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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의와 자비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23 조회수2,938 추천수1 반대(0) 신고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16)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이사 55,8)

 

이 말씀은 그리스도 이전 약 7세기 전에 하신 말씀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우화로 말씀하신

 

오늘의 복음 말씀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약속대로 하루치의 임금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이는 정상적인 의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적게 일한 사람들은 적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특히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더 적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과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심하게 불평을 하자 밭 임자는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하고 되물었습니다.

 

의로움은 공로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것이고

 

관대함은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관대하십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의로움만 강요하셨다면

 

우리 모두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자비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의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나는 간담이 서늘한 말을 들었습니다.

 

19세기에 신학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강론을 자랑하지도 않았던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가 하느님께서 분노를 쏟아 부으시는 것은

 

의로움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분노를 모든 죄인들에게 쏟아 부으시지 않고

 

모든 죄인들 대신에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으신 것은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비가 아니라 의로움을 보여주시지 않은 것으로

 

다른 말로 하면 불의(不義)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녀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곧 자비입니다.”하고 간단히 말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께서 의로움을 펴시는 것은

 

당신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움을 자비와 분리해서 생각하시지 않으므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나 그리스도에게

 

벌을 주시기 위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 안에는 오로지 삼위일체의 식별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만 의로움과 자비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의로움과 자비를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를 그리스도께서 아주 적절히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지혜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십니다.”(루카 10,21)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잘못을 범했다고

 

경찰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자비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선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우리보다 더 나쁘신 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의와 자비를 분리하여 생각했기 때문에 범한 잘못을 생각해봅니다.

 

변호사, 대중 연설가, 토론가, 수필가로 명성을 날렸던

미국의 클레런스 대로우(Clarence Seward Darrow, 1857-1938)가 말했습니다.

 

우리들 인생의 전반부는 부모가 망쳐놓고 후반부는 자식들이 망쳐놓습니다.”

 

자식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성품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야 행복한데도 불구하고

부모의 지나친 관심이나 무관심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인생을 망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 말은 도로시 피셔(Dorothy C. Fisher)

 

어머니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의지할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분입니다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없애버렸다(No Road)>


 필립 라킨(Philip Larkin)/ 후고(後考) 옮김  



필립 라킨(Philip Larkin)/후고(後考) 옮김


 

필립 라킨(Philip Larkin)/후고(後考) 옮김

 

 

 

우리 사이에 있는 길을 두 번 다시 걷지 않으려고

 

문을 벽돌로 막아버리고, 나무를 심어 병풍처럼 가리기로 하되

 

언제나 바람이나 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해놓기로 합의했기에

 

우리가 무시했던 침묵과 틈새와 방문객들도 그 길로 되돌아가게 하지는 못했다.

 

 

 

아마 낙엽들도 쓸어내지 않고 잡초만 뽑지 않았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즈넉하고 조금도 잡초가 무성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밤 그 길을 걷는다고 해도

 

전혀 낯설지도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 길을 못 가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있으면 세월은 더 고집스럽게

 

 

 

당신과 나 사이에 길도 없는 그런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할 것이다.

 

비록 아무것도 얻는 것은 없지만

 

차가운 태양이 뜨는 그런 세상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나의 자유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나의 뜻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다.

 

고집스럽게 내 뜻대로만 하려는 것 그것이 나의 병()이다.

 

.................................................................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되돌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않고 죽게 되면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평평한 길을 버리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가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고 구원의 길을 닫아버리는 것도

 

자신이 닫아버린 것이지 하느님께서 닫아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길을 걷지 않고 제 마음대로 자신의 길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어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 새로운 것들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사건을 만날 뿐입니다.

 

 

 

첫 번째 연은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끊어도

 

결코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고 흉터가 생기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것들을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지 못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두 사람 사이에 나 있던 길을 벽돌로 막아버리고

 

나무를 심어 가려버려도 길은 그대로 있으며,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 사이에 틈새가 생기고

 

방문객들이 각자의 집을 드나들 뿐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연은 두 사람이 절연(絶緣)은 했지만

 

한 사람이 같은 길을 걸으면서 헤어진 까닭을 생각해보려고 해도

 

세월은 무상하기만 하고 그 길은 옛날과 다름이 없지만

 

낙엽만 뒹굴고 있고 잡초만 우거져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짙은 외로움이 몰려 오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음을 실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연은 헤어지게 된 까닭은

 

자신 때문이고 못내 아쉬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그 길로 갈 수 있지만

 

자신이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가지 않고 고집스럽게

 

제 마음대로 길을 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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