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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 주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23 조회수1,136 추천수3 반대(0) 신고

 

우리는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길을 가다보면 소도 보고 중도 보고 한다고요. 사람의 일생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좌우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전도를 하시려고 두루 다니시다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면서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오늘의 복음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그들 모두는 어부였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단순히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신분이 높아진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 낚는 어부는 결국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복음 안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이유야 어찌되었든지 그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한낱 가난한 작은 마을에 어부로 한 평생 지내다가 그냥 이름 없는 민초의 한 사람으로 사라졌을 겁니다. 근데 예수님을 만나서 그들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을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그당시 어부라면 가장 하층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 신분이 스승 한 분을 잘 만나서 운수대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들은 그물과 아버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바로 따랐다고 나옵니다. 그물과 배는 어떤 걸 상징하는가요? 단순히 그때 그 그물은 오늘날 그냥 단순히 그물 그 자체로만의 가치로 판단을 하면 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오늘날 그 그물이 30만원이라고 한다면 그 당시의 화폐 가치로 판단을 했을 때 말입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30만원의 가치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이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건 비근한 단순 화폐가치로만 따졌을 때만입니다. 복음에서 나오는 그 그물은 자신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던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아버지를 버려두었다는 건 부모와 자식이라는 천륜도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포기를 수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헌장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위대한 포기가 수반된다는 게 나옵니다. 이번에 제 독방에 가니 미리 몇 권의 책과 함께 수도원 헌장이 책장에 꽂혀 있어서 시간 날 때 조금 봤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우리도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입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포기를 경험해야 할 거라고 봅니다. 좀 더 관념적으로 말한다면 자아포기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영어적인 어원을 보면 포기는 버린다는 어미도 있습니다. 그때의 제자들처럼 버림으로써 그 대가로 또 다른 중요한 보석과 같은 것을 얻는다는 걸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가치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이나 지위, 신분 이런 건 이 세상에 살 때만 유효한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세상에 살다가 언젠가 영원한 영원의 세계로 갑니다. 오늘 복음에는 그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걸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따랐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문맥상 상황상 우리는 영적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단순히 이 세상을 본 것이 아닐 겁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봤다면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영원의 세계가 이 세상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자기의 목숨과도 같은 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포기를 했기에 아마도 2000년 동안 우리의 머릿속에 위대한 예수님의 열두 사도로 기억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어느 정도 포기도 있을 겁니다. 근데 이 포기는 단순히 포기가 아니고 하나의 희생과 같습니다. 이런 희생을 하느님께 이 세상에서 바칠 때 그 희생은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냥 하느님을 몰랐다면 예수님을 몰랐다면 그냥 어떨 땐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할 텐데 예수님을 알아서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신앙인이기에 어떤 제약이 따르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에 대해 후회 아닌 후회도 한 적도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역으로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예수님과 하느님을 알아서 이 세상을 살면서 신앙 안에서 그렇게 포기도 하고 살았다고 생각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근데 다음에 우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근데 그때 가보니 이 세상에 살 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땐 혹처럼 생각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게 혹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계생활을 부족하지만 나름 자기 능력 안에서 잘 지키고 했다면 그땐 그 가치가 얼마나 중요하고 큰지 몰랐는데 하느님 앞에 서는 날 그게 큰 영광이 된다고 한다면 그때 그 기분이 어떨지 감히 상상이 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산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어나는 부수적인 일로 인해 하느님과 거리를 두는 냉담을 쉽게 하지 못할 거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 힘을 내서 오늘도 내일도 씩씩하게 하느님만 바라보며 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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