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10 조회수1,303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데 파란 글씨 내용은 참고가 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냥 스킵하셔도 됩니다. 이 내용을 조금 생각하면 오늘 복음묵상이 풍성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시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보셔도 됩니다.

 

알리바이라는 말은 범죄와 관련하여 수사기관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입니다. 알리바이라는 개념은 쉬운 듯하지만, 개념이 외래어로 되다 보니 잘 와 닿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현장부재증명이란 말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범인으로 지목되면 범인은 일단 범죄현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이 되는 용의선상에 올려진 요주의 인물이라면 자기가 알리바이를 증명한다면 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것은 범죄자나 수사기관 양 당사자에게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존재를 증명하거나 수사기관에서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할 때 법관이 판단했을 때 모든 것을 증거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증거로써 능력이 있을 때 증거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채택이 됩니다. 증거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인정 범위를 무조건 인정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행 형사소송에서도 증인의 증언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여부를 가지고 상대방이 상대방 주장에 대해 그 증거를 물리칠 수 있는 탄핵증거를 제시하면 그 강도에 따라 상대방 증언에 대해 효력을 감쇄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해서 소송이 진행됩니다. 현행 우리나라의 형사소송에서는 전문증거라는 게 있습니다. 이건 실제 증인이 직접 경험한 걸 증언하는 게 아니라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엄격하게 증거로서 제한을 합니다. 법에 인정 여부가 정해져 있습니다. 경상도 말로 '카더라'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대로 실제 부활을 하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생전에 그토록 당신의 부활을 여러 차례 예언도 하셨지만 그 예언이 제자들의 귀에는 그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는지 아니면 들었어도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를 하지 못했던 상황입니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믿음이 없었다고 단정을 지을 수만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그 당시 사람들의 수준이 오늘날 사람들 의식 수준과 비교한다면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지적인 수준이 아주 낮을 수준일 겁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아니 2000년 전이 아니라 지금 현대 문명에서도 이게 쉽게 용인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도 신앙을 가지고 있고 믿음의 눈으로 보니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는 거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외인들에게는 그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도 하나의 미신 아닌 미신처럼 인정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건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고 전제를 하고 일단 들어가야 할 거라고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도 실제 우리의 이성으로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믿음과 신앙의 눈으로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믿지 않는 제자들을 향해서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완고함과 불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11절을 보면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라고 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영어성경을 참조해보면 의미는 비슷한데 조금 뉘앙스에 차이가 있습니다. 나타나셨다는 의미보다는 마리아 말달레나가 목격을 했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좀 더 표현을 하면 살아계신 걸 자기 눈으로 봤다는 것을 증언한 셈입니다. 이건 직접적으로 확인한 증거입니다. 그 정도까지 신뢰도도 높은 사실을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잘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의 증언만을 가지고 했다면 이해를 할 수도 있지만 막달레나의 증언과 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만나 뵙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가 그들에게 알려줬기 때문에 그럼 좀 더 의문만 가질 게 아니라 이 정도 선이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젠 머리에 떠올라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불신과 완고함은 육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따랐기 때문에 생긴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그들은 우리보다는 더 잘 믿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실제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을 여러 차례 봤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기적도 기적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가장 중요한 귀책사유는 성경의 예언에 대해 도외시했다는 사실일 겁니다. 만약 그들이 성경 말씀에 대해 좀 더 잘 연구하고 했더라면 충분히 그동안 기적과 또 평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하신 말씀의 권위 이런 모든 일련의 일들을 종합적으로 보고 판단했다면 충분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그때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결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생활도 하고 또 지근거리에서 뵙고 또 말씀도 생생하게 육성으로 듣고 또 부활하신 모습까지도 뵙고 했다는 걸 감안하면, 우리의 믿음과 비교하면 우리는 전혀 그런 것과는 동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토마스처럼 봐야만 믿을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물론 나중에 성령을 받은 후에는 탁월한 믿음의 눈을 가졌습니다만 우린 실제 예수님을 그들처럼 뵙지 않고도 단 하나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그들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저희의 지금 이 순간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 비하면 월등한 믿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추측입니다만.... 그렇다고 자만하고 교만하기 위해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부족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힘과 용기를 낼 수가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힘과 용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믿음의 눈, 신앙의 눈도 하느님의 은총도 은총이지만, 자기가 부단한 노력을 해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가려졌던 눈이 열리듯이 믿음의 눈이 열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믿음으로 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