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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천주교회 희망의 아이콘 최양업(토마스) 신부 선종 157주년 추모(9)
작성자박관우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05 조회수1,473 추천수1 반대(0) 신고

요동에 도착한 최양업과 김대건은 헤어지게 되어 최양업은 몽고에 있는 소팔가자로 가서 그곳에 미리 체류하고 있던 장차 3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는 페레올 신부와 합류하였으며, 김대건은 요동에 그대로 남아 조선으로 입국을 추진하게 되었다.

 

최양업은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조선으로 입국하려다 실패하여 다시 온 김대건으로부터 기해박해로 인하여 자신의 부모를 비롯하여 많은 교우들이 순교한 불행한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레올 신부가 로마교황청에 의하여 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는 새로운 변화가 있었는데 1843년 12월 31일 개주에서 주교성성식을 하였는데 여기에 김대건과 최양업도 참석하였다.

 

이듬해에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팔가자에서 남은 신학공부를 계속하여 마침내 모든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그해 12월 15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기에 이르렀다.

 

부제품을 받은 이후 김대건이 조선을 향하여 떠날 때 최양업은 매스트로 신부와 함께 몽고 장춘 부근의 소팔가자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후 훈춘에 도착하였으나 발각되어 체포되면서 요동으로 추방되었으며, 신학교에 머물러 있다가 1846년 12월 세번째 조선 입국을 시도하는 중, 만주와의 국경선 변문까지 와서 조선의 박해 소식과 김대건 신부의 순교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입국이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마카오로 가려고 하였으나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가 홍콩으로 이동하였다는 소식에 결국 홍콩으로 향하였다.

 

1847년 7월 최양업은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하여 프랑스 통상선을 타고 홍콩을 떠나 군산 앞바다의 작은 섬에 하선하기도 하였으나 배가 좌초되어 섬에서 천막을 치고 상해로부터 구조선을 기다리는 동안 한달간을 체류하게 되었다.

 

최양업은 그 섬에 체류하는 동안 교우들의 근황을 알기 위하여 바쁘게 뛰어다녔으며, 직접 만나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우들과의 만남은 지속되지 못하였으며, 한달 이후 다시 상해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최양업과 매스트로 신부는 프랑스 함선을 이용한 입국은 포기하고 다른 배를 이용하여 백령도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였다.

 

백령도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곳이기도 한데, 이 곳에 조선의 교우가 나타나지 않자 다시 상해로 뱃길을 돌리면서 결국 조선의 입국 시도는 실패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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