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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20 조회수947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원래는 새벽에 오늘 교황님의 특별공지 내용으로 우리나라 시간으로 새벽에 빛의 신비 묵주기도를 바치고 오늘 복음과 독서를 읽고 나름 정리를 해놓고 잠시 눈 좀 부친 후 교구 원로 신부님께서 어제 선종하셔서 교구청에 장례미사가 있는 날이라 공지에는 간단하게 하신다고 교구 홈페이지에 있었지만 사목국장 신부님께 제가 전에 본당 신부님으로 계셨기 때문에 혹시 장지에 참석가능한지 여쭤 보니 가능하다고 하셔서 장지에 갔다 온 후에 올려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다녀 왔습니다.

 

매일미사에 메모를 해놓았는데 그걸 집에 놔놓고 와서 그냥 다시 일하는 곳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을 프린트 해 나름 간단하게 정리를 해 이제야 올립니다. 사실 오늘 그냥 하루 건너뛸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하는 거 나름 하는 게 낫다 싶어 올리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도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여쭤봅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냥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그런 사랑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한마디로 말을 하면 그냥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수준입니다. 아주 포괄적인 내용입니다. 사실 눈에 보이듯 명확하게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 독서의 내용으로 이 내용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희는 죄악에서 비틀거리며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있으니 말씀을 받아들이고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만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이렇게 아뢰어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입술을 바친다는 게 이어지는 다음 내용일 겁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바로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 빠져서 하느님의 길을 외면하고 타락의 길을 걸을 때의 상황입니다. 이런 고백이 이어지니 하느님께서는 분노가 풀려 다시 이들의 마음을 고쳐 주시고 사랑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이처럼 하는 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일 겁니다. 그럼 찬찬히 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단순히 입으로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건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1계명은 바로 독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지금 죄악의 길에서 비틀거리고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하느님의 품안으로 오는 게 제일 급선무일 것입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우상숭배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느님을 제1순위에 두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다른 게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건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어쩌면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가령 세상 일에 빠져서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치 나중에 세상 일을 마무리한 후 마치 선심 쓰듯이 그때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것도 그렇게 하는 것만 해도 어디냐고 애써 자신의 신앙을 좀 더 돋보이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어떤 생각으로 바라보실까요?

 

그래 요즘 세상에 전혀 하느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인데 그나마 나를 외면하지 않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잊지 않고 기억해주어서 고맙구나이렇게 생각하실까요?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우리가 가지는 얄팍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나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더 가혹하게 문책하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저는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제 생각을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부족해도 그렇게라도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게 가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달란트 비유처럼 더 많은 책임을 묻게 되실 겁니다. 그만큼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있고 또 신앙을 더 먼저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면 그것은 그만큼 더 많은 은총을 주셨다고 볼 수가 있고 그럼 그만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맡겨주셨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지금 하느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 아니면 하느님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좀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안주하며 스스로를 자위하는 그런 마음을 하느님께서 보시면 정말 억장이 무너지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은총을 주셨으면 그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그런 하느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상황일 때는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하면 단순히 무슨 형상물을 미신처럼 생각하고 믿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주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우상숭배는 그것보다 더 넓은 의미입니다.

 

하느님보다 더 하느님처럼 여기는 모두가 우상숭배입니다. 하느님 자리를 탈취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모양이 바로 우리가 죄악으로 비틀거리는 모습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건 우리가 하느님보다 중요시하는 그런 위치를 다시 원래 그 자리 중심에 하느님의 자리로 위치시키는 게 바로 제자리로 돌아는 게 회개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오늘 독서 5절에 나오는 내용처럼 저희를 사랑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좀 더 거시적으로 말을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길에서 다시 하느님께서 걸어가라고 하신 그 길로 다시 선회를 해서 돌아오는 길이 바로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계명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에다가 이걸 추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른 의미에서는 어쩌면 사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굳이 두 번째 계명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두 번째 계명은 당연히 부차해서 따라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율법학자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긴 하되 그것도 그냥 단순히 사랑하는 게 아니고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그게 그 어떤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길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특급비밀 같습니다. 특급비밀이라고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가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급이라고 해서 어떤 특정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선종하신 원로신부님의 장지에서 봤습니다. 아들 신부님 같았습니다. 아들 신부님의 표정을 봤습니다. 영적으로 아들과 아버지라고 하는 관계 때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표정이 제가 봤을 땐 느낌이 달라보였습니다. 저는 이런 걸 잘 읽어내는 특이한 감수성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지만 그런 걸 떠나서 하나의 인간 대 인간으로 보면 한 신부님을 하느님 품으로 보내드리는 것이지만 그 신부님의 표정에서 슬픈 표정은 슬퍼서 슬픈 표정이라기보다는 그 표정은 또 다른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로 보내드리지만 이별을 하는 아쉬움은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나올 수 없습니다. 또 한 분의 신부님을 봤습니다. 저는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본 신부님이었습니다. 또 저희 본당에도 사목하신 신부님이셨습니다. 마지막에 하관을 다하고 헌화를 하실 때 신부님의 눈을 봤습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제가 알기로는 지금 은퇴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옆에서 들었습니다. 헌화하시면서 신부님, 잘 가세요.’ 라고 하시면서 눈물이 맺힌 걸 봤습니다. 이때 가슴이 짠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일 겁니다. 우리 모두 많은 고상하고 유식한 말을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유려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그냥 단 하나의 말씀 사랑이 하나의 말씀을 자신의 가슴에 품고 산다면 그게 바로 하느님을 자신의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우주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일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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