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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 예비하시는 處所 (요한14:1-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30 조회수742 추천수1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4. 30.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도란도란글방

 

 예수님이 예비하시는 處所

 

(요한14:1-3)

1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 3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아멘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간 뒤에 베드로가 주님 앞으로 나서서 자신은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것이라는 결연한 신앙 고백을 했을 때 주님은 다른 많은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당신을 세번 부인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유다와 베드로를 한 곳에 등장시킴으로 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유다나 베드로나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하느님나라에 입성을 하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하느님의 은혜 밖으로 버려져(遺棄) 되어 창자가 터져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해지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두 갈래로 갈리는 전체 인류의 운명인 것입니다.

주님은 141절에서 그러한 은혜의 수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나를 믿어라 그 말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믿고 온갖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과 같은 그 믿음으로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을 확신 속에서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2절과 3절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이 근심을 벗어나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있으며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가? 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있을 곳이 뭘까요? 우리 성도가 죽은 뒤에 가게 될 하느님나라 안에서의 주택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이미 많다고 하면서 있을 곳을 또 마련하러 가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있을 곳이 많으면 그냥 거기를 쓰면 되지 무슨 있을 곳을 또 예비를 하냐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할 것 같아서 추가로 있을 곳을 더 지으러 가신다는 건가요?

그 해석이 맞다면 그럼 아직도 天國은 건설 중인 것인가요? 그게 아직 완성이 안 되어서 예수님이 아직 못 오시는 것이고 이 역사가 여전히 이렇게 존속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 집만 짓고 계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올라가신 곳이 하느님나라잖아요 그러니까 하느님나라는 아직 미완성이라는 말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에 의해 이미 완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하신 후에 바로 그 완성된 하느님 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하느님나라, 聖徒의 있을 곳(처소)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 있게 될 자들을 위해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의 죄를 말끔히 씻어 내고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들 속에 들어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런 하느님의 처소로서의 하느님 백성들을 완성해 내시겠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라는 것 즉 성도들과 하느님의 처소라는 것은 하느님과 성도가 함께 있는 곳을 말하는데 하느님과 성도가 함께 있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성도들의 죄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죄인은 절대 함께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마음이 부패하고 거짓되어 그 누구도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예레17:9~10) 9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10 이 야훼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

 

이렇게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들의 마음은 거짓되고 부패하여 하느님의 보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에도 성막에 숨으셔서 그들을 끌고 가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모세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모세도 하느님의 뒤태만 살짝 보았을 뿐입니다. 그 더러운 죄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 하느님이 계실 수 있는 청결한 마음으로 만들어 내어 하느님과 하느님백성들이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처소 예비인 것입니다.

 

(마태5: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상태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느님을 보고도 그 분의 돌격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물 중에 제일 더럽다는 사람의 마음이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지요? 다름 아닌 하느님의 은혜(은총)에 의해서입니다.

 

