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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08 조회수874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내신 나자렛에서 새로운 희년을 반포하십니다. 회당에서 하셨던 것입니다. 공생활 초기쯤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미사 복음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이 앞부분에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인 두루마리를 인용해서 주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라는 청사진을 선포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런 게 지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내용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게 실현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일단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말씀에 좋은 건 사실일 겁니다.

 

한편으로는 놀라울 수도 있습니다. 좋게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약간 못마땅한 구석이 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마음을 일부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못 먹는 감 한번 찔러본다는 식으로 지금까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 판단했을 땐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모습을 쭉 곁에서 지켜보고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모습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냥 단순히 목수의 아들 정도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그들 마음속에는 많이 자리잡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로 앞 부분에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바로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그런 심리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현제의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자라지 않고 전혀 다른 곳에서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셨더라면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오늘 미사 복음 말씀이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시면서 구약의 두 예화를 언급하십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활동한 시대에 나오는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나오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예에서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이방인입니다. 또 두 사람은 처음에는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나중에 다시 마음을 돌려서 받아들여서 복을 받는 그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또 예수님을 배척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뭔가 전하는 메시지가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의 말에 순종하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면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잘 보시면 또 재미난 부분을 하나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과부에게만, 나아만만이라는 표현을 보시면 이라는 말로 한정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한정의 의미는 순종의 의미를 한 번 더 강조하는 의미의 강조요법인 것 같습니다. “너만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하면 이 말에는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까? 이 두 사례를 들면서 너희들도 나의 말을 그냥 귓등으로 듣지 말고 잘 받아들여야 그들처럼 너희가 살아가는 길에 복의 통로가 될 수가 있을 거란 의미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사람처럼 이방인에게 복이 갈 수도 있다는 걸 또한 한 번 더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런 뜻을 파악하고 이해를 했기 때문에 화가 잔뜩 났던 것입니다. 그래도 눈치는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성경을 잘 몰랐다면 자기들을 향해서 그런 예를 드신 줄도 모르고 특히나 두 사람 모두가 이방인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불쾌했을는지 모를 일입니다.

 

오늘 독서는 복음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에 대해서 독서의 지면 전체를 할애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좀 더 복음과 연계해서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나아만은 아람 나라의 장수이고 자신은 나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나병을 앓고 있었지만 독서에 보면 주군이 상당히 아끼는 장수였다고 나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아끼는 장수라면 대충 상상을 해봐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신분상 위치에 있는지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자기가 앓고 있었던 나병을 치유하려고 무진장 노력을 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에는 엘리사 예언자의 말을 통해 또 예언자의 말에 순종해서 자신의 나병이 깨끗이 치유됐습니다. 결과는 이렇지만 결과만을 보지 말고 그 과정을 한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예언자의 말을 듣게 된 최초의 발단은 어디서 시작하였는가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포로였던 어린 소녀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어린 소녀이고 또 포로였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이런 상황이 잘 납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이 소녀는 나아만에게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아만의 아내에게 했습니다. 아내가 나아만에게 전해줬을 겁니다. 나아만이 아내로부터 소녀가 한 말을 무시했을 수가 있습니다. 근데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한글 성경에 나온 번역상의 뉘앙스로 그대로 만약 나아만 장군이 들었다면 한 번쯤은 조금 고민했을 수 있다고 저는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독서 3절에 보면 그분이라면이 말의 뉘앙스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말입니다. “그분은 고쳐주실 수 있을 겁니다,”그분이라면 고쳐주실 수 있을 겁니다.”와는 같은 의미이지만 조금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은 이라는 표현에서는 신빙성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분이라면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분이라면이라는 말에는 이런 느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이런 느낌이 있습니다. 만약 나아만 장수가 이런 느낌을 받았더라면 조금은 고민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말의 어떤 표현에서도 미묘한 고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독서에 나와서 그렇지 만약 4대 복음에 나오는 말씀이라면 이 부분만을 가지고 묵상해도 상당한 묵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주군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때 나아만이 조금 고민을 했지 싶습니다. 이런 사실을 임금에게 알렸을 때 임금이 어떻게 생각할 것이며 또 핀잔이나 듣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고작 포로였던 어린 소녀의 말을 듣고 보고를 한다고 자신이 생각했다면 못했을 겁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조금 상상을 해본다면 그만큼 자신의 병을 낫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자존심을 죽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임금은 편지를 써서 이스라엘 임금에게 보내지만 결국 이스라엘 임금은 자신은 하느님도 아니고 그런 병을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의 옷을 찢는 일이 벌어집니다.

