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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0825 -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25 조회수3,359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7
08 25 () 가해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성 루도비코 기념일)
(
성 요셉 데 갈라산즈 사제 기념일)

룻기 1,1.3-6.14-16.22 / 에제키엘서 37,1-14
마태오복음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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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룻기 1,1.3-6.14-16.22

1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려고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3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어서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게 되었다.
4
이들은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파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이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십 년쯤 살았다.
5
그러다가 두 사람도 죽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자식과 남편을 여읜 채 혼자 남게 되었다.
6
나오미는 며느리들과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나 돌아가기로 하였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시어 그들에게 양식을 베푸셨다는 소식을 모압 지방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14
오르파는 시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며 입 맞추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15
나오미가 말하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그러자 룻이 말하였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22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출신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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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에제키엘서 37,1-14

그 무렵 1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4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5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6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9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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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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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8 25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성 루도비코 기념일)
(
성 요셉 데 갈라산즈 사제 기념일)


오늘 독서에 나오는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선택합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 출신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자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나오미의 곁을 지킨 며느리는 모압 출신 룻이었습니다. 룻은 하느님을 섬기는 베들레헴 지방으로 가서 보아즈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룻은 오벳이라는 아들을 보게 되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 4,17)입니다. 이방인 여자의 하느님 선택은 다윗 가문의 뿌리로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같은 내용의 사건을 기술하면서(루카 10,25-28 참조), 그 앞부분에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친교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뒷부분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참된 이웃을 언급합니다. 루카는 참된 하느님의 뜻과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으며, 참된 이웃 사랑은 유다인 사랑을 넘어 이방인까지 사랑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유언을 제자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새 계명은 예수님의 수난과 희생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에서 재현됩니다. 우리는 십자 성호를 그으며 예수님의 새 계명을 지키고 따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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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8 19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요한 외드 사제 기념일)


오늘 복음을 보면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당시 유다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 학자, 곧 율법 교사들이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이민족이 침입하여 유다인들의 종교심을 훼손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에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바리사이가 등장합니다. 바리사이란 분리된 자들이란 뜻이지요. 그들은 율법 학자들이 해석한 율법을 정성껏 지키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모든 계명을 다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그렇게 경건할 수 없었고, 직업에도 충실했지요.
문제는 그들이 율법 자체에만 집착하다 보니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잃어버린 적이 많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계명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기계적인 신앙생활이 되기 쉽습니다. 원칙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큰일 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전례의 정신도 마찬가지이지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계명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칫 글자 그대로의 계명에만 집착한다면 그만 사랑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이같이 스스로 자문하는 습관을 길러 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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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821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오늘 독서 룻기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해 줍니다. 모압 땅 친족에게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홀로 남은 시어머니 곁에 남을 것인가?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서 룻은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룻은 자기를 사랑해 줄 사람, 곧 새로운 배우자를 찾아 나서지 않고 자기가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을 선택합니다. 나오미와 함께 머물겠다는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룻기는 룻의 동서인 오르파를 비난하지 않으며, 반드시 룻과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오르파의 선택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모압 여자였기에, 모압인들이 섬기던 신에게로 돌아간다는 것도 룻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합니다. 오르파의 선택은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안전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아들이 없는 과부는 살 길이 막막했기에, 차라리 자기 친족에게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지켜 가기에도 너무나 각박한 세상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타산적으로 삭막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룻은,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는 놀라운 결단을 내립니다. 이 세상에는 룻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수많은나오미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룻의 선택으로 나오미의 생존은 물론, 훗날 다윗 왕조가 탄생하게 됩니다.
오늘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을 살게 할 수도,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당연한 선택과 결정이라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숙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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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8 22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우리나라의 현대 수묵화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월전 장우성 화백의 수필집 『월전수상』에는흑과 백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흑과 백은 절대 상반의 두 개의 원색이다. (중략) 그래서 이 두 원색은 어떠한 경우에도 혼동이나 착란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기에 옛날에서 현재까지 뚜렷한 대조를 표시해야 할 경우에 항상 흑백을 이용한다. (중략)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러한 색상 감각의 표준 의식이 흐려졌거나 삐뚤어져 버린 것 같다. 번연히 흰 것을 검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옻빛같이 검은 것을 눈빛같이 희다고 억지 쓰는 친구들도 있다.”
수묵화의 세계와는 달리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려운 상황들을 자주 만납니다. 판단을 해야 할 때 섣불리 자신의 직관에 의지하기보다는 찬찬히 관찰하고 경청하는 태도와, 사람마다 자기나름의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자세가 인생의 지혜이자 현대 사회가 조화롭게 유지되는 조건입니다.
이처럼 인생사는 오히려 마치 경계를 꼭 집어 말할 수 없도록 미묘하게 색이 변해 가는 수채화의 세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인간적 지혜가 구체적 상황에 적용되려면 역설적으로 그 중심에 근본적 원리에 대한 분명하고 타협 없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흑백 논리로 삶의 복잡다단함을 재단하지 않는 관용의 태도는 섬세하고 호의적인 배려가 아니라 무책임한 상대주의나 자기 위주의 주관주의로 귀착될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흑이 백이 될 수 없는 수묵화의 세계처럼 우리에게도 삶의 최종 가치에 대한 양보 없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투신입니다. 원리에는 어떠한 모호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계명의 분명한 요구가 삶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수묵화의 은은한 운치를 느끼며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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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8 23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리마의 성녀 로사 동정 기념일)


