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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4주간 월요일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23 조회수1,025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의 핵심이 어디에 있을지를 나름 생각해봤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크기는 어떻게 형성되는지와 그 당시 구원이 이방인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오늘 복음을 보면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얼마든지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넓게 해석하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면이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가톨릭에만 한때는 구원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톨릭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구원의 문이 더 넓어졌다는 걸 천명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 탓 없이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다고 해도 양심에 따라 살면 하느님의 자비가 미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칼라너 신부님께서 주장하신 익명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 개신교 성경이 우리랑 약간 번역이 다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 표현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개신교를 절대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개종한 걸 아주 잘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침노해서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랑 조금 번역이 다릅니다. 저는 침노라는 건 별로 좋지 않은 표현이지만 천국만큼은 침노해서라도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고 예전에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일 겁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천국을 가야 된다는 그런 의지적인 표현일 겁니다. 결국은 천국에 간다는 의미는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일 겁니다. 그렇다면 복음에서 유다인이 우리와 비유를 하자면 우리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일 거고, 이방인은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라고 비유를 하면 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구원을 보장받았다고 안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이방인이라도 예수님의 손길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실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은 사람에게 구원의 문이 더 열려 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당연히 구원이 보장될 거라는 믿음이 컸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저는 오늘 이런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묵상하면 이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할 때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경주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얻을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복음 속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 인물은 예수님과 카파르나움의 한 왕실 관리와 그의 아들입니다. 왕실 관리의 아들이 지금 죽을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복음에서는 그냥 아들로만 나오는데 실제로 보면 외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들이 죽게 생겼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카나에 계신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제가 지도도 보고 했지만 신약성경 200주년 주석서를 보니 약 2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금이야 도로 사정이 좋고 해서 교통수단도 발달된 사정이라 그렇게 멀리 느껴지지 않지만 2000년 전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건 아주 먼 거리일 겁니다.

 

이 사람의 신분이 왕실 관리입니다. 이 정도 신분이면 어느 정도 세상에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신분일 거라서 나름 세상 권력으로라도 좋은 치료 방법을 다 강구해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방법이 없어서 그런지 예수님께 최후의 수단으로써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 자기 아들의 병을 좀 고쳐달라고 청을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청하였다고 나오지만 실제 이 청하다의 헬라어의 의미는 반복해서 거듭 청하였다는 그런 의미의 동사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절박한 사정입니다. 아들의 생명이 죽어가는 입장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매달렸을 겁니다.

 

실제 예수님을 얼마나 신뢰를 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을 탓하시는 면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이적과 표징을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볼 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그런 안타까운 심정도 녹아 있을 것 같습니다.

 

간청을 드리면 같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아들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만 돌아가면 아들이 살아날 거다.”라고 말씀만 하시고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돌아가긴 갑니다. 아마 복음에는 없지만 많은 낙담을 하며 발걸음을 돌렸을 겁니다. 복음에는 믿고 떠났다고 나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때 믿고의 믿음의 정도는 반신반의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자기 종들과 중간에서 마주칩니다. 종이 아들이 살아났다.고 말을 합니다.

 

이 표현 그대로만 놓고 봤을 때 거의 죽음에 임박한 상태까지 갔다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때 이 관리가 예수님께서 돌아가면 아들이 살아날 거라는 말씀을 정말 제대로 확신을 한 상태로 돌아갔다면 놀란 상태로 곧장 집으로 먼저 아들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야 하는 게 정상일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뜬금없이 아들이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전날 오후 1시부터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관리는 왜 아들이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물어봤을까요? 물론 복음에는 그 이유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황상 유추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아들이 실제 예수님의 어떤 권능으로 나았는지, 아니면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우연히 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가능성을 두고 물어봤을 개연성이 아주 큽니다.

 

근데 열이 떨어진 시간이 예수님께서 살아날 거라고 말씀하신 그 시간과 동일한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이 관리는 모르긴 몰라도 아마 예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인 치유 권능으로 자기의 아들이 살아난 것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을 했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말씀이 떨어진 그 시점에 열이 떨어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하면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바로 그 시간이라고 나옵니다. 사실 영어 성경과 비교해도 이 번역은 맞습니다. 번역은 맞지만 느낌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말 복음 뉘앙스와 영어 복음 뉘앙스 차이가 납니다. 영어 복음의 뉘앙스는 정확하게 딱 그 시간이라는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은 아주 놀라웠을 겁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약을 복용했을 때 약 효과가 바로 나타난다면 그 약의 효능이 상대적으로 더 좋다고 인식하지 않습니까?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그 순간에 바로 아들이 낫기 시작했다는 그 의미에 예수님의 말씀과 권능의 힘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시간을 확인한 점에서 처음에 이 사람이 반신반의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좀 극단적으로 말을 하자면 오리발 내는 식으로 예수님과 상관없이 치유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관리는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복음을 좀 유심히 잘 보게 되면 물론 아들이 살아나게 되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도 할 수가 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보면 문맥상 복음을 이해하자면 아들이 낫기 시작한 시간을 알고 난 후에 예수님의 치유 권능을 자기가 인지를 했기에 그와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게 좀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게 오늘 복음 내용의 끝입니다.

 

이 이방인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심리상태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의 그때 심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갔을 겁니다. 상황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적을 행하지 않으시면 믿지 않을 거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돌아가면 아들이 나을 거라고 하셨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 했던 것입니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 반 정도라도 믿었다면 왜 믿었을까요? 어차피 아들을 살릴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번 잘 살펴보시면 반이라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유추를 하는지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이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일 수가 있는데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전까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믿는 게 아들에게도 더 나을 거라는 판단을 했을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높을까요? 왜냐하면 자신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어쩌면 아들의 생명이 좌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럼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자식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실제 예수님의 말씀이 잘 와 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잡지 못해 아들이 죽게 되는 상황을 좌초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완전히 믿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정도라도 믿을 수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냥 거의 완전 없다고 봐야 될 겁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고 하면서 믿음이 성장하지 않겠습니까?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관리는 실제 살아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오늘날은 그와 같은 대체 수단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새기는 게 바로 2000년 전에 나오는 관리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기 아들의 생명을 되찾은 것을 경험한 것과 같을 겁니다.

 

우리도 이처럼 말씀으로 믿음을 성장시킬 수가 있다는 걸 한번 묵상하는 게 오늘 복음이 저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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