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박기석 신부 제7강 / 마르 1,1-11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22 조회수2,475 추천수1 반대(0) 신고

박기석 신부 제7강 마르 1,1-11  



 

이제부터는 마르코 복음 본문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는 자신이 쓴 복음서 첫 시작을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의 시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 마르코는 희랍어 단어로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복음 유왕겔리온(euangélion)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어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야말로 새롭고 참으로 좋은 것을 시작하셨다는 거죠. 

 

* 복음 : 새롭고 참으로 기쁘고 좋은 것

 

그러기에 이 용어는 마르코가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위해 마르코는 여러 경로는 통해서 수집한 예수님에 대한 전승 자료를 모았고, 거기에 이제 자신의 편집 의도, 신학적 의도에 따라서 재단을 해서 예수님의 일생을 엮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방송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드린 바 있는데요. 마르코는 이니치움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학 양식 중에 하나인데 중요한 본문의 주제를, 요소를 따서 복음의 제목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 이니치움 (initium) : 책의 성격을 밝힘

 

1,1절은 그래서 복음서의 제목이 되면서 또 중요 요소를 뽑은 것이기 때문에 복음서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자신의 복음서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자신의 복음서 내용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뽑아서 상징적으로 책의 성격을 밝히고 있는 거죠. 그래서 마르코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여기 또 의미 심장한 단어 '시작'이라고 하는 단어를 붙이고 있어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시작."(마르 1,1)희랍어로 아르케(arch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작이라는 단어 하면 구약 성경 첫 번째 책인 창세 1,1절을 한 번 생각해 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창세 1,1절의 첫 단어가 히브리어로 '브레쉬트'라는 단어입니다. "한처음에" 곧 세상 처음에라는 말인데요 히브리어 '레쉬느'는 처음이라는 말, 처음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원리, 원칙이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저자는 이 한처음에 하느님이 계셨는데, 말씀이 계셨는데 즉, 하느님의 원칙, 원리가 있었다. 세상의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는 거죠. 그런데 마르코가 똑같은 단어 '시작'이라는 단어, 물론 희랍어로 번역을 했습니다만 '시작', '복음서의 원리, 방향, 원칙'을 얘기한다는 거예요. 즉, 창세기 첫 장 첫 구절, 창조의 한처음을 상기시켜 주듯 마르코는 그 옛날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처럼 하느님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통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 이런 의미로 복음서를 시작한다는 거죠. 


하느님께서 흙을 빚어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거기에 숨을 후~ 불어넣어 주셨다. 그런 것처럼 이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넣어 주시고자 제2의 창조 즉, 인간의 구원을 시작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기쁜 소식일 수밖에 없는 거죠. 마르코는 이를 위해서 주인공을 이제 우리에게 제시해요. 주인공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즉, 주인공의 이름이 복음서의 제목이 되어버린 셈이죠. 


* 인간을 만드심 ⇒ 인간을 구원 (기쁜 소식)


게다가 이것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마르코는 의식적으로 아주 장엄하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심포니를 연주하듯 장엄한 서곡으로 시작을 하는 거죠. 마르코가 연주하는 이 서곡에는 복음서 전체 내용과 이를 압축한 특별한 주제들을 담고 있는데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르코가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님의 호칭, 타이틀을 사용하고 있어요.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하는 호칭입니다. 예수는 이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과 그리스도는 호칭이 되는 거예요. 즉, 하느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호칭들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인성, 인간의 이름이죠. 


자, 기쁜 소식, 복음을 시작하고자 주인공의 이름, 호칭을 제시했다는 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만큼 마르코가 고민했다는 거예요. 복음을 읽게 될 독자들, 오늘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참으로 중요했던 것, 그래서 복음서 안에서 설명하려 담았던 핵심 내용이 바로 1,1절로 제시했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결국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말하려고 했다라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정체성을 담아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르코가 시작하려고 했던 기쁜 소식이 단지 그 시대만의, 오직 마르코 본인과 마르코 독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역사 안에서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그 당시에만 기쁜 소식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서 이름을 불러 주었다. 이름이 존재를 가리키는 거잖아요. 즉, 이름에 존재의 본질을 담으려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기쁨이 된다라는 것. 우리에게도 삶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두 호칭은 복음서의 제목이자 또 1,1절로서 복음서의 방향을 제시한다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복음서의 내용이고 복음서의 구조를 이루고 있어요. 


*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 복음서의 방향 제시, 복음서의 내용과 구조를 이룸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마르코 복음서가 16개 장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 딱 중간인 마르 8,27-30절 즉, 마르 8,29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는데 즉, 1,1절의 예수님의 호칭인 그리스도가 8,29절 딱 중간 부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의해서 밝혀진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예수님의 함구령이 내려졌다는 거예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호칭이 함구령과 함께 전반부에는 그리스도로 주어졌다가 마지막에 완전히 드러납니다. 


