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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내가 그리스도다 (루카21,5-1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24 조회수1,32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1월 24일 화요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내가 그리스도다 (루카21,5-11)

   오늘의 묵상 (2019.11.26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염철호 요한 신부

1독서<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14,14-19)

나 요한이 14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셨는데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16 그러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왔는데그도 날카로운 낫을 들고 있었습니다.

18 또 다른 천사가 제단에서 나왔는데그는 불에 대한 권한을 지닌 천사였습니다그가 날카로운 낫을 든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날카로운 낫을 대어 땅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들을 거두어들이십시오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19 그러자 그 천사가 땅 위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들이고서는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다 던져 넣었습니다.

 

화답송 시편 96(95),10.11-12.13(◎ 13ㄴ 참조)

◎ 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고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은 소리쳐라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 뛰고숲속의 나무들도 모두 환호하여라

○ 그분이 오신다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그분은 누리를 의롭게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

복음 환호송(묵시2,10 ) ○ 주님이 말씀하신다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

 

복음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루카21,5-11)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제1독서 (묵시록14,14-19)

 

"흰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14)

 

새 성경은 '흰 구름'과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신 구름' 이 분리된 별개의 구름을 지칭하듯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신 '구름'(nephelen) 앞에 정관사 '텐'(ten)이 동반되어 나온다.

그러므로 '흰 구름 그 위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신 것이다.

 

그리고 '앉아 계셨는데'로 번역된 '카테메논'(kathemenon)는 '자리에 앉다', '좌정하다' 라는 뜻을 지닌 '카테마이'(kathemai)의 현재 분사로,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신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그가 앉아 있는 '흰 구름'(nephele leuke; 네펠레 류케) 이나 '사람의 아들과 같은 분' 은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분께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다니엘서7장13-14절)는 다니엘의 예언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본문에 언급된 '사람의 아들 같은 분'(homoin hyon anthropu)는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묵시록 1장 13절에서도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면모를 소개하면서,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라고 묘사한 바 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로 소개하셨다.

 

'인자'(人子) 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인생)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사람에게서 태어났다는 의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자로 소개하심으로서 자신이 바로 다니엘이 예언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시기 보다는, 이 칭호로서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환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는 금관 있었다.

여기에서 '쓰고'로 번역된 '에콘'(echon)은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 분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계속해서 얹혀 있는 금관의 면모를 더욱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금관(스테파논 크뤼순; stephanon chrysun; a crown of gold)에는 통치와 왕권그리고 승리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면모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머리에 쓰고 계신 이 금관은 묵시록 9장 7절에서 지하에서 올라온 메뚜기가 그 머리에 쓰고 있던 것을 연상시킨다.

 

"머리에는 금관 같은 것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메뚜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한 존재로 거짓 그 자체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요한8,44). 즉 메뚜기(황충)가 '금관 같은 것' 쓰고 있는 반면에,  진정한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금관을 쓰고 계신 것이다.

 

한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계시지만, 동시에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다.

본문에서 '낫'으로 번역된 '드레파논'(drepanon)은 본래 '뜯다' 라는 뜻을 지닌 동사 '드레포'(drepo)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나뭇가지를 치거나 풀이나 낟알을 베는 데 사용하는 농기구이다(신명16,9; 이사18,5).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는 본장에서와 마르코 복음 4장 29절의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학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는 언급에서만 등장한다.

'날카로운'으로 번역된 '옥쉬'(oksy)는 '날카로운'(sharp)이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낫이 시퍼렇게 날이 선 매우 날카로운 것임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여기서 특별히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시는 최후의 심판이 신속하고 엄중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종말의 심판을 추수(수확)와 관련시키는 이러한 상징적 묘사는  요한 복음 4장 35절과 마태오 복음 9장 37-38절에도 발견된다.

  

"그는 불에 대한 권한을 지닌 천사였습니다" "그 날카로운 낫을 대어 땅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들을 거두어 들이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18)

 

본문에 언급된 '불'(투 퓌로스;tu pyros)에 대한 권한을 지닌 천사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은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마태18,8; 루카9,54; 2테살1,7).

 한편,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이 천사는 묵시록 8장 3-5절에서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아 땅에 던지는" 천사를 연상시킨다.

 

또한 여기서 '거두어 들이십시오'로 번역된 '트뤼게손'(trygeson)은 '따다','모으다' 라는 뜻을 지닌 '트뤼가오'(trygao)의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그리고 '익었습니다'로 번역된 '에크마산'(ekmasan) 역시 '성숙해지다', '절정에 다다르다' 라는 뜻을 지닌 '아크마조'(akmazo)의 부정 과거이다.

이것은 포도송이가 이미 익었기 떄문에, 즉  죄인들의 죄가 절정에 다다랐기 때문에  빨리 거두어야만 한다는 매우 시급하면서도 준엄한 뉘앙스를 함축한다.

