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우상은 하느님의 온전한 자아실현의 거부 / 복음의 기쁨 56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21 조회수706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새로운 돈의 우상을 거부’라는 소제목의 두 번째 권고문 내용으로

아주 볼품없는 졸부들의 치졸함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신다.

여기서 ‘졸부’는 부를 가진 이들 중에서 졸부 아닌 분도 계시기에 그들과는 엄격한 구분이 필요하리라.

왜냐면 그들은 마땅히 존경받을 분이기에 여기서는 의당 논외로 해야 할 게다.

어쩜 그분들의 몸에 베인 ‘겸손과 자선’이야말로 정녕 우리가 본받아야할 것이기에.

 

‘예외 없는 건 없다.’라는 말대로 존경받는 부자도 주위에 쾌나 계신다. 그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기부와 자선, 그리고 작은이를 향한 봉사에 과감한 박수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게다.

그렇지만 부가 가져다 준 재화는 예수님의 걱정대로 제일의 선택이 분명 아닌 것만은 확실할 게다.

그 졸부들이 여러 면에서 치졸하게 굴기에

교황님은 돈의 마력에 우상시된 그들에게 ‘경종의 충고’를 아주 따끔히 하시는 것 같다.

 

사실 소수의 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동안,

다수는 그들이 누리는 행복과는 점점 거리의 격차가 벌어진다.

소위 부를 가진 그 소수가 즐기는 번영에 반해서, 다수는 그들과의 소득격차는 더 벌어지는 추세다.

이 불균형은 시장의 절대 자율과 금융 투기를 적극 옹호하는 이념의 결과물이다.

선이 악의 보편화에 눌리는 격이다.

 

이는 공동선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국가의 통제권마저 배척하는 지경이다.

가끔 국가 위에 군림하는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이 된 것 같다.

그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독재로 나타나,

일방적이며 임의로 자기들의 법칙과 규칙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강요한다.

또한 빚과 이자가 계속 불어나 국가가 그 경제적 잠재력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국민들도 실질적인 구매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여기에다 널리 만연한 부패와 자기 잇속만 차리는 탈세가 더해 세계적 규모를 띠고 있다.

권력과 소유에의 그 욕망의 한계는 끝이 없다.

수익을 올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집어 삼키려는 체제가 도처에 만연된 기분이다.

어쩌면 졸부들의 이런 시장을 이끄는 형태가 절대 규칙 내지는 신격화가 된 것 같다.

따라서 자연처럼 훼손하기 쉬운 것들은

이들의 거침없는 ‘불평등과 배척의 논리’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다.

 

이렇게 돈이 새로운 우상으로 태어난 배경에는 윤리의 배척, 하느님에 대한 거부가 있을 게다.

그들에게는 이런 윤리가 비웃어도 되는 조롱거리 정도로 간주되리라.

왜냐하면 윤리는 지나치게 인간적이며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돈의 우상만을 따르는

졸부들의 이런 무례한 비윤리적인 치졸함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시는 거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자아실현을 하고,

‘배척과 불평등의 논리’에서 벗어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http://blog.daum.net/big-llight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