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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福者 池璜사바 님 (순교일; 6월28일)
작성자정태욱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25 조회수6,245 추천수1 반대(0) 신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福者 池璜 사바

(순교일; 6월28일)

 

  

          

 

 

   福者 池璜 사바  (순교일 6월28일)

 

성 인 명지황 사바 (池璜 Saba)
축 일5월 29일
성인구분복자
신 분밀사, 순교자
활동지역

한양, 북경

활동연도

1767-1795년

같은이름

사바스, 지 사바, 지사바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 님은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얼마 안 있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지 사바의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지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을 통해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 바오로와 함께 주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이냐시오는 그의 동생이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1795년 초에 주 야고보 신부를 맞이한 최 마티아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야고보 신부는 최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인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최 마티아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최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윤 바오로와 최 마티아와 지 사바는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최 마티아는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 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지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 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 자료집에서 발췌

 

 

 





 

 

 

 

 

  

한양에서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 소문을 듣고 자원 입교하여 열렬한 신심으로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으며

 

윤 바오로, 박 요한과 함께 신부영입 밀사로 선발되어

북경에 가서 주문모 신부를 영입해 왔으며 귀국한 후 체포되어

그날부터 세 분이 포도청에서 혹독한 매를 맞고

28세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신 복자 池璜 사바 님이시여

 

님들의 피로써 피어난 거룩한 순교의 꽃이  

풍성한 열매로 성장할 수 있도록

현세의 저희에게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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