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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 세월을 아껴 우리가 해야 할 일 (에페5,16-2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05 조회수767 추천수1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1. 5.  도란도란글방

 

세월을 아껴 우리가 해야 할 일

 

(에페5,16-21)

16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17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18 술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19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20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 2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정신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

 

성령 충만(充滿) 이라는 것은 입에 거품이나 물고 쓰러지거나 전기가 오른 것처럼 몸을 떨거나 병이나 고치고 안수(按手)나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 속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 실 때, 그 뜻에 열심히 순종해 나가는 우리의 선택과 몸짓을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그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 내기 위해, 우리의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분투해야 함도 아울러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경주 하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기억도 안 나는 나의 배를 위한 분주한 삶을 사셨습니까?

우리는 17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언행을 이게 정말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일까하고 매번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하느님의 뜻은 데살로니카 43거룩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거룩에 유익이 되는가, 아닌가를 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강조하면서 그 성령의 충만을 술 취함과 대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에페5:18) 18 술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왜 성령의 충만과 술 취함과를 대조할까요?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술 취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셔서 감당할 수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가21:34) 34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 데 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 날이 갑자기 닥쳐 올지도 모른다. 조심하여라.

 

(로마13:13) 13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갈라5:21) 21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경고한 바 있지만 지금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1베드4:3) 3 여러분은 과거에 이방인들이 즐겨하던 일을 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곧 방탕에 빠지고 욕정에 흐르고 술에 취하고 진탕 먹고 마시며 떠들어 대고 가증한 우상 숭배를 일삼아 왔으니 그만하면 족하지 않습니까?

 

성경(聖經)을 잘 보면 거의 술 취함과 함께 방탕(放蕩)”이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기술이 되어있지요? 방탕“”아소티아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말과 정확하게 동일한 단어입니다.

 

(루가15:13)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 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여기에서 허랑 방탕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아소티아입니다. 방탕이라는 말은 단순히 문란하고 지저분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탕이라는 말은 낭비하다, 허비하다라는 말입니다. 아소티아에서 부정 접두어를 떼면 절약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방탕이라는 단어는 절약하다의 반대말인 것입니다. ”낭비하다, 허비하다입니다. 이렇게 술 취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라는 말이 아니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으로 성경에 등장 하는 것입니다.

술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술 취함은 규모 있고 단정한 삶을 무질서하고 혼돈 된 상태로 헝클어 버립니다.

술은 각성제(覺醒劑)가 아닙니다. 술은 의학적으로 억제(抑制)제입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알콜이 중추 신경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인간의 중추 신경이라는 것은 자율과 지혜력, 이해력, 판별력, 판단력, 균형을 관장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알콜은 그 중추 신경을 마비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왜 용감해 지는지 아세요? 판단력과 판별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술이 취하면 아무 데서나 강아지처럼 소변을 보거나, 평소에는 겁 많고 얌전하기 그지없던 사람들이 옆자리에 있는 사람하고 째려 봤다고 다투고 하는 것입니다.

 신문의 사건 사고 난에 나오는 수많은 살인 사건폭력 사건들이 대부분 무엇 때문에 기인합니까거의 술 때문입니다.

이런 게 다 왜 일어난다고요? 술이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판단력과 판별력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조정할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이 뭡니까? 짐승은 자기 본능에 따라 행동하지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싸고 싶을 때 싸고, 교접하고 싶을 때 누가 보던 말던 교접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해력과 판단력과 판별력을 가지고 절제하고 누르고 인내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술은 바로 그 이성을 마비시켜 버림으로 사람을 일순간 짐승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 시간들은 전부 허비되어지는 낭비되어지는 짐승의 시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이렇게 술 취한 사람들과 방불하게 우리의 시간을 허랑 방탕하게 낭비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가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술을 마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시간을 엉뚱한 곳에 쓰게 되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술 취한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모든 상실의 시간들을 가리켜 술 취함”“방탕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대조되고 있는 성령 충만의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간을 아껴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인 것입니다. 술이 중추신경 억제제라면 성령은 중추신경 각성제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제발 멍하니 살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멍하니 살려면 차라리 죄라도 지으세요. 그러면 나중에 회개라도 하지요. 이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여전히 눈곱도 안 떼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그런 사람들 얼마나 많아요.

정신들을 안 차려서 그래요. 멍하니 게으르게 사는 것은 술 취한 것과 똑같이 위험하고 무서운 해악(害惡)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시간을 허비하는 삶아소티아를 술 취함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는 술 취하지 말라, 시간을 방탕하게 허비하지 말라“”아소티아라고 소극적인 절제의 권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라.“라는 권고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마세요.

 

성경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은 그 것을 하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하라는 적극적인 권고가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녀석이 매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만 하다가 부모님한테 들켰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넌 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질만 하고 있어, 당장 헤어져그렇게 야단 칠 때 옆에서 역시 똑같이 공부 못하는 동생이 난 연애 안 했는데그러면 그 아이가 칭찬 받나요?