(예제36:24~28) 24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 내 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25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26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27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28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면서 나의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그렇게 씻김을 받은 성도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에페5:26~27) 26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27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티나 주름이나 그 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바로 더러운 마음을 씻김을 받아 하느님을 대면하여 볼 수 있는, 다른 말로 하느님의 처소가 된 자들의 무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만물 중에 가장 더러웠던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씻으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발 씻김의 에피소드 뒤에 이 처소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온 몸과 온 마음이 씻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묵시7:13~14) 13 그 때 그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어린양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해 깨끗이 씻겨 지고 드디어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더럽고 추한 마음이 해지고 청결한 마음이 심어진 그 자리에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좌정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들이 함께 거하는 그 곳을 하느님나라 天國이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처소 즉 하느님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떠나신다고 하시는 것이고 그 말은 이제 곧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이라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나라의 개념 정리를 잘 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나라는 공간적이며 장소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나라는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있고 그 통치에 馴服하는 하느님나라 백성이 있는 곳이 바로 하느님나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천국을 발견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라'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천국이 지금 너희 가운데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죽고 나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고 하신 것은 내가 이제 십자가를 지고 너희의 더러운 마음을 씻을 피를 흘리게 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너희의 죄가 해결이 되고 성령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게시게 되는 하느님나라 즉 처소가 완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당신이 준비하신 처소로 우리를 맞이해서 당신이 계신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단순히 먼 훗날 재림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맞으시겠다는 그런 말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과 예수님의 재림의 이중적 상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가시적으로 재림을 하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재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파루지아라는 단어는 안 보이던 것이 나타나다라는 뜻이지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내려오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말은 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구름은 하느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는 것은 주님이 초림 때 인간의 육신을 입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지막 날에는 하느님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하느님의 영광으로 지금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주님은 이미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고 그 주님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때를 재림의 때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나라를 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가시적으로 재림을 하실 때에는 가시적 하느님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영원한 안식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준비하시겠다는 처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처소는 창조이전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계약 속에서 이미 완성이 된 것이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골고타의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며 그 영적으로 완성이 된 처소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처소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모습이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처소의 완성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십자가로 막 이루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은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 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너무 피곤해서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 하에 잘 지어지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잘 움직이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지 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 분께 항복하여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예배(가치부여 행위)’ 라 부릅니다. 하느님만이 참 가치이시며 하느님만이 영광의 주인이심을 모든 만물이 인정하고 그 앞에 순종하고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뜻과 합일한 상태에서 하느님께 순종하고 있는 그 상태를 연합이라 부릅니다. 그 연합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상호 내주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서로 서로 상호 내주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과 신, 신과 인간 사이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인간과 인간은 서로 상호 내주가 불가능 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연합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그 안식을 하느님의 거처 삼으심’ '하느님의 처소 삼으심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안식이 바로 거주의 개념이니까요.

상호 거주가 될 때 그 상태를 연합이라고 하고 그 연합의 상태에서 쌍방의 뜻이 하나가 되며 거기에서 예배가 나오고 거기에서 참 된 안식이 나오는 것이니까요. 왜 주님의 처소의 예비가 창조의 목적이라고 말씀을 드렸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자 하느님은 인간들을 에덴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안식은 깨져 버린 것입니다. 물론 상징적 의미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하느님의 안식은 그 무엇으로도 깨질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다시는 깨지지 않는 안식을 마련하시기 위해 혼돈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의미에서 안식이 깨졌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식은 깨졌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제 영원히 깨지지 않는 안식의 처소를 마련하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새 언약과 새 창조입니다. 하느님은 그 일을 위해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사악을 부르시고 야곱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출발이 됩니다.

그 민족적 이스라엘은 바로 우리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당신께서 거하실 처소를 준비하는 것과 하느님의 백성들의 구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이 되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이유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출애15:13,17) 13 당신께서 손수 건지신 이 백성 아, 당신은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고, 힘있는 손으로 그들을 당신의 성소로 인도해 주십니다. 17 당신께서는 그들을 데려다가 당신의 산 위에 심으십니다. 야훼여, 이 곳이 바로 당신께서 계시려고 마련하신 곳, 주여, 당신께서 손수 지으신 성소가 아닙니까?

 

13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은 그들을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성결한 성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7 절에 보면 바로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성소를 삼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처소를 주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처소로 삼는 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그걸 상호내주(mutual indwelling). 그것을 염두에 두고 신명기로 가보겠습니다.

 

(신명33:27) 태고 적부터 계시는 너희 하느님, 너의 피난처, 당신의 영원한 팔을 아래로 뻗으시고 네 앞에서 원수를 몰아내시며 '진멸하라' 하고 외치신다.

 

지금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이유를 하느님이 마련하신 처소(聖所)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신명기에서는 바로 그 처소가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잘 그려보세요.