바로 예수님을 반대했던 예루살렘 땅, 바로 십자가 위에서. 그것도 예수님 돌아가시고 나서예요. 돌아가시자 마자 십자가 형을 집행했던 군인 로마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5,39) 결국 복음서의 중간과 마지막에 베드로와 백인대장의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1,1절의 제목과 표제로서  또 첫 구절로서 전체 복음서 내용의 구조를 다 제시해 버린다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마르코가 신경을 많이 썼구나라는 거죠. 무엇을 밝히기 위해서? 예수님이 누구냐?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히려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마르코가 1,1절에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제목처럼 이 하느님의 아드님은 이렇게 복음서의 마지막에 공개적으로, 이제는 함구령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예수님이 만 천하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서 죽으시고 나서 백인대장이 "이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구나." 신앙고백을 한 거죠.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려면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가 옳은 신앙고백을 했음에도 함구령을 내리신 것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신앙고백은 영광의 그리스도만 찾는, 우리 삶에서 삶의 편리함만을 찾으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찾으려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고통의 주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을 마르코는 강조하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호칭이 이제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잖아요. 마르코가 처음에 1,1절에 제시한 것과 마지막에 백인대장이 한 고백, 이 두 개 빼고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밝히는 경우가 또 있어요.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밝혀진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으로 오셔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마르 1,9-11절에서 이 내용을 알 수 있는데 이 세례 장면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시기 이전에 그분은 이렇게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되는데, 누구에 의해서 선언된다고요? 아버지 하느님에 의해서.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얘는 내 아들이야!" 하고 밝혀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있다가 더 설명을 드리겠지만 이 소리는 예수님만 들으세요. 세례자 요한이나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합니다. 나중에 한 번 더 하느님이 예수님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밝혀 주시는 장면이 또 있습니다. 그때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듣습니다.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거룩한 변모사건 때에. 

 

이렇게 두 번 하느님께서 예수님이 당신의 아드님이라고 밝혀주신다. 그러고서 9장의 거룩한 변모 때는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7)라고 합니다. 왜 '들어라'라고 더 강조해 주시냐 하면, 9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다음이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수난, 죽음, 부활의 그 길을, 시련의 길, 십가가의 길을 걷는데 너희들은 같이 따라야 한다라고 하느님이 강조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1,1-14절까지 오늘 살펴보는 내용은 어떻게 보면 복음서 전체의 내용을 다 말씀드린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자, 이 과정에서 이제 마르코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키죠. 특별히 세례자 요한의 직무를 언급하면서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마르코 복음사가에 따르면 요한이 설교하는 중심은 단연코 예수님에 대한 거죠. 사실 복음서를 우리에게 남긴 마태오, 루카, 요한 모두 세례자 요한에 대해 증언을 합니다. (마르 1,7-8)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세례자 요한이 이사 40,3의 말씀,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이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왔다는 거.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다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밝히면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거라고 하면서 자신이 주는 세례는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라고 세례를 비교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더 큰 능력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 세례자 요한이 어떻게 설명합니까?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라고 하죠. 마르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준비하는 하느님의 사자, 메신저로서 이렇게 세례자 요한을 제시해요. 

 

* 하느님의 사자(使者) 세례자 요한 

 

그런데 이렇게  세례자 요한이 마련한 길, 주님께서 가셔야 할 길, 그것을 광야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이 광야라는 단어가 마르코 복음 1장에 네 번이나 언급이 됩니다. 그런데 이 광야라는 곳, 사막의 지형적 위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적 의미가 분명히 있는 것이죠. 일련의 유다이즘 사조들은 메시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야먄 했던 시련과 정화의 장소로 광야를 언급했어요. 바로 그 광야 한가운데서 한 소리가 외치고 있는 것. 바로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죠. 

 

구약 성경을 보면 하느님 말씀은 역사하시는 말씀이고 계시하시는 말씀으로써 예언자라는 대변인을 통해서 백성 전체에게, 그리고 신적인 통교를 통해서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은 역사의 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설명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예요. 그가 마지막 예언자로서 하는 일이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일이다라는 거죠. 

