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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풍병자의 치유에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것 중에 무엇이 더 쉬우냐?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15 조회수1,490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히브리서 4,1-5,11

형제 여러분, 1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타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과 초대를 받았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 일부 사본에는 그것(말씀)은 그것을 들은 사람들과 신앙으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다. 어느 본문을 따르든 그 뜻이 다소 애매하다. 그들은(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신앙으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말씀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는 이 문장에서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낫다.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 3절은 문장들이 잘 연결되지 않아 이해하기 다소 어렵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설인 아래의 4,4-10과 함께 읽으면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느님은 창조의 일을 끝내셨을 때 인류에게 마련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불신하고 배반했기 때문에 분노를 사서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4 사실 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 창세 2,2 후기 유다교나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에서는 하느님의 날에 대해 말할 때 창세기의 이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오직 여기서만 인용한다. 하느님의 안식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받은 안식과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안식이 일치한다.

 

5 또 여기에서는,“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였습니다.

-. “여기는 지금 설명하는 구절인 시편 95.11를 말한다. 하느님이 누리시는 안식과 그분이 약속하신 안식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11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 3.7부터 계속되어 온 훈화는 이제 결론에 이른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불신하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아 안식을 얻지 못했다. 그러한 선례를 그리스도인들은 따르지 말아야 한다.

 

 

 

 

 

마르코 복음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 카파르나움의 집은 시몬 베드로의 집이다.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 “말씀을 전하셨다는 표현이 4.43;8.32에도 있는데. 본디 초대교회의 복음선포 활동은 그렇게 일컬었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지붕을 벗겼다는 것은 우리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나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를 감안하면 납득이 간다. 흔히 방 한 칸에 흙벽을 쳤는데 방바닥은 널찍하지만 흙벽은 올라갈수록 좁아져서 지붕 면적이래야 두 평방미터 남짓했다. 밑은 넓고 위는 좁은 나지막한 굴뚝 같은 집이다. 지붕에는 흔히 나무막대기를 걸쳐놓고 나뭇가지나 갈대 같은 것을 깔았다. 그러니 쉽게 벗길 수 있었다. 아울러 옥외에는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붙어 있기 때문에 쉽게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 5ㄱ절과 11절은 자연스레 연결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에게 말하니 일어나 그대 침상을 짊어지고 그대 집으로 가시오’.” 그와는 달리 아들아 ,그대의 죄가 사해졌소라는 사죄선언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때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또다시 없을 뿐 아니라 루카 7.48을 제외하면 다른 기회에도 사죄선언을 하신 일이 없다. 그분은 죄를 용서한다는 말씀을 하시기보다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상종하심으로써 잘못을 용서해 주셨다.

 

그렇다면 사죄권 논쟁은 후대에 형성.삽입된 것이다.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하기에 앞서 어느 전승자가 사죄권 논쟁을 꾸며 이 자리에 끼워넣었을 것이다. 전승자가 그것을 형성.삽입하게 동기인즉,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죄권을 행사했는데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전승자가 사죄권 논쟁을 바로 이 자리에 삽입할 수 있었던 것은 죄로 말미암아 병이 난다는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 유다인들이 학수고대한 메시아나 인자조차 사죄를 선언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기껏해야 죄인들을 멸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는 범죄하지 않도록 선도할 임무를 띠었다.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 실증적 관점에서 본다면 점검할 수 없는 사죄선언이 점검할 수 있는 치유이적보다 쉽다. 그러나 가치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죄선언이 치유이적보다 어렵다.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 “사람의 아들은 신약성서에서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는 존칭이다. 네 복음서에서는 예수 친히 인자로 자처하셨지 제삼자가 그분을 인자라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종말에 재림하실 인자, 수난하실 인자. 이승에서 활약하는 인자로 자처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 친히 인자로 자처하셨다고 보는 설보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인자로 추대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이승의 인자는 사죄권,안식일 전권을 행사하신다. 어록에도 이승의 인자에 관한 말씀이 있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따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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