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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민중 신학적 해방신학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2-1)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07-26 조회수878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5726/주일복음말씀묵상/ 민중 신학적 해방신학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과 유대인들의 오해! (요한6,1-15)>

 

 

요한복음 6장은 파스카(유월절)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고(요한6,1-13), 물위를 걸어 갈릴래아 호수를 건넌(6,16-21) 표징(표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이적들을 체험한 유대인들은 예수가 세상에 오실 그 예언자라고 생각하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요한6,14-15). 그들은 예수의 이 이적을 신명기 1815절에 근거한 그들의 소망으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켜서 이스라엘에게 제2의 출애굽 구원을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예수가 이루리라는 표징’(표적)으로 해석하였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여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너게 하고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만나를 먹도록 한 모세와 같이 예수께서 제2의 출애굽 구원 또는 파스카 구원을 이루실 분이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표적을 해석했다. 첫 출애굽 때 시내 광야에서 하느님이 만나를 먹이셨듯이, 예수께서 첫 출애굽 구원을 기념하는 파스카(유월절)에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당연히 자기들의 신학적 관점에서 예수가 바로 신명기에 약속된 제2의 모세라고 생각하고, 모세가 이루었던 첫 출애굽을 재현한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 건너감(요한6,16-21)은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해석을 더욱 강화해 주는 것이었다. 신약성경 도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는 방도로 출애굽 모형이 사용된다. 출애굽 구원을 종말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하나의 모형으로 본 것이다. 공관복음서, 바오로 서신, 히브리서, 요한묵시록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의 구원의 완성을 가져오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모형인 모세의 역할을 완성하는 분이기에 모세보다 월등히 큰 분이심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요한복음도 예수를 꼭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보고 예수께서 이룰 구원을 출애굽 구원의 문자적 재현으로 보는 것은 잘못 해석한 오해라고 지적한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보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무리를 피한 것(요한6,14-15)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무리가 예수를 찾은 것이 예수의 이적이 표적하는 바를 제대로 깨달은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다(6,26)고 지적하는 곳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표적을 또다시 이 세상적 물질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이처럼 요한은 유대교의 정치적 메시아 사상과 물질주의적 구원관을 은밀히 배격하고 있다!

구원은 단순히 출애굽 구원의 문자적 재현이 아니다!

구원이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 정의의 실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영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해석을 오해라고 하며, 오천 명을 먹인 이적이 진실로 표적하는 바를 해석해 주신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출애굽의 구원을 문자적으로 재현하여, 정치적으로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자유를 가져다주고, 만나와 물과 같은 경제적 풍요를 주고, 시내 율법에 의한 사회 정의를 재현하는 메시아로 생각해서 예수를 붙잡고 모세와 같은 지도자요,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곧 자신들이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자유를 얻으려고 예수에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은 자신의 이적이 표적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오해라고 설명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은 그 표적을 보아서가 아니라 떡을 얻어먹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곧 오천 명에게 떡을 먹게 한 사건이 표적하는 바인 진리를 터득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예수를 떡을 얻어먹는 정도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세상의 물질적 구원으로서 다시 배고프게 하고 목마르게 하며 진정한 본질적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정한 영생, 곧 신적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만나를 먹은 출애굽 세대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죽고 없지 아니한가?(요한6,49)

결국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구원은 신적 생명인 영생을 보장하지 못한다!

 

떡 또는 빵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굶주린 오천 명을 먹인 것은 자신이 인간에게 생명을 줌을 표적한 것이다!

이것은 신적 생명인 영생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표적한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음으로 상징되는 출애굽 때의 구원이 모형론적으로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것의 문자적 되풀이가 아니고, 도리어 그 모형이 가리키는 것을 종말론적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형의 종말론적 완성이다!

 

모세가 가져다 준 출애굽 구원은 이 세상의 물리적 구원이었고 물리적 생명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가져오는 구원은 하늘의 영생, 곧 신적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 생명을 가능케 하는 떡은 세상적, 물리적인 것일 수 없고, 하늘로부터 오는 떡이어야 한다(요한6,27, 32-33).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런 생명을 가져다 주는 자라는 뜻으로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한다(35, 41, 48, 51, 58). 예수 자신이 하늘에서 온 진짜 실체의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며, 더 구체적으로 그 사람의 아들인 자신의 살과 피가 영생을 주는 양식이라고 한다(53-58).