한때 한 텔레비전의 개그 프로그램에달인을 모시다라는 편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달인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나왔는데, 거기에서는 일반인들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기술이나 재주를 지닌 달인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음식을 배달할 때 여러 층으로 쌓은 쟁반을 어깨에 메고 뛰어다니는 배달의 달인, 두루마리 화장지의 심지를 집어넣는 데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달인, 과일 깎기의 달인 등 참으로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달인이란학문이나 기예에 통달하여 남달리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곧 한 가지에 열정적으로 몰두해 남들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기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한 기술이 체득되기까지 얼마나 숱한 실패와 좌절이 반복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실패와 좌절이 거듭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붙들고 있을 때 달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자주 듣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사랑의 달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는 가운데 부단히 노력하고, 고민하고, 시도하여사랑의 달인의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달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 노력하는 가운데 어느새 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사랑의 달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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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8 24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8 19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성 요한 외드 사제 기념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이다.”라고 하였지요.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이기에 이 사랑의 가치는 삶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미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고,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 존재가 이미 누구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습니다. 마음은 비워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채워 두는 곳입니다. 마음 그릇이 비어 있으면 금방 다른 것이 채워집니다. 미움, 분노, 시기, 질투, 온갖 욕망들이 마음 그릇에 담기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이유도, 우리가 성실하게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도, 마음 그릇에 사랑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 그 누구에게 사랑의 선물이 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도움이 필요하고 사랑에 굶주린 이들이 너무 많아 우리는 오히려 외면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이 수많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가 이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이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내 사랑이 필요한, 눈앞의 그 사람을 이런저런 핑계로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늘 사랑이 가득한 선물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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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8 20)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분은 바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사랑이신 분의 사랑을 나누어 받았고, 주님의 창조 사업과 구원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의 활동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사랑이신 그분이 바로 시작이시며 마침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께서 만드신 온갖 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사랑은 진실하고 영원합니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주님 안에 머무르며, 정의와 평화와 진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신 분이 바로 진리요 평화요 정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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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8 21)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삶은 ‘미워하고 있다면’ 복음 정신이 아닙니다. 남에게는 봉사하면서 자신에게는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기쁨의 헌신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어진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생활도 가능해집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교의 율법은 ‘613조항’이었습니다. 복음의 율법 교사는 그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이른바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 조항에 묶여 전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단순했던 율법 정신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베푸는 행위’입니다. 많이 받으면 많이 베풀 수 있습니다. 애정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넉넉한 애정의 관계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주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도와주셨던 사건들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따뜻함입니다. 차가운 현실에서 훈훈함을 느끼게 하는 ‘힘’입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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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8 22)
(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하느님은 말씀’이라 했습니다. 그분의 음성은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도 마음으로 새겨들으면 더욱 살아 있는 목소리로 바뀝니다. 물소리도 바람 소리도 어린이의 목소리도 마음으로 들으면 주님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이렇게 단순화하셨습니다. 정성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살라는 말씀이 아닐는지요.
실연한 까투리가 있었습니다. 까투리는 솔밭에 누워 며칠을 앓습니다. 어느 날 목을 축이려 냇가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무심코 바라봅니다. 퀭한 눈과 부석부석한 자신의 얼굴을 봅니다. 까투리는 놀라 외치지요. “이게 뭐야? 이 꼴이 내 모습이란 말인가? 남은 탓하면서도 내가 나한테 저지른 잘못은 모르고 있다니.” 까투리는 소리를 지르며 하늘로 날아갑니다. 정채봉의 우화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삶은 미워하고 있다면 복음 정신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봉사하면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고 있다면 기쁜 헌신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생활이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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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8 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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