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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는 자의표지(II) (요한8:21~4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01 조회수99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 4. 1.

믿는 자의표지(II)

 

(요한8:21~47)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25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26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27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43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45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46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입증할 수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면,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 47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3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구원과 참 행복에 있어서의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열망해 야 하는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가 어떻게 인간 세상에 투영되어 나타나는지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31절부터 정말 믿는 자들의 표지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며 가짜 믿음을 가진 마귀의 자식들의 특징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내말에 머무는 자이고 두 번째가 진리를 아는 자이고 세 번째가 자유케 된 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첫 번째 특징인 내 말에 머무는 자는 말씀과 삶이 괴리의 상태에서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그런 사람이 아닌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지요?

그리고 믿는 자들의 두 번째 특징인 진리를 아는 것진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해서, 즉 인간의 자격이나 업적 등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과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과 기쁨에 이 를 수 있다고 믿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로 참 행복의 절정인 구원에조차 이를 수 있다고 믿고 행하는 이들은 진리를 아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부터 믿는 자들의 세 번째 특징인 자유케 된 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지금 믿는다고 하면서 자유하지 못한 자들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유가 뭡니까? 인류의 문화사를 돌이켜보면 인류의 모든 역사는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운동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미국의 노예 해방이 라든지, 조선이 일제 36년에서 해방된 사건이라든지, 미국의 독립,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대혁명 등 세계의 역사는 억압하려는 자들과 자유를 얻으려 하는 자들의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위한 투쟁이 이쯤 되었으면 이제 자유에 대한 갈망이나 몸부림이 줄어들어야 할 텐데 인류는 점점 더 자유를 향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계 곳곳에 돌고 있는 전운(戰雲), 과격해 지는 시위의 현장, 현재보다 나은 상대적 행복의 추구 등 모든 것의 근저(根柢)에는 그 모양은 다르지만자유의 성취라는 영원히 풀지 못할 인류의 숙제가 그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인류는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데 자유에 대한 갈망은 더 커져만 가는 것입니까?

인간들이 자유에 대한 정의를 잘못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정의하기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막는 억압의 대상에게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 합니다. 내가 묶여 있는 속박과 규제로부터 벗어나 내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견 맞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자기들이 무엇에 의해 묶여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엉뚱한 것들을 대적으로 오인하여 저항을 하는 삶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해방되어야 하는 억압의 주체는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반복해서너희가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행하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들은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인 죄가 시키는 대로 살다가 그가 삯으로 주는 죽음을 받아들고는 영원한 어두움 속에서 이를 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자유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8:32-36)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세상의 주인은 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원하는 모든 자유의 성취는 체제가 바뀐다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구속하는 죄가 있는 한 구속 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질서를 어기고 하느님 앞에서의 자유를 구속하는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절대 자유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엉뚱한 자유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시작된 마귀의 속임수였습니다.

 

(창세3:1~5)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마귀가 무엇으로 하와를 속입니까? 선악과만 먹으면 네가 하느님과 같이 되어 하느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자유를 상급으로 걸어 하와를 속이고 있습니다. 하와는 마귀에게 속아 오늘날의 인류가 정의하고 있는 그 엉터리 자유에로의 갈망에 선악과를 덥석 물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고 싶었던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최초로 찾아온 것이 형제간의 살인이었습니다. 인간이 정의하고 추구하는 세상적 자유는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어서 그 자유의 열매는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의 살해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절대자에게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자유를 향한 죄인들의 공통된 염원이 오히려 역사 속에서 다툼과 전쟁과 분열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것을 한 마디 로 라 칭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자랑하고 증명하기 위해 태어나고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죄 속에서 태어나,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을 죄의 종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기까지는 그 죄가 지향하는 나도 하느님처럼이라는 자아숭배의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닿으려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7장과 8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그대로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과 가능성 을 놓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준수하여 구원에 이르고 선에 이르겠다는 그들의 모습, 율법을 들어 자신들을 증명하고 자랑하기 위해 자신들보다 못나 보이는 가련한 여인과 자신들의 어두움을 지적하는 주님을 살해하려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죄의 종이 되어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자하는 죄인들의 특징을 그대로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 죄의 종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루가4:18~19)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은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셔서 바로 당신이 포로 된 자 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러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라 말씀하시곤 바로 당신이 자유케 하시는 아들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에 의해 자유하게 된 사람들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죄란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 하느님이 부어주시고 공급하시는 하느님의 생명력을 거부하고 자기가 자 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주관하고 이끌어가겠다고 하며 그러한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모든 생각과 시도와 행위들을 가리켜 죄라 합니다.

따라서 죄에서 자유하게 된 진짜 하느님의 백성들은,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하느님의 생명력으로 풍성히 채워질 때 가장 행복 할 수 있다는 것을 올바로 자각하고 그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이 부인되고 하느께 속박되는 것을 자유라 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이라 불렀을까요?