 

그런데 재밌게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키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세례자 요한의 사명,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한 다음에, 7절에서는 요한의 목소리로 직접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의 메시지는 앞서 마르코가 전해 준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마르코는 이제 세례자 요한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밝혀 줬다면 세례자 요한이 직접 자신의 일을 설명하는 데는 무엇을 얘기하냐 하면, 어떤 사람을 소개하고 있어요.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에 대해서. 내 뒤에 오시는 분, 이제 새 역사 무대에 등장하실 분을 소개하고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소개하느냐?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마르 1,7) "더 큰 능력을 지니다"라는 표현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더 큰 능력을 지니다'라는 표현이 구약 성경에서는 바로 하느님의 특성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특성을 설명할 때, "하느님이 이런 이런 분이야."라고 설명할 때 습관적으로, 관용적으로 '더 큰 능력'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겁니다. 


예를들면 "자애는 천대에 걸쳐 보여 주시지만, 조상들의 죗값는 다음 자손들에게 갚으십니다.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 이름은 만군의 주님이십니다."(예레 32,7) 이렇게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분'으로 하느님을 소개하죠. 더 큰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의 특성을 이렇게 표현한다는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과 비교해서 자기 위치를 말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그분과 비교해서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는 사람"(마르 1,7)으로. 


사실 남의 신발 끈을 푸는 건 노예들이 하는 일입니다. 다른 이의 신발 끈을 푼다는 것은 천한 직업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누군가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무릎을 꿇어야 돼요. 그만큼 겸손함을 얘기하는 거죠. 오시는 분과 관계에서 요한의 이런 겸허한 위치. 이렇게 미리 길을 준비하는 자와 이 마련된 길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는 자, 각각 일원을 그 일들 속에서 반영되어 진 것이다 하는 거죠. 그러면서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다음에 오실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를 준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성령으로'라는 표현을 아주 자주 사용했는데요, 그 목적은 예언자들은 마지막 때 있을 백성의 새롭게 태어남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성령으로'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5-26)


그러니까 새롭게 정화된 거, 새롭게 뭔가를 만드는데 영을 넣어주겠다라고 표현을 하는 거죠.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자, 이렇게 구약에서 성령으로, 영으로 무엇을 하겠다.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내겠다라는 뜻이예요. 그래서 많은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당신의 이런 거룩한 영을 부어주시어 우리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그런 희망을 걸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바로 이것이 자기 뒤에 오시는 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거예요.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8) 세례자 요한이 예고한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마르코 복음서에 처음 등장하십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람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그런데 복음서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보다 무엇에 더 강조점을 두었냐 하면, 예수님이 들었다는 하늘의 계시에 더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코는 예수님의 역사 무대의 첫 등장,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셨음을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어떤 표현을 쓰냐 하면 '그 무렵에"라고 시간적인 것을 제시하죠. 그 무렵. 그 무렵이란 어떤 시간입니까? 바로 세례자 요한이 많은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면서 물로 세례를 주던 때이지요. 

 

"그 무렵" : - 세례자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던 때

            - 목전에 다가온 때, 마지막 때, 이스라엘의 재건, 민족들의 심판 

            - 예수님께서 역사의 종말을 시작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그 무렵'이라는 표현은 목전에 다가온 때를지칭하는 경우도 있고, 예언자들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때, 이스라엘의 재건 그리고 민족들의 심판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마르코는 구약 성경의 배경을 두고 있는 '그 무렵에'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예수님께서 역사 안에 들어 오셔서 공식적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역사의 종말을 비로소 시작하신다라고 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런 생각을 전해 주려고 했다라는 것이죠. 


자, 이렇게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능력이 있으신 분,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첫 발걸음. 자, 복음서를 보면 참으로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마르코가 구약 성경 특히 탈출 23,20절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이 구절을 참조, 인용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참으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해서 하느님께서 언약하신 땅에 이르기에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했던 것이 어떤 곳이냐? 바로 요르단 강이었죠. 


바로 그 요르단 강으로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세례자 요한이 외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고자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곳에 누가 오시는 거예요? 갈릴래아에서 예수님도 오셨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 왔는데, 여기 예수님도 오셨다. 왜 오셨는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뭐예요? 우리들과 하나되기 위해서 오신 거잖아요. 


* 요르단 강에 스스로 오심 ⇒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심 


죄 없으신 분이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임하셔서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안 받으셔도 되는데, 우리와 같이 세례를 받으시겠다. 우리와 하나 되시겠다는 거예요. 인간의 연대성을 표현하는 거죠. 인간과의 연대성. 자, 이 하나 됨. 세례를 안 받으셔도 되는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인간처럼 똑같이 우리와 하나 되고자 당신을 낮추신 것을 하느님이 인정해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표시로 "하늘이 갈라졌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죠.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르 1,10) 마르코 복음에서 이렇게 하늘이 갈라진 것은 한 번 더 나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고 표현하죠.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르 15,38) 그렇습니다. 하늘이 찢어졌다, 갈라졌다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시려고 우리 삶 안에 개입하신다라는 표징이예요. 이 약속의 실현은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갈라지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은 이스라엘의 원초적 갈망이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요르단 강 물 위에서 예수님께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요르단 강 그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늘이 갈라지는 하나의 환시를 보십니다.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당신 머리 위에 내리신다는 것. 이것을 보시는 거죠. 

