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의 표징은 무엇인가?(2,1-11)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08-03 조회수1,723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581()/복음말씀묵상/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의 표징은 무엇인가?(2,1-11)

 

하나의 표징(표적, sign)이 완성의 새 시대를 알리기 위하여 시작된다. 갈릴래아 카나 지방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포도주가 떨어져서 잔치가 시들해졌다. 기쁨의 잔치가 시들해져 죽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만들어서 성대한 기쁨의 잔치가 된 사건이 첫 표징이다. “카나는 "갈대"를 의미하며, 갈대는 약하여 깨어지기 쉬운 사람들을 상징한다(이사42,3; 마태12,20).

 

21-12절에 나오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표징은 니코데모의 오해와 사마리아 여인의 오해에 대한 설명인데, 그것이 3장과 4장의 내용이다. 예수의 이적들이 나타내는 바인 위 세상의 진리를 아래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오해가 일어난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오해에 대하여 항상 길게 다시 설명하신다. 곧 자신이 행한 이적이 물리적인 사건이지만 그 물리적인 사건이 계시하는 바와 가리키는 실체로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해설하신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유대교 결례를 위한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워서 그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이것은 단지 결혼을 축복한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은 본문의 의도가 아니다!

카나 혼인 잔치의 표적이 진정으로 뜻하는 것은 예수께서 종말의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을 잔치로 비유했다.

시편 23편은 하느님의 백성이 악의 세력에게 쫓기다가 얻게 되는 하느님의 구원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 원수들이 지켜보는 데서 내개 진칫상을 배설하시어내 잔이 넘치나이다”(23,5). 다른 곳에서는 메시아 시대의 구원을 시온에서 베푼 아주 큰 잔치로 비유했다(이사25,6; 55,1-2).

 

그 이유는 잔치의 상징성 때문이다.

잔치라고 하면 풍요로움이 생각난다. 배불리 먹고 마신 뒤에는 기쁨이 있다. 또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있다. 이것이 바로 잔치라는 그림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연상들이다. 그러기에 잔치는 하느님의 나라의 구원을 상징하기에 적합하다.

 

사탄의 나라에서 인간의 삶은 결핍으로 특징 지워진다. 지혜가 모자라고, 능력이 없으며, 사랑이 없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사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이다. 그래서 항상 불만이 있고, 아픔과 슬픔이 있고, 사랑 대신 처절한 생존 경쟁으로 갈취하고 갈취당하며, 갈등과 증오가 있다.

반면에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결핍이 없고, 결핍에서 오는 고난이 없다. 그러기에 구약에서도 구원을 이런 잔치로 그리는 것이다.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잔치로 즐겨 비유하신다. 더욱이 잔치 중 제일 흥겨운 결혼 잔치로 자주 비유하신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장 잘 표현한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다(루카15,11-32). 이 타락한 세상, 사탄의 통치 아래에 있는 아담적 삶을 예수님은 굶주림의 상황으로 그린다. 돼지 먹이인 쥐엄 열매도 없어서 못 먹는 상황에 처한 것으로 그린다. 그런 인간에게 구원은 오로지 창조주 하느님께 돌아와 그의 자녀(상속자)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렇게 얻는 구원을 예수님께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는 잔치로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잔치로 비유하면서 예수께서는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함으로 사탄의 나라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부르는 일을 하셨다(마르2,17). 예수님은 그의 부름에 응한 자들에게 그들이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구원, 곧 영생을 받게 되었음을 말하기 위해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리라고 말하였다(마태8,11-12; 루카14,15-24).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들이 벌써 하느님의 죄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음을 체험하게 하고 그들에게 종말의 구원을 보증해 주는 의미로 잔치를 베풀어 그들과 함께 즐겁게 먹고 마신 것이다(마태11,19; 마르2,15-1-2; 19,1-10).

 

요한복음의 첫 표징(sign)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과 행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져 파장이 된 결혼 잔치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어 가장 흥겨운 잔치를 베풀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종말의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왔음을 뜻하는 표징이다!

반면에 유대교(혹은 구약) 내에서는 이러한 구원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 준다. 카나의 혼인 잔치 마당에 있던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정결례를 위해 물을 담는 용기였다. 정결례란 하느님의 백성이 몸을 씻어 성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예였다. 그러므로 그 항아리들은 유대교의 성전 체제를 상징한다. 곧 유대교는 성전 중심의 종교였다.

 

그 돌 항아리들이 잔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은 그들이 상징하는 유대교 성전 체제가 진정한 잔치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유대교는 마치 포도주가 떨어져서 파장한 잔치와 같다는 뜻이다. 거기에는 기쁨도 생명도 있을 수 없다. 바로 유대교를 예수님께서 완성하여 하느님 나라의 구원 잔치를 가져왔다는 것을 이 첫 표징은 나타내 준다.

 

이어서 나오는 요한복음의 둘째 이적인 성전 정화 사건(2,13-17)은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 유대교(구약)를 완성해서 종말의 메시아적 잔치인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가지고 오는가? , 성전 기능의 완성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성전 체제를 상징하는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그 자체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전 체제인 유대교 내에서는 구원도 잔치도 없다. 예수께서 그 성전 체제를 완성하신다!

 

성전이란 하느님과 그의 백성들이 잔치하고 교제하는 곳이다. 제사라는 잔치를 통해 하느님과 그의 백성이 교제한다.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훼손하고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 죄인데, 이 죄를 제물의 피로 덮어버림으로써 다시 하느님과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성전 제사의 의미이다. 그런데 이제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은 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의 타락한 성전 제사를 더는 받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 성전을 곧 심판으로 파괴해 버리실 것이다.

 

요한2,3-5절은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말하였다.

이 말씀에서 여인이시여는 그리스어에서 존경과 친밀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한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라는 말은 나의 길을 가도록 나를 내버려 두시오라는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이다. 곧 아무도 주님께 무엇을 강요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마태8,29; 마르1,24).

 

그 아들을 성령으로 잉태한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자식에 대한 어떤 기대와 직감을 가지고 있다. 자식이 이 상황, 곧 사망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어머니에게 직감적으로 닥아온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너는 충분히 그것을 만들 수 있지 않느냐?”라고 직감적인 충고를 했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은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라고 말하며, 공생애에 들어가면서 예수님과 그 어머니 간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곧 타고난 천연적인 어머니의 충고를 듣는 때가 지나서, 이제부터는 오직 자기에게서 바른 때를 정하시는(7,6-8),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만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암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확신에 찬 직감이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좀 앞서가는 듯한 말을 했든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어머니에게 순종함으로, 일꾼들에게 정결례에 쓰는 물독에 물을 채워라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이러한 상황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요한복음의 첫 표징은 성령께서 어머니에게 준 영감을 아들이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알렐루야!

여기서 물은 창세기 12,6, 탈출기14,21, 마태3,16절에서처럼 사망을 상징한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은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신 것을 의미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진정 내가 고난 중에 그분을 만나 구원받기 전에는, 나는 사망으로 가득찬 물 항아리였음을 고백한다. 지난 어느 날 내가 ! 주 예수님!”이라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내 안에 믿음이 생겼을 때, 그분은 내 영 안에 오셔서 내 사망의 물을 생명의 물로 바꾸셨다!

 

내가 그분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내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쳤을 때는 더욱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갔으나, 마침내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마지막 한계에 직면하고, 그분에게 항복하고, 비로소 그분에게 내 자신을 열었을 때, 주님은 내 사망의 물을 생명의 포도주로 바꾸셨다!

우리가 처해 있는 사망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그 문제를 주님께 온전히 가져가면 주님은 그 사망을 생명으로 바꿀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실 것!>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