 

참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아람 임금이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한 부분에서 나아만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임금은 그 편지의 내용으로 봐서 자신에게 병을 고쳐달라고 생각한 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람 임금의 판단으로는 이스라엘 나라의 임금이라면 소녀가 말한 사마리아 예언자를 잘 찾아낼 수 있는 위치이고 또 임금의 말이라면 잘 들어줄 수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의도로 임금에게 편지를 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이건 저만의 상상입니다. 근데 이 일이 어그러지자 이때 엘리사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독서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예언자임을 알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사의 집 앞에까지 왔습니다만 엘리사는 나아만을 직접 만나지 않고 자신의 심부름꾼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에게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고 말만 합니다. 그러면 깨끗하게 나아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상황에서 나아만은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화가 나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봤을 때 자신을 어느 정도 최소한 집에서 나와 인사를 하며 독서에 나오듯이 마치 신부님이 강복을 주시는 것처럼 그런 걸 기대했을 건데 전혀 예상과는 달리 요르단강에서 몸을 씻어라.”고 하니 그렇게 할 것 같았으면 그보다도 더 좋은 곳도 있는데 그곳에서 씻으면 나아도 더 잘 나을 거라는 형식으로 말을 내뱉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어떤 뜻이 숨어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엄청 상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발길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때 자신의 부하가 등장해서 만류를 하고 설득을 합니다. “이보다 더한 일도 시키면 하지 않았겠느냐?” 하면서 그냥 속는 셈치고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이 상황에서 부하가 한 말의 의미도 한번 생각해볼 만합니다.

 

부하의 말 속에는 지금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내세울 게 아니라 장군이 온 목적을 생각하는 게 중요할 거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일단 부하가 하는 말에 따르긴 따릅니다. 이때 이 부하를 오늘 독서에서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럼 요즘의 이야기로 말을 하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나아만은 자신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냥 깨끗하게 나은 정도가 아니라 어린아이 살처럼 깨끗하게 나아졌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나아만은 이스라엘에만 하느님이 계신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걸로 오늘 독서는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들 잘 알고 계시지만 이 이야기에 숨은 걸 한번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나아만의 성격을 하나 봤으면 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남의 말을 잘 경청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다음은 엘리사 예언자의 집에서 심부름꾼의 말을 들었습니다. 심부름꾼 그 자체의 말은 아니고 단지 전달자로서의 말입니다. 여기서 생각할 부분이 같은 말이라도 만약 대통령이 직접 하는 말과 밑에 비서가 하는 말이 같은 말이지만 그 위치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릅니다. 이처럼 이유야 어찌 되었든지 말을 듣는 통로 역할을 한 건 심부름꾼이었습니다. 또 마지막엔 부하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 부하는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만약 나아만이 어느 하나라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병을 깨끗하게 나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성경에 이런 사실이 기록됐다는 것은 단순히 이 사실 그 자체에 의미를 둔 것은 아닐 겁니다. 바로 경청의 의미를 강조하는 면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전혀 말 같지도 않은 말 같은 말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가진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걸 적용하면 좋은 표양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아만 장수의 이야기를 말씀하셨듯이 나아만 장군이 그들의 말을 듣게 된 그 바탕에는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또 그들의 말에 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치유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도 자신이 알고 있었던 과거의 예수님 모습을 생각해서 예수님을 배척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들의 알량한 인간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막고 있다는 걸 보면서 우리도 우리 속에 이런 게 있다면 우리 역시도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셔도 볼 수가 없는 우를 범할 수가 있다는 걸 묵상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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