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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의 본 모습은 성자(聖者)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21 조회수3,135 추천수1 반대(0) 신고

그 젊은이가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0-22)

 

 

 

이 젊은이는 아주 도덕적인 청년이어서

 

바르게 살면서 나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는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자기 만족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가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하고 예수님께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다른 계명은 주시지 않고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라든지 어떤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불분명한 말씀만 하신 것입니다.

 

 

 

법과 규칙은 투명성(透明性)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법과 규칙에 따라야 하느냐를 고민할 때

 

투명성은 확신을 갖게 하므로 아주 유용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투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혼란스러운 삶을 살고 있고

 

투명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도

 

뒤죽박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모세의 법에 대하여

 

모세의 법을 지킨다고 의롭게 되지는 않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헛되이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갈라 2,16,21)

 

 

 

법은 삶의 안내자 역할을 하지만

 

삶의 지혜를 속속들이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바로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치 바둑의 기도(碁道)를 따르지 않으면 바둑을 둘 수 없듯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은 의롭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아주 알기 어려운 말이지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2,19)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話頭)와 같아서 좀처럼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율법에 따르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6)

 

그랬기 때문에 힘이 있었으며 명성을 누렸으며 지위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지도자가 되었고 광신도(狂信徒)가 되었으며

 

확고부동한 주체성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법으로부터 해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만 매달려 살면 새로운 생명을 얻을 기회가 없게 됩니다.

 

이 때문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 젊은이와는 달리

 

()’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불투명한 미래를 걸었습니다.

 

만약 바오로 사도가 율법에만 집착했다면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목적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태 5,18, 루카 16,17참조)

 

인간의 타락상을 보시고 절대로 율법을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셨던 것입니다.

 

 

 

법은모든 삶을 규정하지는 못하기때문에

 

삶이라는 법 밖에서완성되게 됩니다.

 

한 선사(禪師)깨달은 사람도 인과(因果)의 법칙에 따라 벌을 받을 짓을 합니까?”하는

제자의 질문에좋을 대로 생각해라.

 

그러나 인과법칙이 불변의 진리라는 것은 사실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율법의 존재 이유를 모르면 진리를 알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신앙을 가졌다면

 

율법을 지키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하고 고백했던 것입니다.(갈라 2,20)

 

율법이 완전했더라면 구태여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알게 해주시려고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성자인 자신의 본 모습을 모르고 사는 우리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새 명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196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싹에서 나무가 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나무는 나무가 되어갈 수록, 더욱 하느님과 같아집니다.

 

나무가 이전의 혹은 이후에 존재할 어느 나무와도 다른

 

자기만의 방법으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과 빛 사이로

 

가지를 뻗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4월에 먹구름 아래서 하느님의 창조적인 지혜로

 

이 땅에 새로이 솟아 난 나무의 볼품없는 아름다움도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거룩함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밖에 있는 층층나무의 하얀 꽃들도 성자(聖者)입니다.

 

길 가장자리에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는 작은 노란색 꽃들도

 

하느님의 얼굴을 반영하고 있는 성자들입니다.

 

나무의 이파리들은 제 나름의 질감을 갖고 있고

 

제 나름의 수맥을 갖고 있고 제 나름의 거룩한 모양을 갖고 있으며,

 

깊은 강의 바닥에 숨어 있는 바스(bass)와 송어도

 

아름다움과 힘으로 신성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덕들에 둘러싸여 숨겨져 있는 호수도 성자이며

 

바다 또한 거침 없이 장엄한 파도를 일으키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자입니다.

 

웅장하고 깊은 골짜기를 갖고 있는 반 민둥산도

 

또 다른 하느님의 성자입니다.

 

어디에도 이런 산은 없습니다.

 

이 산은 이 산만의 자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것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산의 성스러움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성자(聖者)가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함과 구원의 문제는 결국 자신이 누군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문제입니다.

 

나무들이나 동물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상담을 해주시지 않아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도록 그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닮든 우리의 자유의지에 맡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본 모습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이 참된 사람도 될 수 있고

 

거짓이 많은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우리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한 가면(假面)을 쓰고 있다가

 

다른 가면으로 바꿔 쓸 수도 있고 전혀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한다면 자신의 본 얼굴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가를 치르지도 않고 이런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에게나 남에게 거짓말을 하면

 

아무리 진실을 알고 싶어도 진실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거짓의 길을 택하면

 

자신이 진리를 알고 싶어해도 진리가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자신의 삶과

 

정체성과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매 순간 자기 마음대로 뿌린 씨앗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과

 

현실과 행복과 거룩함의 씨앗이 됩니다.

 

우리 모두 거짓 자아의 탈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나 존재하지 않는 거짓 모습을 보여주어

 

하느님께서 전혀 알아보시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프라이버시를 핑계 삼아 자신의 참 모습을 숨김으로써

 

하느님께서 자신을 알아보시지 못합니다.

 

자신의 거짓 자아는 하느님의 뜻이 미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이 미치지 않고 현실적이지 않고 생명이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한 거짓 자아는 헛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헛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며

 

대부분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죄의 뿌리를 갖고 태어났고 죄의 뿌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존재하지도 않는

 

이 거짓 자아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이 어둠을 숭배하는 데 생명을 바치는 것을 소위 죄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죄는 자기 중심적인 자신의 거짓 자아가

 

우주에 있는 그 밖의 모든 삶의 현실을 질서정연하게

 

만들고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됩니다.

 

그리하여 이 거짓 자아를 감추고 허무함을 느끼기 위하여

 

쾌락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경험과 권력과 명예,

 

그리고 지식과 사랑의 목마름에 평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보이는 것들이

 

거죽을 숨기고 있을 때에만 볼 수 있게 되는

 

마치 보이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는 양

 

자기 중심으로 살고 쾌락과 영광으로 자신을 감추고

 

자기만 알기 위하여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반창고(絆創膏)처럼 붙이고 다닙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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