하느님께서 우리의 처소가 되시고 우리가 또 하느님의 처소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처소를 주기 위함이며 그 처소는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처소를 예비하여 주신다는 것은 하느님 자신을 주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처소로 삼으시겠다고도 하십니다. 그 말은 하느님은 우리를 그 삼위 일체 하느님 속으로 끌어넣으셔서 삼위 하느님과 연합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편90:1-2) 1 주여, 당신은 대대손손 우리의 피난처, 2 산들이 생기기 전, 땅과 세상이 태어나기 전, 한 옛날부터 영원히 당신은 하느님,

 

(시편91:9-10) 9 야훼를 너의 피난처라 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의 요새로 삼았으니 10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리라. 어떤 재앙도 네 집을 가까이 못하리라.

 

(시편132:13-14) 13 야훼, 시온을 택하시어 여기에 계시기로 정하시며 이르시기를, 14 '이 곳은 영원히 나의 안식처, 여기가 좋으니 나 여기 살리라.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당신 안으로 끌어 들여 다른 말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 성숙시키시고 결국에는 완성시키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敎會(신앙을 함께하는 무리)를 예수로 부르시기도 하십니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그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한 몸입니다. 12절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교회를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작은 예수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연합이며 하느님과 상호 내주하는 처소인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새 계약의 내용이 다윗의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반복이 되고 있는지 보세요.

 

(2사무7:5-9) 5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나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일러라.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6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이끌어 내던 때부터 지금까지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녔고, 집 안에서 살아 본 것이 없다. 7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동안, 내 백성 이스라엘을 맡겨 보살피게 한 어느 영웅에게 어찌하여 나의 집을 송백으로 지어 주지 않느냐고 말한 것이 있었더냐?' <다윗이 야훼의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자 하느님께서 내가 언제 사람이 만든 곳에 사는(거하는) 것을 보았느냐?’ 라고 하시면서 다윗의 성전 건축을 막으십니다. ‘나는 인간들로부터 무엇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8 너는 이제 나의 종 다윗에게 만군의 야훼의 말이라 하며 이렇게 일러 주어라. '나는 양떼를 따라 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 내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9 그리고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들을 네 앞에서 쳐 없애 버렸다. 세상에서 이름난 어떤 위인 못지 않게 네 이름을 떨치게 해 주리라.

 

하느님께서 다윗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복된 약속을 마구 쏟아내십니다. 하느님은 지금 다윗에게 아니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줄 복은 너희들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너희들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은혜의 계약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공의의 하느님께서 불의한 자에게 그냥 복을 주실 수는 없지요? 그래서 그들의 죄를 어떻게 처리 하실지를 사무엘하 11장과 12장에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2장에는 죄 없는 다윗과 밧세바의 아기가 죽습니다. 그렇게 죄가 해결되고 그 죽은 아이 대신에 솔로몬이 다윗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계약은 성취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느님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어떤 복을 주시려고 하는 것인가? 계속해서 사무엘하7장의 다윗 계약을 보세요.

 

(2사무7:11-13) 11 지난날 내가 위정자들을 시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던 때와는 달리 너희를 모든 원수에게서 구해 내어 평안하게 하리라. 나 야훼가 한 왕조를 일으켜 너희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2 네가 살 만큼 다 살고 조상들 옆에 누워 잠든 다음, 네 몸에서 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터이니 그가 국권을 튼튼히 하고 13 나에게 집을 지어 바쳐 나의 이름을 빛낼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를 영원히 든든하게 다지리라.

 

11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이루시겠다고 하시지요? 여기서 왕조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바이트가문 가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지금 다윗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한 가문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느님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가문을 다윗을 위하여 이루시겠다는 것은 다윗을 그 안에 넣어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2절과 13절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다윗에게 내가 사람이 만든 집에 거하는 것을 봤느냐?’ 라고 하셨으면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왜 다윗이 지은 성전은 안 받으시겠다고 하시고 다윗의 후손에게는 성전을 짓게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단순히 다윗이 죄를 많이 지었고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솔로몬도 말년에 우상을 섬기고 하느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서 한 사람입니다. 죄로 따지자면 솔로몬도 다윗 못지않습니다. 하느님은 솔로몬의 성전도 안 받으십니다.