 

여기서 '포도송이'로 번역된 '투스 보트뤼아스'(tus botryas)'보트뤼스'(botrys)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은 자들이 "하느님의 분노의 술을 마실 것이다. 하느님의 진노의 잔에 물을 섞지 않고 부은 술이다" 는 묵시록 14장 10절의 언급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묵시14,19.20).

따라서 포도 추수에 대한 천사의 명령은 땅에 거주하는 악한 세력들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느님의 분노의 큰 포도확에다 던져 넣었습니다'

 

여기서 '큰'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하느님의 진노가 그만큼 크며, 심판받을 악인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복음(루카21,5~11)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들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곳이다." (5~6)

 

마태오 복음 21장 5~19절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종말의 여러 징조들, 그리고 대박해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관한 교훈이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을 하신 후, 그 일이 언제 일어나는지 그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시고, 대신에 전쟁, 반란, 민족분쟁, 지진, 기근, 전염병, 천체의 큰 표징 등의 종말론적인 징조들(Eschatological Signs)을 언급하신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대박해를 겪어야 할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신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예언 성취의 시기를 알고 싶어하는 제자들에게 예언이 성취될 때에 가져야 할 바른 자세에로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키신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더불어 종말의 징조들이 복합적으로 예언됨으로써, 대박해를 겪어야 할 자세에 대한 교훈은 당시 제자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종말의 시기를 살아갈 성도들에게도 확대되고 있다. 


마태오 복음 21장 5절~19절까지는 성주간의 올리브산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태오 복음 24장과 25장 및 마르코 복음 13장과 병행을 이루며, 예루살렘 성전 파괴 및 종말과 그리스도 재림에 관계된 예언들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소묵시록'(Little Apocalypse)이라는 별명이 불려지기도 한다.

 

그중에 21장 5절과 6절은 올리브산 설교가 주어진 동기가 되는 예루살렘 성전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은 일차적으로 A.D.70년에 발생할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예언을 성전 안에 계시다가 성전 밖으로 나오실 때 주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마태 24,1; 마르 13,1), 루카 복음사가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계속적으로 머무르시면서 주신 것처럼 묘사한다.

 

루카 복음사가 성전에서 나갔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또한 몇몇 사람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며 질문한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 성전 내부에서 자세하게 볼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가 이렇게 다르게 기록한 것은, 지금까지 성전 안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들과 치열한 논쟁의 절정으로써 성전 멸망을 다룸으로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맞이할 최후의 심판을 보다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대교의 구심점이 되는 성전이 붕괴된다는 것은 동물의 희생을 통한 구약의 제사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단 한 번 흘리신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과 더불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잘못된 신앙에 대한 심판적인 의미도 가진다. 

그리고 루카 복음 사가는 장소적 이동보다는 등장 인물들의 시선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 시킴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성전의 화려한 외적인 아름다움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신앙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두 렙톤과 같은 경건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의 진실된 신앙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한편, 루카복음 21장 5절의 '아름다운 돌'로 변역된 '리토이스 칼로이스'(lithois alois; beautiful stones)는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된 희고 큰 대리석을 말한다. 이 돌은 주로 성전의 기초와 기둥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자원 예물'로 번역된 '아나테마신'(anathemasin; gifts dedicated to God) 원형  '아나테마'(anathema)는 '아나티테미'(anatithemi)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성전에 바쳐진 물건', 즉 '봉헌된 제물'을 가리킨다.

 

이 자원 예물들은 임금이나 지도층에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성전에 바친 물건으로서 성전을 장식하고 전시하는 데 사용된 물건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이 아니라 영과 진리안에서 영이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었다(요한 4, 20~24).

 

루카 복음 21장 6절의 '때가 올 것이다'에 해당하는 '엘류손타이 헤메라이' (eleusontai hemerai; the days will come)에서 '때', '날'로 번역된 '헤메라이' (hemerai; the days; the time)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예비된 날로서 바로 하느님의 진노가 현실 가운데 드러나는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A.D. 70년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토(Titus)가 이끄는 부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성전이 화염에 휩싸여 전소될 때를, 40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예지 능력으로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라는 표현은 철저한 파괴와 멸망에 대한 예언인데, 루가 복음 사가는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 사가에 비해서 성전 파괴가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는 오해를 막기위해서 성전 파괴를 마지막 날들에 일어날 많은 종말적인 사건들 중 하나로만 기록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승천 직후에,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바로 이 세상의 종말이 있을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것을 기다렸다.

 

루카 복음 사가는 이러한 당시 사람들의 상황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의 도래를 분명하게 구분함으로써, 재림의 지연이 예수님의 예언과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밝히며, 또한 인내심으로 기다리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루카21,20~28).


2012년 11월 27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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