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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21 조회수1,062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할 때 예레미야 17장과 18장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사야 13장까지 시간을 들여 묵상하게 된다면 그냥 한눈에 독서와 복음이 들어올 것 같습니다.

 

역시나 오늘 복음도 잘 알고 있는 복음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큰 교만인지를 알려주는 복음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우리는 살면서 때론 자신이 남들과 비교를 해 좀 더 신앙이 경건하다고 한다거나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주위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하느님께서는 일침을 가하십니다. 이런 사람의 말로가 어찌 되는지도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도 제 자신을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한 적은 없는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처럼 교만한 적이 없는지를 살펴본다면 가슴이 찔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경건하다고 할지라고 하느님 눈 앞에서는 오십보 백보일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사람은 바리사이와 세리입니다. 두 사람은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갑니다. 바리사이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흔히들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대화의 주체는 하느님과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바리사이의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를 하기는 합니다만 입술은 하느님께 하는데 마음과 눈은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태도는 꼿꼿이 서서 합니다. 그만큼 자신은 마치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는 표시를 몸으로 표현하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어쩌면 고해소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 하는데 남의 죄를 들추어내며 고백하는 것과 아주 흡사한 것이 됩니다. 기도는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면 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이에 비해 세리는 기도를 하긴 하는데 일단 멀찍이 서서 합니다. 자기 스스로도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니 하느님을 뵐 얼굴이 없으니까 감히 하느님을 향해 눈을 들 엄두도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눈만 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슴도 칩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 보시기에 죄인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의로운 사람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였다고 하십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봤을 땐 바리사이가 도덕적으로나 나름 계명도 잘 지킨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 세리를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동족의 등이나 처먹는 사람인데도 더 의롭다고 하셨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하느님께서는 이런 마음이시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네가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다고 생각하느냐?” 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나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게 하나 있다고 보여집니다. 바로 시선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그 시선이 하느님을 향하느냐아니면 자신을 향하느냐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을 보지 않고 타인을 향한 시선이었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알고 자신과 하느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리사이는 입에서 자신이 하는 말만 하느님을 향한 것입니다. 눈도 바로 세리를 향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한번 우리 인간이 상상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봐도 얼마나 역겨운 태도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봐도 그런데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얼마나 역겹겠습니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빌려 말을 합니다. 1411절에 보시면 나는 죄인들을 그 죄악 때문에 벌하리라. 나는 오만한 자들의 교만을 끝장내고 포악한 자들의 거만을 꺾으리라.

 

물론 여기서 죄인들을 벌하신다고 하시지만 하느님께서는 또한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사람에겐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지만 교만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교만은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 17장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한번 살펴보면 22절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23절 이하에 너희 조상들은 내게 순종하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목을 뻣뻣이 한 채 내 훈계를 듣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26절에 희생제물과 예물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지만 27절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면, 불을 놓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오늘 바리사이의 태도와 너무나도 똑같지 않습니까?

 

바리사이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지금 하는 행동이 향기로운 제물인 것인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목을 뻣뻣이 하고 아무리 제물을 가져온다고 해도 그걸 받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불을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면 우리를 치시기는 하지만 치실 때 치시더라도 또한 싸매 주신다고 하십니다. 잘못을 꾸짓기는 하시지만 그 매로 인해 우리가 상처가 났어도 그 상처를 보시는 그 마음도 얼마나 아프신지 그것도 다시 싸매 주신다고 하시니 하느님의 마음이 얼마나 애처러우셨으면 그렇게 하시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오늘 세리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회개를 한 후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면 이처럼 하느님께서 해 주실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또한 한탄을 하십니다.

 

우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다.”고 하십니다. 바로 이 신의는 회개를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회개를 한다고는 하지만 그 회개의 마음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 마지막 말씀이 하느님께서 정녕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라고 하십니다. 바로 진정한 회개라는 것입니다. 이슬처럼 금새 사라지는 그런 회개가 아닌 회개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리처럼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알고 하느님을 멀리서 눈을 들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높혀 주실 것이고 하느님 앞에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자신이 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해 뻣뻣한 태도를 견지하는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시하는 그 사람을 나중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실지 누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집 짓다가 버려진 돌처럼 버림받은 돌이 하느님 집에 모퉁이돌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나중에 하늘 나라 가 보니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우편에 앉아 있을지 말입니다.

 

이런 걸 묵상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따라 가야할지를 한번 묵상해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 오늘 묵상을 하면서 좀 더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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