 

(사도7:46~53) 46 다윗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으로서 야곱의 후손을 위하여 성전을 짓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지만 47 성전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사시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49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늘은 나의 옥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어떤 집을 지어 줄 것이며 내가 쉴 곳이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 아니냐?' 51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이 완고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당신네 조상들처럼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52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로운 분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지만 이제 당신들은 바로 그분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53 당신들은 천사들에게서 하느님의 율법을 받고도 그 규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요? 하느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도 거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네 후손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요? 여기에는 이중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다윗의 후손은 솔로몬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중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느님의 계약의 내용대로 성전을 짓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곧 파괴되고 맙니다. 그 왕좌도 영원히 이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솔로몬의 아들 대에서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그러다가 그 둘이 다 결국 망합니다.

다시 말해 사무엘하 7장의 다윗의 계약에서 나타나는 다윗의 후손이 지은 집이 의미하고 있는 가시적 상징으로서의 솔로몬의 성전은 하느님은 인간이 지은 것에 거하시지 않으신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말로 파괴되기 위해 건축이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지으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지어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는 은혜의 계약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공력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모두 불 타버릴 것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솔로몬의 성전이 야훼의 이름을 위해’ ‘계약을 성취하시는 하느님을 증거 하기 위해지어진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다윗의 후손에 의해 지어지게 될 집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두 번째 상징은 야훼의 처소, 야훼께서 거하실 참 성전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어질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어질 참 성전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위의 11절에서 언급하신, 하느님께서 다윗을 위해 지으시는 왕조다시 말해 다윗의 가문’ ‘하느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바로 우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백성 안에 거하시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을 처소로 제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요한복음 1420절 이후에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14:20-24) 20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22 가리옷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23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 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시고자 계획하신 확정된 목표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삼위 하느님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그 분은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약속이 바로 주님이 예비하시는 처소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이 역사 속에서 성숙되어져 가게 됩니다. 그것이 이미아직의 긴장 속에서 지어져 가고 있는 하느님의 처소로서의 성도의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시간 속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聖化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완성된 지점에서 과정을 바라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정리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근거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다 씻어 버리심으로 당신이 우리 속에 거하실 수 있게 하시는 성도의 구원 이야기를 달리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을 이기신 부활로 이어지고 그 부활은 하늘로의 승천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로 돌아가셔서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인정받으셨고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의 모습으로 자기가 완성해 놓으신 청결한 마음의 성도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 보혈로 더 이상 죄인들이 하느님의 돌격에 의해 죽지 않아도 되는 구원의 현실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제 聖徒들은 하느님의 처소가 되었고 하느님은 성도들의 처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들의 상호내주가 실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호내주의 관계는 하느님의 뜻에 성도의 뜻이 완전히 맞추어 지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 위의 성도들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양육의 훈련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처소 예비는 지금 이 역사 속에서 성도의 성화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이미 우리를 하느님의 처소로 만들어 놓으셨고 이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구원의 과거시제와 구원의 현재시제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청결한 당신의 처소로 만드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선언적으로 완성이 되었기에 절대 중도에 포기되거나 실패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처소로 지어지는 그 길에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수많은 자기부인의 사건들과 상황들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편안하게 거하실 수 있도록 자기를 비워 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시기에 우리도 그 일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은 하느님의 진노의 날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진노의 날에 필요한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백성 간의 , 짜다크뿐입니다.

 

(잠언11:4) 주의 진노가 터지는 날 그 재산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착한 행실은 죽을 자리에서 빠져 나오게 해 준다.

그 길을 가십시다.

 

참고요~~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 하느님 백성)- 천주교에서는 신자(信者, 믿는 사람)라고들 하는데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하느님의 백성이지요? 그러니 聖徒라함이 더 친근 적인 것입니다. 개신교 같다는 말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세요.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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