예수 자신의 살과 피가 영생을 주는 하늘에서 온 떡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출애굽 구원이 모형하는 바를 종말론적으로 성취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처럼 출애굽 구원의 사회, 정치, 경제적 측면의 문자적 재현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이 표적하는 바는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신적 생명, 곧 영생을 가져오는 그러한 구원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이루어진다!

 

,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하느님의 의로운 새 백성 창조라는 사건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런 죽음의 의미를 최후의 만찬이라는 상징적 극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아담은 자기 스스로 하느님같이 되고자 한 죄를 범했다. 이는 하느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느님이 되겠다는 휴머니즘의 전형이다. 인간이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내재된 힘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살아가려는 아담적 실존이다. 그런데 이 아담적 실존은 피조물의 한계성, 곧 결핍성에 빠지게 된다.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부족하고 유한한 시간과 공간에 갇히게 된다. 여기서부터 모든 고난이 유래된다. 이 고난들은 죽음의 증상이다!

 

여기에 상응하여 성경은 구원을 이 세상의 삶과 질적으로 다른, 하느님의 무한에 참여하는 삶이라는 뜻으로 영생이라는 표현을 쓴다.

영생이란 문자적으로는 오는 세상의 삶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죄를 짓게 강요하고 죽음을 품삯으로 주는 이 세상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오는 세상의 삶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의 삶은 아담적 삶, 곧 인간적 결핍의 삶인데, 이것은 늘 죽음의 증상인 고난들로 누더기 진 삶이다. 그러나 영생은 신적인 삶으로서 죽음의 그림자 또는 그 증상들이 없는 삶이다. 하느님의 전지하심, 권능하심, 무한한 사랑, 무소부재함의 자유, 그리고 영원에 힘입는 삶이므로 생로병사가 없고 불안, 문제, 갈등 등이 없다. 충만한 삶, 곧 하느님적으로 충만한 삶이다.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구원이란 창조주와 다시 연결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무한하신 초월자 창조주와 연결되는 것, 그래서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 그래서 신적 생명인 영생을 얻는 것, 바로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께서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탈출24,8; 이사42,6; 9,8; 예레31,31-34)로서 행해지는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이다. 십자가에서 부스러진 몸()과 흘린 피가 우리 죄를 씻어 버려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주고, 새 언약을 세워 우리를 하느님 백성이 되게 하여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하느님의 부요함에 참여하게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렇게 하느님의 의로운 자녀가 되어 아담의 숙명을 극복하고 하느님적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는 하늘로부터 오신 떡(양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에서 부스러진 그의 살과 흘리신 그의 피가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 곧 영생을 주는 하늘의 음식인 것이다. 그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그 영생을 얻는다! (요한1,51)

 

요한복음 6장은 예수께서 이 약속을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인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리라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이것이 바로 출애굽 구원이 종말의 참 구원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인 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유월절에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고, 부활생명을 공급함으로써 우리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하고, 하느님의 자녀, 곧 상속자가 되게 한다는 것을 표적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창조주 하느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고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하여 신의 초월에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여 하느님같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하느님같이 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구원이다!

이 구원을 바오로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함’, 또는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함’, ‘하느님같이 됨’, 신적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구원은 피조물이 하느님과 연합(결합)되는 것이다!

예수가 가져오는 구원이란 바로 그런 구원이다!

옛 출애굽 구원은 진정한 구원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 구원의 그림자를 절대적인 구원으로 보고, 예수에게(메시아에게) 그것을 문자적으로 재현해 달라고 요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알렐루야! 아멘

 

 

* 쓰고자 하는 내용이 너무 길어, 1, 2부로 나눈 것이므로, (2-2)에서 이 내용이 계속 이어짐!

* 원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주일말씀묵상을 참고 하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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