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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는 미사 중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06-23 조회수1,148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5621/주일복음말씀묵상/ 나는 미사 중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마태18,18-22)

 

 

새로 부임하신 우리 본당 신부님은 나이도 지긋하시고 매사에 친절하시고 말씀도 간결하시며, 특히 미남이셔서 인기가 보통이 아니시다. 교회가 오랜만에 활기가 넘치는 것 같다. 좀 더 자세히 소개한다면 최근에 다른 곳으로 떠나신 신부님은 1년 반을 조금 넘기셨고, 바로 그 직전 신부님은 5년 이상을 채우셨다. 그러니까 새로 부임한 신부님은 약 6년 반 만에 우리 본당에 오신 분이시다.

5년 이상 계셨던 신부님은 소위 정의구현사제단의 일원으로서 강론 때마다 성경말씀은 제껴 두고 주로 제주도 강정마을과 쌍룡자동차 등등과 현 정권과 시국을 신랄하게 자기 식으로 비판하는 말들을 주로 하시면서, 온 세상 고민을 혼자 지신 것 같은 냉소적 표정 때문에 살얼음이 낀듯한 차가운 교회분위기였다.

 

또 바로 직전 1년 반 동안 계셨든 분도 정의구현사제단에 가입은 하지 않았지만 가입자와 거의 맞먹는 동조자였다. 늘 그들이 있는 현장에 달려가곤 했으며, 자신이 T.V 에 나오거나 감옥에 갈수도 있다는 무용담과 용기를 청중들의 분위기를 전혀 도외시한 채 수시로들려주시든 분이었다.

물론 성경말씀의 깊이나 넓이는 청중들의 수준을 마치 초등학생 수준으로 인식하시는듯 하였고,

이 그림은 우리 교구청의 상당한 분위기를 대표한다고 모두들 평가하고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교인들의 생명은 시들었고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나는 미사 중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시작 예식에서 말씀 전례, 성찬 전례와 영성체예식, 마침예식까지 거의 전 시간을, 1,2독서의 말씀 및 복음말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재해석과 묵상시간으로 대체하면서 미사시간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미사 예식과는 전혀 별개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빛이 있을 때에는 나 홀로 기쁨과 감사를 느끼며, 마침예식 후 묵주기도는 너무 의식적이라 마음에 와닫지 않으므로 언제나 빠지면서 바쁘게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미사시간에 말하는 이청중이 몸은 한곳에 있되 영혼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발견할 수 없는, 이미 사랑이 식어버린 부부의 모습과도 같고, 또 어린 시절 지긋지긋했던 수학시간에 경험했을 법한 선생님과 내가 서로 따로 노는 겉도는 수업시간과도 같은, 그러나 나에게는 실로 절망적인 상황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 미사 시간에 생명의 흐름이 없다는 말이다!

한번 냉철히 주위를 둘러보라! 사실 미사의 모든 절차가 의식과 겉모습에 치우쳐, 모양은 경건한듯하나, 진작 우리가 먹어야할 생명의 공급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상한 버릇은 절박한 생명을 찾으려 스스로 찾아낸 살기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나의 글들은 바로 이의 회복을 갈망하는 강한 몸부림일 것이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 미사)이다.

오늘 본당 신부님의 강론은 큰 남한이 작은 북한을 정치 혹은 이념에서 벗어나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해야한다는 총론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나의 고질화된 미사 중의 이상한 버릇이 자동적으로 발동하기 시작하였고, 언제나 수박 겉핥기 식으로 내용없이 슬쩍 넘겨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궁금증과 아쉬움, 그리고 말씀에 대한 지독한 배고프고 허기짐이 낳은, 곧 오늘 복음 말씀에 대한 묵상 내용을 청중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간절함으로, 그냥 또 나 같은 허기진 사람도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이 글을 올려보는 것이다! 아멘.

 

그러므로 혹 원하는 독자들은 성경을 펴놓고 함께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동참할 것이다!

오늘 본문 마태18,19-22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 절인 15-18절의 상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19절의 상반절의 그리스어 원문은 진실로 다시 여러분에게 말하노니”, “다시라는 낱말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태18,15-18절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죄와 혼란과 갈등과 세상과 이단이 만연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죄와 혼란과 갈등과 분열과 세상과 이단이 주님을 믿는 작은이들(little ones)”(마태18,6)을 위협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인가?

