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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제는 목자인가?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7-05-30 조회수6,395 추천수3 반대(0) 신고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직자우월주의(Clericalism)’를 강하게 질타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신도는 교회와 세상의 주인공이라며

 

“성직자는 그런 평신도에게 봉사하라고 불림 받은 것이지

 

그들 덕을 보라고 불림 받은 게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교황은성직주의는 평신도 역할을 약화시키고,

 

신학적으로는 믿는 이에게 동일한 세례의 은총을

 

과소평가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톨릭교회에 위험하다고 하시면서

 

‘성직주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안된 교회론을

 

잘못 살아가는 데서 빚어진 결과라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교황은사제도 평신도 직분에서 신앙인의 삶을 시작했다.

 

교회는 엘리트 사제나 축성 생활을 하는 수도자 혹은 주교들만의 것이 아니다

교회는 모든 이들을 신앙으로 이끌고

 

거룩한 하느님 백성으로 만드는 곳이라고

 

성직자 엘리트주의를 버려야 함을 역설하셨습니다.

 

유명한 슬로건지금은 평신도의 시대(시간)’

 

정작 현실에서는 바닥에 떨어져 멈춘 시계 같다(구호에 그치고 있다)”

 

“성직자는 현실에서 실질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슬로건에 함몰되지 말고

 

신앙적 삶을 사는 평신도들과함께살아가라고 당부하시면서

 

“목자가 현대 생활의 수많은 도전에 대해

 

유일한 답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격려와 동행의 사목 자세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교황은 기쁨을 선포해야 할 교회마저

 

돈과 힘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으며, 주교도, 사목자도, 교황도,

 

이 유혹에 넘어가고 있다며 쇄신을 강조한다

 

“이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성직자 중심주의와 권위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교회는 본래 성직자와 평신도의 신분적 구분이 없는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였지만,

 

성직자우월주의(Clericalism)’는 다음과 같은 어원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를 영어로 ‘layman’ 또는 ‘laity’라고 하는데

 

이 말은 헬라어라오스(laos)’에서 나온 말로

 

성경에서 하느님의 백성(people)’을 일컫는 말로 쓰였습니다.

 

라오스(laos)’란 말은 헬라 사회에서 도시국가의 시민들을 지칭하던 행정용어로,

행정관이나 고관을클레로스(cleros)’라고 했으며

 

관직을 갖지 못한 일반 시민을라오스(laos)’라고 했는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대중들

 

가리키는 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클레로스에서 ‘clergy’가 나오면서성직자, 사제, 목사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성례를 집행하는 제사장 직

 

‘이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평신도 층으로 나누어지면서 생긴 폐단입니다.

 

 

 

특히 로마 시대에 교회는 로마의 행정 구조에 따라서 조직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의 지역 분할 정책에 따라서

 

교회를 여러 교구로 조직했으며, 주교를 시민 행정관으로 임명하였고,

 

사목자를 특권층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로마의 주교는 이 세상에서 교회의 머리로 간주되었고,

 

사목자는 차별된 복장을 하고 신학교에서 특별한 교육과 문화를 익히면서

 

사목을 준비하였으며 세례가 절대적인 요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목자와 평신도를 신분적으로 구분하는

 

성직자우월주의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사목을 독점한 사목자는 구약의 제사장 모델이 전이되어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하는사제(priest)’가 되었으며

 

성찬식과 성례전은 성별(聖別)된 사제만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2세기 말엽에 시작되어 4세기에는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이렇게 사목은 점차 성직(聖職)으로 생각되었으며

 

사목자는 평신도와 신분적으로 분리되어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목은 교인 전체의 임무가 아니고 성직자들만의 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직(聖職)의 탄생으로 교회 안에

 

두 종류의 하느님의 백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성직자는 거룩한 영적인 일을 하는 상층계급으로

 

평신도는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는 하층계급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성직자는 말씀의 선포권과 성례전의 집행권, 가르침과 지도의 권위,

 

교회에서 위엄과 명예와 계급을 가지게 되었고, 평신도는 말씀을 듣는 청중,

성례전에 참여하고 성직자의 영적 지도와 교훈을 받는 순종자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는 자신의 소명과 영적 은사를 무시당한 채

 

언제나 순종과 열심만을 강요당하는 수동적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로부터 이탈한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성직자 우월주의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합니다.

 

 

 

사실 루터는 대사부(大赦符) 판매 등의 비리를 척결하기 위하여

 

종교개혁을 했지만 이 성직자 우월주의를 철폐하기 위한 것이 첫째 목표였는데

 

이를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교회의 위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잠언 22,6)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부터

 

진리의 길로 인도 되지 않고

 

종교의 길로 인도되었습니다. 

 

사제가 목자로 자처하면서 평신도들이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지만

 

‘종교’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목자를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악한 목자를 책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에제 34,2)

 

 

 

“겁도 없이 여러분과 잔치를 벌이면서 자신만 돌보는 저들은

 

여러분의 애찬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바람에 떠밀려 가 버리는 메마른 구름이고,

 

늦가을까지 열매 하나 없이 두 번이나 죽어 뿌리째 뽑힌 나무이며,

 

자기들의 수치스러운 행실을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고,

 

짙은 암흑에 영원히 갇힐 떠돌이 별입니다.”(유다 1,12-13)

 

 

 

하느님만이 우리의 목자요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우리의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으뜸 목자시니(1베드 5,4),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맡은 성직자들도

 

작은 목자라 불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하셨으니(요한 21,15),

 

베드로와 같이 목자 역할을 위임하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할의 위임을 말하는 것이지

 

신분의 상승 혹은 존재론적인 차이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목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사명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성직자를 목자로, 성도를 양으로 간주했을 때,

 

대 그레고리(St. Gregory The Great) 교황은

 

『사목지침서(Liber Regulae Pastoralis, The Book of Pastoral Rul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제가 소명을 다하려면 먼저 자신의 꼬락서니를 알고

 

자신을 교만하게 만드는 삶을 살아서도 안 되고  

 

교만한 강론을 해서도 안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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