(요한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본성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 조금 전에 우리가 창세기 3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마귀의 거짓말은 너희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으니까 너희의 힘과 지혜와 가능성 을 의지해서 행복과 만족에 도달하도록 해,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고 자존심 상하는 삶이니까입니다. 거기에 속고 있는 자들이 마귀의 자식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들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율법지킴과 절기준수를 들어 간음한 여인과 주님을 살해하려하는 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참으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옳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올음의 유일한 판단기준은 그것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초막절 등의 절기를 지키며 종교 행위 들을 열심히 한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하느님께서 율법에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순종하여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그건 율법에 근거한 객관적 옳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적 옳음이 나의 자랑과 자신의 존재 증명에 쓰이게 될 때 그것은 항상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상해와 살해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위선이라 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영광을 위해 (마태6:2) 남에게 보이기 위해(마태6:5), 다른 말로 자기 자랑을 위해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자기 숭배 교에 빠진 자들이지 절대 하느님을 경배하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15:7~8) 7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를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기 영광을 위해 행하는 그 어떤 선해 보이는 일도 다 위선이며 그러한 위선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존경하는 듯해도 마음은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해방이 되어 하느님께 속박되고 진정한 자유자가 되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이들의 삶은 당연히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수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 이외의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며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가 내가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나음과 옳음과 자랑과 증명을 위해 남을 해치는 행위가 어찌 하느님의 은혜로 죄에서 자유케 된 자들의 삶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죄의 종이며 죄 속에 살다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그러한 죄의 종들 을 자유하게 하기 위해 당신이 오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자들은 그 자유로 남을 섬기는 삶을 산다고요.

(갈라5:13) 13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이렇게 자유하게 된 성도의 삶은 섬김과 종노릇으로 특징 지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노예들은 절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의 주인인 죄가 절대 그러한 섬김의 삶, 종노릇의 삶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6:20)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죄의 종들은 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이러합니다.

(로마3:10~18)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3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 혀로는 사람을 속이고 입술 밑에는 살무사의 독을 품는다. 14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15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죄의 종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기쁨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자랑과 자기 존재의 증명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돋보이고 드러나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잘났냐 누가 옳으냐를 증명하는 싸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 하시느냐에 대한 대답을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하게 된 참 신앙인들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이웃을 사랑해 주고 섬겨주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주장이 객관적으로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그 것이 다른 이들을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하면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못 해? 나는 이렇게 성경을 많이 공부했는데 당신은 왜 그 정도밖에 못 돼?’ 이러한 권고가 옳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만일 그러한 권고가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끌어내리는 결과로 이어졌다면 그 건 죄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전10:26~33) 26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27 불신자 가운데 누가 여러분을 초대하여 여러분이 가고자 한다면, 양심을 따져 보지 말고 여러분 앞에 차려 놓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으십시오. 28 그러나 누가 여러분에게 이것은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하고 말하거든, 그것을 알린 사람과 그 양심을 생각하여 먹지 마십시오. 29 내가 말하는 양심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 사실 무엇 때문에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판단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30 내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함께 하면, 내가 감사하는 그 음식 때문에 비난받을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32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33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때 시중에 나오는 모든 고기는 우상에게 바쳐졌다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성도가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로 편가름이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표면적으로 성도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이 꺼림칙하더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하면 먹고 불필요하면 먹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선택과 행위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닌 하느님께 영광이 되느냐 아니냐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죄에서 자유하게 된 성도들은 이렇게 하느님의 기쁨만이 그들의 관심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처지나 상황의 개선이나 발전이나 향상에 관심이 있지 않고 그 처지와 상황과 사건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에 관심 이 있습니다.

가난한 상태에 놓인 자유자는 그 가난함 속에서 부유함을 구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 않고 그 가난한 삶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까를 더 먼저 생각합니다. 질병 속에 있는 자유자는 그 질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에 앞서 그 질병 속에서도 어떻게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질병의 치유에 관한 기도는 그 다음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이 그 인내와 섬김과 순종을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들 때 그들은 희열을 느낍니다.

(사도5:40~41)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6:15) 15 그러자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최고회의(공회) 앞에 잡혀가 이제 곧 돌에 맞아 죽게 될 스테파노의 얼굴이 천사 같았습니다. 천사 같은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한 일을 보세요.