마태7,1-5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용인해도 되며 용인해야 하는가?

여기서 마태오는 이런 경우에 취할 절차의 순서를 정했는데, 기본 원칙은 죄인과 단 둘이 마주 앉아 사랑 안에서 형제적인 훈계를 하는 것이다(레위19,17-18 참조).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끝없이 용서할 자세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15,21-35, 5,24, 6,12 참조).

그러나 계속 훈계를 거부하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에는 다른 형제 한두 명을 동반시켜야 한다(16, 신명19,15 참조).

일이 더욱 악화되어 비상한 경우에는 그 일을 교회에 내 놓아야 한다. 최후 수단으로 축출이라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17). 곧 세리와 이방인(다른 민족사람)(5,47-48)이라는 낱말의 선택에는 유대적 내지 유대 그리스도교적 전통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17). 사실 예수님 자신도 바로 이 집단들에 대하여 다른 태도를 취하셨기 때문이다.

 

18절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너희는 복수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회를 말한다. 이는 교회 공동체의 전권을 뒷받침해 주며 그것을 행사한 결과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묶고 푸는 것은 성령의 권위와 통제 아래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요한20,22-23), 사람이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 자신을 신뢰하여 행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잘못될 것이라는 점이다.

 

19-20절은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지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앞에서 지적한 다시라는 단어는 앞부분에 이 구절을 연결시키며 새로운 의미를 첨가한다. 곧 묶고 푸는 것은 형제들(복수)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기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신약에서의 하라(do)”라는 권면과 지시는 반드시 성령과 함께하는 실행을 말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내 힘으로 행하는 율법과 행위로 변질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지 청하면은 성령과 함께하는, 성령과 일치하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기도와 선택을 의미한다!

 

21-22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77)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한 가톨릭성경은 잘못 번역되었다! 그리스어 원문 및 저명한 다수의 성경에 따르면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이를 바르게 수정해야만 한다!

 

그 당시 유대 랍비들은 죄를 세 번까지만 용서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베드로는 칭찬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던 것 같다.

일곱 번을 일흔 번”, 7(완전함)*7(완전함)*10(사람의 완전함)=490(완전히 완전함)이다. 주님의 뜻은 490번만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의 과오를 참회하는 자에게는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뜻이다!

 

오늘 복음말씀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두 가지만 적용해보자!

첫째는 마음을 모아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견해와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마음을 모아 합심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예를 들면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만일 한 사람은 하느님께 그 환자를 치료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으며,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할 수 있다. 동시에 세 번째 사람은 하느님이 그 환자를 질병을 통하여 징계하실 것을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와 혼합과 세상과 이단이 거대한 나무 안에 모두가 교묘히 기생하며 숨겨져 있어 언제나 겉모습은 별 탈이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가톨릭교회는 혼합과 세상과 이단으로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고 나는 말하겠다!

이러한 혼합과 세속과 이단 속에서 교회의 합심기도가 가능한 것인가?

오늘 교회의 혼합과 세속화와 이단에 대한 성찰은 생략한 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합심기도를 하느님은 기쁘게 받으실까?

오히려 의식과 겉모습과 구호로 교묘히 가려진 헛된 의식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우선순위는 이 혼합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교회가 쇄신되어야 한다!

 

둘째는 북한에 대한 문제는 용서의 문제와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지 못해서 분단이 고착화된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 북한을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은 용서의 차원이 아니다!

그러므로 북한집권세력들과 우리의 형제들인 북한주민들에 대한 기도는 완전히 달라야만 한다!

북한집권세력과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자에 대해서는 당연히 저주해야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적해야 하며(에페6,10-18), 북한주민에 대해서는 주님의 보호하심과 위로와 용기와 평화와 믿음을 기도해야 한다!

 

오늘 봉헌된 남북통일 기원미사와 마태18,19-22절의 용서가 주제인 복음 말씀이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또한 나는 왜 왜 대충 대충하지 못하고 이 모양일까?

또 어떤 사람이 자네가 하는 말은 성경과 틀렸다고 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도 이 생각, 저 생각을 골똘히 거듭하고 있다!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주일복음말씀묵상을 참고하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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