차라리 연애라도 하지, 넌 연애도 안 하면서 어떻게 공부도 못 하냐?” 그럴 거 아닙니까? “연애 하지마.”라는 말이 공부 열심히 해라는 말인 것처럼 술 취하지 마라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라.”라는 적극 적인 명령을 위한 발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간을 허랑 방탕하게 쓰는 대신에 "성령 충만한 삶,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과 자기 부인의 삶과 섬김의 삶과 그 분의 성품을 내 삶 속에서 구현해 내는 그 성령 충만한 삶을 열심을 내서 살아야 하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고 아껴서 그 삶을 열심히 살아내야 합니다. 정말 복음을 안 사람들은 절대 게으를 수 가 없습니다.

 

옛날에 한국에서 80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신 할머니가 계셔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예수를 믿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성경이 너무 읽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글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연세가 여든이면 그냥 설교나 열심히 듣다가 가면 되지 뭐이렇게 물러나 앉으실 연세입니다.

그런데 내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오늘 성경 한 장은 읽고 죽겠다는 궁금함과 열심이 그 속에서 솟구쳐 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세에 증손자뻘 되는 아이들과 초등학교에 입학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을 이해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열심과 궁금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 라도 교회가 모이는 곳에는 안 빠집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예배(禮拜)에 참석하게 됩니다.

예수를 정말 믿는 사람들은 알고 싶어 못 배겨요. 모든 스케줄을 교회가 모이는 것에 따라 변경합니다. 쏟아지는 비속에서도 버스를 타고 한 번도 안 빠지고 오시는 분들이 계셔요. 여러분, 정말 복음을 바로 이해한 사람들은 반드시 올바른 열심을 내는 쪽으로 삶이 바뀝니다. 절대 게으른 채 머물러 있지 않아요.

 

이게 그리스도교라면 내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니 죽긴 왜 죽 어, 오히려 나의 이 구질구질한 삶이 하느님께서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증거인데그 것을 확실하게 알고 나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더 읽고 싶고, 하느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기다려져서 매일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서 당신이 예배당 문을 열고 신자들을 기다리신 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을 알아 가는 삶이 너무 즐거워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매일 매일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가는 것이 즐겁고 사람들 만나는 것이 신이 나신 답니다. 영원히 나와 함께 천국에서 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좋으실 수가 없답니다. 사람들이 그 분을 행동을 보시고 처음에는 전부 미쳤는지 알았답니다. 삶이 너무 180도로 바뀌니까 사람들이 저 사람 그렇게 고생하더니 드디어 미쳤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답니다.

이렇게 그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사는 모습이 확 달라집니다. 그래서 사도행전2장에서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자 사람들이 그 성령 받은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들 술 취했나보다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도2:12-15) 12 이렇게 모두 놀라고 어안이 벙벙하여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며 웅성거렸는데 13 그 중에는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 하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14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열 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15 지금 시각이 아침 아홉 시인데 어떻게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과 술 취함이 대조되어 있는 것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완전히 다른 상이점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둘 사이에 유사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과 성령 충만한 사람의 첫 번째 유사점은 이렇게 평소의 그 사람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유사점은 술에 취하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에는 둘 다 중독성(中毒性)이 있다는 것입니다. 술이 나쁜 것은 그렇게 중 추 신경이 마비되어서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되는 상태가 반복적으로 지속된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술을 자주 마시던 사람이 술을 한 동안 못 마시면 손을 떤다든 가, 성질이 난폭해진다든가, 하는 금단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다시 술을 마시면 그 증상이 가라앉고 하니까 자꾸 술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도 중독성이 있습니다. 한번, 두 번 성령 충만 한 삶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그 시간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에게 억지로 연극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 은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세요? 여러분이 만일 어떤 종교 행위를 하고 나서 허탈함과 지침과 고단함 속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 거예요. 술에 취해 방탕한 사람은 에너지가 소진되고 허탈감에 빠지지만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갈수록 에너지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신자(信者)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했는데 허탈감에 빠지고 탈진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뭔 일을 좀 하고 나면 괜히 생색내는 사람들 많지요?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아니?”“아 너무 힘들어그건 술 취함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허망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술 취하지 않는 삶, 방탕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여러분 왜 사람들이 술에 취합니까? 행복해 지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기뻐지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 말은 상대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맨 정신으로는 불행하고 행복하지 않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당연하죠. 어떻게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어떤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추 신경을 마비 시켜서 그 괴로움과 상심을 잊어버리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함을 술 뒤로 감추기 위함입니다. 그 음주의 욕구를 잘 따라 들어가 보면 거의 대부분이 나의 채워지지 못한 행복과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나의 힘을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과시해 보고 싶어서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술을 안마시고도 살 수 있게 되었습니까? 저희 집 사람처럼 알콜 알러지가 있는 사람 말고 맨 정신으로도 그런 술 취함의 욕구나, 다른 것에 푹 빠져서 중독되고 싶은 그런 욕구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까? 내 안에 술이 줄 수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쁨과 행복과 힘을 공급해 주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18:1-2) 1 나의 힘이신 야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2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하느님, 내가 숨을 바위, 나의 방패, 승리를 안겨 주는 뿔, 나의 산채, 나의 피난처, 포악한 자들의 손에서 이 몸 건져 주셨으니

 

(출애15:2) 2 야훼는 힘있게 나를 붙드시어 나를 살려 주셨다. 내 하느님이시니 어찌 찬양하지 않으랴. 나의 선조의 하느님이시니 어찌 우러르지 않으랴.