 

세례자 요한의 증언대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물로 세례를 주는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그런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예수님의 머리 위에 내려오셨다. 이렇게 표현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세례에서 성령은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나는 유일함을 여기서 볼 수 있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비둘기로 드러나는 성령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비둘기 하면 구약 성경의 어느 구절이 생각이 나죠? 노아의 방주에 비둘기죠. (창세 8,9-12) 노아의 홍수 때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선포하는 평화의 비둘기 말입니다. 성령게서 예수님께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까닭은 단순하고 순수한 피조물을 통해 성령의 본성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로 물든 인간의 본성을 다시 깨끗하게 하시고자 당신의 유일한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 흠 없으신 분이, 죄 없으신 분이 스스로 죄 많은 인간과 함께 하신다는 것. 인간과의 연대성 그리고 요르단 강에 오시어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이 외아드님 예수님은 새로운 노아, 노아의 방주, 파산의 위험에 빠진 인간의 본성을 구할 의로운 선장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둘기는 인간에게 내려온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한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 비둘기 : 인간에게 내려온 하느님의 사랑

 

이제 하늘의 소리가 들립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복음서 저자 마르코가 제목처럼 1,1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 하느님의 아드님이 지금 하느님으로부터 선포되고 있죠.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드님이십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과 아드님으로서의 예수님의 관계성, 사랑으로 맺어지고 있죠. 

 

*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사랑) 아드님으로서의 예수님 

 

여기에 하느님께서 다음의 말씀을 덧붙여 하세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당신 마음에 드신다고 하십니다. 아니 심지어 예수님께서 아직 당신의 공적 직무를 시작하기도 전인데 이렇게 마음에 드신다고 기뻐하세요. 물론 구체적인 본문에 보면 말씀과 행적을 통해 드러나지만, 이렇게 마음에 드신 이유가 뭐겠어요? 흠 없으신 분, 죄 없으신 분이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그 세례를 죄 없는 분이 받으시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신다는 것. 인간과 하나 됨을 보여 주셨음에 하느님께서 마음에 드시고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무언가를 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린 것과 관계없이 처음부터 조건없는 사랑이었다라는 거죠. 

 

자,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요르단 강에서 올라오십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분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아요.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예수님 머리 위에 내려 앉았잖아요. 그 성령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을 광야로 몰았다라고 마르코는 이야기합니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12-13) 

 

 

 

자, 여러분들 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애서 다음 주에도 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만,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다. 예수님을 이처럼 광야로 내보냈던 때, 바로 하느님의 사랑 받으시는 아드님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지상 수행을 시작하는 순간이예요. 그런데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들어가는 예수님에 대해서 모호함 어떤 막연함 없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광야 이야기에서 마르코가 자신이 즐겨 쓰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제가 입문 개요 때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마르코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 '그리고 즉시' 여러분들 이거는 꼭 기억하셔야 돼요. 마르코가 가장 즐겨 쓰는 표현이 '그리고 즉시, 그리고 곧바로' 

 

* 마르코 복음에서 즐겨 쓰는 표현 : '그리고 즉시' (그 뒤에) 

 

자,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는데 막연함, 모호함 없이 바로 그리고 즉시라는 표현과 함께 바로 가셨다는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이렇게 즉시 광야로 내보냈다. 이 '내보냈다'는 동사, 참 재미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의 '내보냈다'는 것. 에크발레이(ἐκβάλλει)라는 동사인데요. 이 내보냈다라는 표현이 악마를, 더러운 영을 내쫓았다, 쫓아내다. 구마할 때 악령을 '나가라' 할 때 이 내쫓다 라는 동사를 똑같이 쓰는 겁니다. 마르코만이 쫓아낸다는 의미로 내보내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어요. 

 

마태오나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를 우리에게 물론 전해주는데 좀 더 자세히 풍성하게 전해 줍니다. 그런데 마르코는 풍성하게 전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더러운 악령을 쫓아내셨다라고 하는 동사를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냈다는 의미로서 똑같이 쓰고 있다는 거. 이 의미를 우리가 좀 알아야 되는데 이 의미는 다음 시간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c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8095%26menu_fid%3D8096&program_fid=8095&menu_fid=8096&cid=&yyyym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 신부, 마르코복음 기쁜소식, 세례 성령으로 세례, 세례자 요한, 물로 세례,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