(사도7:59~60) 59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자기들의 옳음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율법을 들어 스테파노을 때려죽인 유대인들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용서 해 달라고 기도하며 죽은 스테파노, 그 둘 중 어떤 사람이 승자입니까?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원수까지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임을 알고 죽어가면서까지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다 간 사람과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에는 아무 관심 없이 자기들의 명예와 자랑과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율법을 들어 사람을 때려죽이고 있는 그 무리들 중 누가 하느님 나라의 승자냔 말입니다. 당연히 스테파노입니다. 그가 바로 자기 숭배라는 죄에서 자유하게 된 진정한 자유자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 반복해서 죄에서의 해방이라는 말과 자아 숭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을 혼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에서의 해방이 곧 자기 숭배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어디에 있습니까? 죄는 자기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자기가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고백한 것입니다.(시편51:5)

예수를 알기 전의 라는 전 존재는 죄로 가득 차 있는 총체적 죄입니다. 따라서 죄에서의 해방은 나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에 묶여 있게 되면 절대 하느님이 주시는 자유로 다른 이를 섬기고 하느님의 기쁨 을 위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죄에서 풀려난 사람은 그렇게 나에게서 풀려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왜 짓습니까? 나를 기쁘고 만족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짓습니다. 우리는 그 저주받을 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죽음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나 어떤 것을 선택 할 때에 먼저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이냐 하느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냐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하게 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 과 탐심을 따라 올라오는 욕구를 하느님의 기쁨을 위해 자제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자유는 나를 숭배하기 위해 하느님의 힘을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어낼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언제라도 하느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나를 몽땅 바칠 수 있는 자유인 것입니다.

(로마12:1)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자유자들은 자신의 몸을 죄에게 드렸던 때와 같이 이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산제물는 살아있는 제물을 끌고 와서 회중 앞에서 죽이는 것을 산제물이라 합니다. 죽은 제물은 이미 숨이 끊어져 모욕될 것도 없고, 자존심 상할 것도 없고, 수치 당함과 분노도 없습니다. 그러나 산 제물은 다릅니다. 산 제물은 대중을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수치와 고통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를 산 제물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올바른 신앙생활은 그렇게 모욕당하고 밟히고 손가락질 당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당해주고, 섬겨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느라 그렇게 산 제물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산 채로 군중들에게 모욕당하시고 심지어 벌거벗겨지셔서 십자가에서 수 시간을 매달려 있었다는 것 기억하세요. 그게 산 제물의 표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외치는 자가 바로 산 제물로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권고는 이미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이 주어졌음이 전제된 명령 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은혜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우리 성도들이 그 자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잘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미혹하는 죄의 거짓말에 너무 쉽게 속아 의의 종들이 죄의 종처럼 살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로마서 7장 후반부에서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 한 것 아시지요? 사도 바오로도 자신의 언행과 생각을 돌아보면서 자신을 가리켜 죽음의 몸이라 칭할 정도로 죄의 세력은 집요하며 강력하게 우리를 노립니다.

(로마7:14~25) 14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율법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16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혜로 죄에서 자유롭게 된 자유자들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마치 자신이 죄의 종이었던 때와 똑같이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고 죄의 속임수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맥없이 죄에게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이제는 죄가 우리를 다스릴 수 없는데 왜 내가 죄의 거짓말에 속고 있는가? 나는 자유인이다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다시 확인하고 반추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5:20-21)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죄가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왕 노릇하며 우리의 거룩을 완성시켜 가고 계신데 우리가 어찌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6:15~23) 15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18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 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 종에서 의 종으로 신분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성도입니다. 그런데 죄는 호시탐탐 우리를 거짓으로 미혹하여 우리가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잊게 하고 다시 죄의 종처럼 살도록 사로잡아 가려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신분에 맞는 삶이 어떤 삶인지 도 분별하여 알고 있어야 죄의 거짓말에 속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은 네가 네 인생에 왕이 되라,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속지 않습니다. 참 자유인은 오히려 하느님의 은혜가 자신을 꽁꽁 묶어 온전한 거룩으로 이끌어 가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아숭배교 라는 무섭고 추한 잡교에서 벗어나 자신을 낮추고, 유명해 지는 것과 자기 자랑을 지양(止揚)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까? 왜 사람들은 이 역사와 공간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까? 그것이 정말 생명의 보람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 불확실한 사람들이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나름대로의 불멸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낳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족보를 만드는 것도, 큰 업적을 쌓으려 하는 것도, 자식들에 게 제사를 요구하는 것도 모두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이름을 내고 싶은 나약한 죄인들의 마음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인간 스스로 불멸과 영원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자유인은 스스로 불멸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은 소멸 되고 하느님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소멸 속에 잉태되어 피어나는 불멸이 진짜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잊지 마세요. 애벌레가 소멸되어 호랑나비가 탄생하듯이, 한 알의 씨앗이 소멸되어 찬란한 새 싹이 돋듯이 자연의 법칙 속에서의 소멸은 항상 불멸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멸을 두려워합니다. 자기가 부인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게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소멸됨으로서 영원한 불멸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죄에게 속지 말고 우리를 부인하여, 다른 말로 자신을 소멸하여 불멸을 잉태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자유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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