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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비가 정말 심판을 이길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18 조회수1,074 추천수1 반대(0) 신고

 

성경은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한번 여러 시간 다른 일을 하면서 생각 좀 해봤습니다. 이 화두는 약 5년째 사순시기마다 하는 화두였습니다. 해마다 포인트가 조금씩 다른 면을 생각해봅니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 이런 말이 회자되곤 합니다. 삼국지도 10대 때 읽은 삼국지랑 20, 30대 각각 세대마다 같은 삼국지를 읽어도 그 느낌은 다르다고 합니다. 같은 내용인데 왜 그럴까요? 저는 이걸 예전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이 문제를 생각해봤습니다.

 

지금은 신앙의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지식도 쌓아지게 됩니다. 세상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 세상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고관이나 가치관에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라고 할까요? 이런 게 더 넓어집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입니다. 등산을 하게 되면 자기가 오른 만큼 시야가 들어옵니다. 중턱에서 바라보는 시야랑 정상에서 바라보는 시야는 완전 다릅니다. 마치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보내는 시간에 비유하면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해마다 이 부분을 묵상을 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자비라는 게 정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남의 아픔을 마치 자기의 아픔과 고통처럼 느낄 수 있는 여리고 여린 마음이 있어야만이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비의 문자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랑할 에 슬플 입니다. 사랑과 슬픔이 어우러진 상태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통 받는 이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비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자비심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또 다른 자비심이 있습니다. 동음이의어입니다.

 

이때 자는 스스로자자입니다. ‘낮출 비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낮추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자비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비심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말입니다. 여기서 낮추다의 의미는 겸손의 의미랑 비슷한 면도 있지만 아주 미묘한 차이가 좀 있습니다.

 

저는 올해는 이 부분에 대해 집중해서 묵상을 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인 눈높이입니다. 우리가 눈높이를 맞춘다고 할 때의 눈높이는 아래에서 위로 맞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위에서 아래로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눈높이를 조정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비의 마음을 찾을 수가 없을 겁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를 하려면 자신이 먼저 그 고통을 당하고 있은 사람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위치에서 타인의 심정을 바라봐야만이 이게 가능하게 됩니다.

 

배고픈 사람의 고통은 자신이 또한 배고픈 경험을 해 본 사람만이 남의 배고픔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역지사지의 마음은 바로 나의 위치에서 타인의 위치로 내려 가야만이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신을 낮추어 남을 바라볼 수 있는 자비심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비의 마음은 가 먼저일까 아니면 가 먼저일까요? 일단 문자에서도 자가 우선합니다. 사랑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이 슬픔입니다. 슬퍼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슬퍼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데 슬프다' 이 말은 얼핏 보면 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인들을 한번 보면 사랑하면 행복하다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물론 그건 당연한 내용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이 그런 상태의 마음일 때만이 상대의 슬픔을 이해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단순히 남의 고통만 바라보는 건 동정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 동정의 마음도 모질고 사악한 마음보다는 양순한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만 동정의 마음은 어쩌면 상대를 얕잡아보는 마음이 밑에 깔려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상대가 만약 안다고 하면 상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상대의 마음도 이런 자신의 마음을 보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고통을 바라보게 되면 상대방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상대방이 자신을 동정하는 마음이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 상대방에 대해 고마움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같은 행위를 하는 데도 받아들이는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마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하나는 자신을 동정한다고 생각하면 비관적인 생각이 들게 될 겁니다. 이렇다고 한다면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더 나을까요?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게 더 좋다는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비도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음에도 나옵니다. 사랑은 모든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비가 죄를 덮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고 '단언명제'로만 나옵니다. 구체적인 설명이 첨언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름 답을 찾았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입장에서 인간을 향해 하는 말씀일까? 아니면 인간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향해 말씀드리는 입장일까? 엄청 고민해봤습니다. 이걸 고민하면서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이 상황이 다음과 같은 상황일 때 적용되는 말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령 심판이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요? 일단 가장 먼저 마태오복음 최후의 심판 2531절 이하에 나오는 심판을 설정해놓고 한번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때의 심판은 양과 염소로 갈리는 것처럼 운명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고 하는 표현에서 심판은 단순하게 표현해서 죄를 지어서 받는 심판으로 이해를 하는 게 좀 더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고 하는 말씀은 우리가 심판 받을 때 우리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향한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만약 우리가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럼 염소무리가 있는 쪽으로 갈 운명에 놓여 있을 겁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그때 그 사람이 어떻게 일생을 살았는지를 면밀히 검토하실 겁니다.

 

나약한 인간인지라 세상을 살면서 선도 행할 때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살면서 비록 넘어질 때 넘어지더라도 또 회개하고 다시 말씀대로 살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며 자선을 베풀며 살았던 적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 나중에 하느님께서 모든 그 사람의 공과를 저울질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었는지를 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최후의 심판의 심판 기준은 바로 이 세상에 고통 받는 사람을 예수님처럼 받아들였는지 안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기준입니다.

 

예수님처럼 받아들였다는 건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건 바로 예수님께 자비를 베푼 것과 동일하다고 말씀하셨으니까 그럼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요?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강조하는 정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황금률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작은 이에게 자비를 베푼 게 예수님께 자비를 베푼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그때 설령 하느님의 말씀대로 잘 살지 못하는 허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허물인 죄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자비를 베푼 걸로 상쇄를 시킬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분명 하느님께서는 이점을 충분히 고려하실 것 같습니다. 그럼 그것으로 우리의 죄는 덮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베푼 자비로 저희의 죄를 묻지 않으시게 되는 결론이 되어 심판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비가 심판을 이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죄가 덮어진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겠습니까? 염소 무리가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양의 무리로 가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 상황이 바로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한 것 같다는 걸 묵상해봤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제 나름 묵상한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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