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은총을 받기위한 첫번째 단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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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9-04-03 | 조회수1,95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 은총을 받기위한 첫번째 단어 ╋찬미 예수님 인간이 하느님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말, 인간을 아름답게 성화시키는 말, 하느님이 그 말을 듣고 가장 흐뭇해하시고 좋아하실 말, 무엇일까요? 오늘 읽은 데에 그 답이 있어요. 지금 이 자매님이 ‘죄인입니다.’ 그랬어요. 나오세요. 정답이에요. 제가 쓰던 묵주 드릴게요.. 적어도 하루에 몇 번씩 우리 입에서 나와야 할 말, 그리고 교황이든 주교든 사제든 수도자든 어느 누구 예외 없이 이 말을 존중해야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충격을 받았어요. 베드로 사도는 어릴 때부터 어부인 갈릴래아 호숫가 밑바닥까지 보는 사람이었죠. 다시 말하면 고기 잡는 프로였죠. 예수님은 물고기와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처음에는 배를 띄우고 그 배에서 뭍가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시더니, ‘자, 고기 있는 곳으로 가자.’ 그 프로가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아무리 스승님으로 모시기로 약속했지만, 어부인 제자들은 도대체 이 양반이 왜 그러나? 고기가 없을 것을 자신만만했지만 아무튼 뭐 스승님이 하라고 하니 그물을 풀었죠. 그런데 세상에! 배가 기우뚱 거릴 정도로 그물이 안 올라와, 배 하나로 모자라 동료 배를 불러 가득 채웠는데도, 두 배가 다 물에 잠길 정도야! 베드로의 동생이 누구에요? 안드레아 그리고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동업자가 누구에요?. 제배대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이 네 사람은 동업자에요 왜냐하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는 그물을 풀면 절대 한 두 사람이 그물을 못 끌어 올려요 지금처럼 기계가 있어서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동업자가 필요해요 이 광경을 보고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깜짝 놀랍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뭐라고 그래요?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높은 분이 내 앞에 계시다고 느낄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죠. 내가 감히 이분 앞에 서 있을 자격이 없는데!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내가 당신 앞에 어떻게 서있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뜻일 겁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내 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비참하고 하찮은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선생님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하느님이 내 앞에 앉아 계셨고 그 하느님이 고기를 잡아 주신 것입니다. 프로인 내가 밤새 피라미도 못 잡았던 실력이 무너지고 하느님 능력만 남아있던 겁니다. 살아있는 하느님을 체험하면 우리는 경외심을 갖습니다. 이 ‘경외심’이라는 것은 공포에 사로잡히는 단순한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참되게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고백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그 누가 죄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죄인입니다. 사제도 죄인입니다. 만일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고 하느님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죄인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죄인은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늘 의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속으로는 죄를 쌓고 있으면서도 불감증에 걸린 지 오래입니다. 아예 못 느낍니다. 처음에 도둑질 할 때는 바늘 하나 훔쳐도 잠을 못 자는데, 자꾸 훔치다 보면 나중에는 남의 집 마당에 매여 있는 소를 끌고 나오면서 휘파람 불며 나옵니다. 자꾸 때가 끼는 것이죠. 불감증에 걸리는 겁니다. 병중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못 느끼는 병, 회개 못 하는 병, 이런 사람들 가슴을 파헤쳐 보면 하느님은 안 계시고 대개는 사람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이 자기의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자기보다 겸손하고 존경받을 사람을 가슴에 채우고 살면 당연히 겸손해지지만, 대개 미운사람, 나보다 시원찮은 인간들, 나보다 덜 똑똑한 인간들, 나보다 못 가진 인간들, 그런 사람과 비교하다보면 자기 자신은 당연히 훨씬 나은 사람이 됩니다. 비신자인 남편과 비교하면 그래도 주일 지키는 내가 의인 쪽에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냉담중인 뒷집 아무개 보다는 주일미사 빠져본 적이 없는 내가 훨씬 더 하느님이 볼 때 의인 쪽에 속해있다고 여기실 거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나는 죄 지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비교 대상으로 삼을 때는 교만의 바벨탑을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놓지 못할 때는 죄의 불감증에 걸립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아예 못 느끼는 이 병은 암보다도, 에이즈보다도 무섭습니다. 암에 걸린 사람은 암으로 죽어서 얼마든지 천국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불감증 환자는 감기한번 안 걸리며 살다 죽었다 해도 절대 천국 못 갑니다. 