다. 두 번째 단계 뒤에 뭐 소죄 이야기가 나왔지마는 고 앞에 뚜렷하게

나왔던 게 불편심에 관한 이야기죠. 이 말인 거예요.

 

 

 

1단계, 2단계, 3단계. 이 사랑이 점점 깊어지는데 1단계는 무슨 소리인가 하니까, 내 식으로

사랑하는 거예요. 죄가 되지 않는 이상은

 

# 첫째 단계의 겸손: 죄가 되지 않는 한,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는 단계

 

나는 가난하게 살든지 이런 것은 진짜 싫다. 내가 능력도 있고, 열정도 있고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일해 가지고 돈 많이 벌어서 그걸 가지고 교회에도 기부도 하고, 서강대학교에도 기

부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열심히 살겠다. 그런다 해 가지고 그게 잘못됐다든지, 나쁘다든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없죠. 그냥 그것도 나름대로 사랑이고 괜찮죠.

 

데이트를 하는데 나는 그냥 아주 고급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칼질을 하면서 그렇게 식사

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데이트 하는 여자애는 오히려 그런 것 참 싫어하고 그저 된장

국에 밥 말아먹는 거 그런 걸 좋아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따라 오라고, 내 좋은

식당 알아 놨다고. 그러면서 데리고 가서 멋있게 차려 놓은데 여자애는 그저 칼로 이렇게

장난이나 치고, 깔짝깔짝 거리고 있으면은,  

 

너, 이렇게 이놈아, 이게 얼마짜리 스테이크인지 아냐고. 왜 안 먹고 이러느냐고. 그런 식으

로 여자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 정도의 사랑의 깊이인 거예요. 그런데 보리 흉년에 그게 어

디예요. 두드려 패고, 욕하고 하는 남자들도 적잖게 있는데, 좋은 것 먹여 주고.

 

여자애는 늘 청바지에 티셔츠 좋아하는 거예요. 그런데 에이, 뭐 여자가 청바지 하고 티셔

냐 하며 따라오라고. 이래 가지고 멋있는 원피스, 투피스, 정장들 탁탁 입게 만들고. 그것도 

사랑이고 나름대로 좋은데. 그리고 그게 나쁘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식으로 사랑

하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는 여기에는 이제 불편심이 등장했죠.

 

# 둘째 단계의 겸손: 불편심(不偏心)에 입각한 사랑의 단계

 

나는 진짜 청바지 입고, 티셔츠 입고 다니는 거 질색인데 여자애가 하도 그걸 좋아하니까

그래, 마 그거 입어라. 나는 그냥 양식을 먹으면서 분위기 있는데서 고급스럽게 있고 싶은

데 그저 칼국수 찾고, 무슨 김밥 찾고, 그래서 분식집에 가서 같이 먹는 것. 그래, 먹어라.

네가 원하는데. 그 사랑이 되면은 이건 사랑이 좀 깊어져 있는 사랑이 아니냐 하는 거예요.

상대방에 촛점이 가 있죠.

 

그런데 세 번째 사랑은 이건 또 내식인 거예요. 내식인데 1단계의 사랑하고 다른 점은 3단

계의 사랑에서는 아예 당신하고 그냥 완전히 하나를 이루고 싶은 열망 속에서 내 고집을

하는 거예요.

 

# 셋째 단계의 겸손: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은 사랑의 단계

 

먹는 걸로 이야기를 한다면은, 1단계는 상대방은 양식 싫어하는데 데리고 가서 양식 먹였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놈이 그저 칼국수 좋아하고 그러니까 그래, 난 네 따라간다. 그런데

너는 칼국수 먹어라. 나는 칼국수는 싫으니까 순두부 먹겠다. 그래 가지고 한식집에 가서

사이좋게 니는 니 거 먹고, 나는 내 거 먹고. 그 상대방을 기준으로 볼 때 사랑의 깊이에서

볼 때는 상대방에 대한 더 깊은 배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가는 거 이런 차원에서 좀 더

깊은 사랑인 거예요.

 

그런데 세 번째 단계에 딱 오면은, 나는 진짜 칼국수 싫어하는데 쟤가 칼국수를 좋아하니까

나도 들어가서 나도 똑같은데요. 이래 버리는 거예요. 완전히 하나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가난하셨던 것처럼 나도 가난하게 되기를 원하고, 예수님이 모욕을 받으

던 것처럼 나도 모욕 받기를 원하고, 아예 카피를 뜨듯이 완전히 동화되어 버리려고 하는.

그 사랑은 훨씬 깊은 사랑이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데 있어

서 적어도 두 번째 단계의 겸손 내지는 사랑에 도달하지 않으면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없다.

 

# 적어도 둘째 단게의 겸손에 도달해야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다

 

이거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 아니냐 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자기

뜻은 뒷주머니에 딱 질러 놓고 하느님, 당신 뜻 보여 주십시오. 그래가 내하고 맞으면은 그

뜻 찾아가고 아니면은 난 내 뜻대로 가겠습니다. 내 뜻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1단계에서처럼

딱 붙들고 있으면은 그러는 사람한테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 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거예요.

 

자녀들이 신부가 되겠습니다. 수도자가 되겠습니다. 이러면은 교회 입장에서 보면은 아름답

고 좋은 일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점에 대해서 자기 고집이 딱

있어 가지고 나는 반드시 이 길 가고 싶다. 이래 되면은 과연 그 사람이 신부가 되고, 수도자

가 되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인지, 하느님 뜻에 맞는지. 장담 못하는 거죠. 하느님

딴 생각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는 것.

 

# 내 뜻을 내려 놓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그래서 그분의 뜻을 통해서 밝혀지는 것. 그것 쫓아가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적어도 불편

심을 닦아야 되고, 더 깊은 사랑에까지 나아가야 된다. 그런데 이 겸손의 3단계 하는 이 부분

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깊게 생각하고, 깨달아야 된다.

이래 돼 있거든요.

 

즉 피정하는 동안에는 기도 사이사이 쉬는 시간에 내가 과연 겸손의 몇 단계에 와 있는지 좀

살펴봐야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가 두 개의 깃발까지 하고 세 부류의 사람들, 자기의 행

동 양식까지 딱 하고 나면은 거기까지 기도를 끝내고 나면은 내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어

느 정도다 하는 것이 그대로 자동으로 성적표가 딱 매겨지는 것 아닌가?

 

그래서 지금까지 움직여 온 것은 세 부류의 사람들에서는 둘째 부류다 떡 해 놓고는 겸손의

3단계에 와서 두 번째 단계에 와 있는데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은 엉터리죠. 세 부류의

사람들에서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에 들어가야 겨우 불편심을 갖춘 둘째 단게의 겸손에 도

달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셋째 부류의 사람이어야 불편심(不偏心)을 갖춘

  둘째 단계의 겸손 가능

 

이런 모든 것들이 은총 속에서, 성령의 움직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깊게 알아듣고 인간의

훨씬 깊은 차원들을 바라보고 걸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이 모든 깨달음을 성령의 은총 속에서 가능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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