두 번째 죄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죄인’들입니다. 부끄러운 줄 알지만 죄를 숨기지 않고 죄인으로 판단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이사야와 바오로와 베드로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가 하느님에게서 소명을 받는 장면이 1독서에 나옵니다. 이사야는 자기도 모르게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첫 번째가 ‘아이쿠 난 이제 죽었구나. 하느님 만났으니’ 마치 오늘 베드로 사도가 경외심을 갖고 ‘떠나주십시오’ 하는 그런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서 고백하죠. ‘나는 입이 더러운 사람입니다.’ 죄가 많기에 하느님을 본 순간 너무나 황송해서 이젠 죽었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입이 깨끗하게 되자 하느님의 일꾼으로 용기 있게 나서서 위대한 예언자로 탈바꿈을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 하느님은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말, 무늬만 천주교 신자에서 알맹이 까지 꽉 찬 천주교 신자로 바꿔주는 짧지만 내 인생을 바꾸는 말은 ‘죄인입니다’. 이사야도‘ 저는 입이 더러운 죄인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로 위대한 예언자의 첫 단추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오늘 2독서에서는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가리켜서 칠삭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진짜로 바오로가 7달 만에 엄마 배 속에서 나왔다는 말이 아니죠? 너무너무 모자라는 사람이다. 너무너무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 뜻이에요 뿐만 아니라 사도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요 사도로 불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그 바오로 사도는 실제로 어떤 전과가 있었죠? 신자들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너무 숨기고 싶은 창피한 과거를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로 뽑힌 뒤 어쩌면 그 약점 때문에 더 강한 사도가 될 수 있었어요. ‘죄의 밑바닥까지 떨어져보지 못한 사람은 은총의 깊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있죠. 본인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은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나 바오로 사도나 그리스도교 역사 이래 구약과 신약에 큰 별 같은 분이지만, 그 큰 별에 첫 번째 찍은 점은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 역시 부족한 인생이었습니다. 우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었고 성격도 거칠었어요. 용기는 있어 무언가 확신이 생기면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그러한 힘은 있었죠. 그러나 지혜도 없고, 어찌보면 잘하는 것은 고기잡는 것 하나인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장점은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을 만나 뜻밖에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을 때 즉시 고백합니다. 다른 어부들은 주저할 때 베드로 사도는 서슴지 않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으뜸 제자로 삼으셨고 주님은 그 못난 베드로 위에다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죄인의 영과 육위에 세상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교도소를 방문했더니 만나는 죄수마다 억울하게 들어왔다고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자기 잘못으로 교도소에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방의 한 죄수는 왕을 보고 고개도 못 들고 훌쩍거리고 있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왜 우느냐?’ ‘저는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감히 임금님 얼굴을 들어 쳐다볼 수 없습니다.’ 하며 이런 천한 죄인을 찾아 주신 임금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하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때 왕은 신하들에게 이 사람을 풀어주라 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모두가 의인이라 생각하는 이곳에 죄인이 왜 있느냐? 너는 여기서 살 사람이 아니다.’ 그 수백명 가운데 본인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사람만이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거죠. 성서에는 잘못을 인정하면 창녀나 나병환자나 세리도 모두 용서받고 은혜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추면 그 이유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누가 더 많은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인정하고 뉘우쳐서 고백하면 이사야처럼, 바오로 사도처럼 무능한 베드로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죄라도 숨기면 치사하고 비열한 인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솔직하게 삽시다. 하느님 앞마저 숨기지 맙시다. 아무리 불이익이 나에게 온다 해도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떳떳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인생에 하느님은 양 손을 뻗어서 그 사람을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19년 연중 제5주일(02/10) (서운동성당) -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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