 

세상 사람들은 술의 힘을 빌려 자신의 약함을 감추고 자신의 용감함을 드러내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렇게 하느님이 나의 힘이십니다. 우리는 그걸 알기에 어줍지 않게 술이나 마셔서 나의 약함을 가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 강력이신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이미 온전한 기쁨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술에 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편5:11) 11 당신께 피신하는 자 모두모두 기뻐하고 길이길이 즐겁게 노래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 받드는 자 모두 지켜 주시고 당신 품에서 흥겹게 하소서.

 

(필리4:4) 4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그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것으로 우리의 기쁨을 대신해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4:6-8) 6 '그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까' 하고 말하는 자가 많사오니, 밝으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야훼여. 7 이 마음에 심어 주신 당신의 기쁨, 곡식이다, 포도주다, 풍년에 흥겨운 저들의 기쁨보다 크옵니다. 8 누운즉 마음 편하고 단잠에 잠기오니, 야훼여, 내가 이렇듯 안심하는 것은 다만 당신 덕이옵니다.

 

(요한17:13) 13 지금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기쁨을 이미 우리 안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소유한 자들은 다른 것으로 시간을 방탕하게 허비하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행복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교의 이름을 쓴 무당 종교의 문제점이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든 관심이 나의 필요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술에 취해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예수를 이용해서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내용 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도에서 35년간 힌두교 교인들에게 선교를 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매 주 힌두교 사원으로 출근 하셔서 그 곳에 있는 힌두교 지도자들과 함께 그들의 경전인 우파니샤드산스크리트어로 공부하고 요한복음을 헬라어로 공부하면서 서로의 경전에 대해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힌두교 사원엘 가면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 의 초상화를 벽에다 걸어 놓는데 그 속에 예수님의 초상화도 들어 있답니다. 그리고 그들도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예수님이 초상화 앞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답니다. 힌두교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범신론(汎神論)의 기초 아래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이 모든 세상, 우주는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 것을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범신론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무엇 하나 신이 아닌 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도 결국 해탈에 이르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결국 범신론이라는 것은 무신론과 맥이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게 신이면 아무 것도 신이 아닌 것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힌두교 지도자들 중에 죄와 용서에 대해 연구하는 유신론적 교리를 갖고 있는 신학자가 있었답니다. 그분께서 그 힌두교 신학자에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에 대한 교리를 잘 설명해 주었더니 그 힌두교 신학자도 당신이 말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만 빼면 나와 당신의 교리는 정확하게 일치 한다고 하더랍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는 자신도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럼 당신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냐?“라고 묻자 그 힌두교 신학자는 왜 꼭 그게 예수여야만 하는가? 예수가 나를 구원해 주지 않으면 저 많은 신들 중 나를 용서해 줄 다른 신을 찾아가면 되지 않는 가?“ 하고 벽에 있는 그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가리키더랍니다.

 

오늘 날 교회 안에 이 힌두교 신학자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들은 왜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를 믿어서 우리에게 얻어지는 유익,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믿으시지요? 틀린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구원이라는 우리의 필요에 초점이 모아지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너무 우리의 구원에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을 두게 되면 우리는 나를 구원하시는 이가 어떤 분이신지, 나는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이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아무나 나에게 구원만 주면 나는 그 신을 쫓아 갈 거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건 정말 위험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이 섬김과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그 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후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두문불출 하자 시내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야훼라고 불렀습니다. 금송아지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준 하느님을 섬긴 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필요를 채워 줄 아무 신, 불특정 다수 중의 하나를 섬긴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어떤 힘 있는 존재에게 아부를 떠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 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나의 필요가 하나도 채워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분이 야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 누구 신지를 알고 그 분을 섬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분이 누구인지는 상관없고 그저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는 어떤 신을 섬기고 계십니까?

 

왜 이 구분이 중요하냐 하면 나중에 가면 이 둘의 목적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원(救援)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구원 그 이후의 삶을 경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의 목적지가 되면 나는 나를 구원하신 그 크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오늘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구원관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술 취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는 반면에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의 삶 속에서 드러내려 열심을 내는 것처럼 신앙은 나에서 하느님으로 나의 눈과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신앙이 나의 필요, 나의 구원이러한 감각적이며 제한된 한계 속의 신앙으로 변질이 된 것은 여러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만 가장 악()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르네상스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중 1,500년간은 오히려 지나치게 하느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비하되고 맹신이 판을 치게 되고 성직자들이 고위 관리처럼 대접이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르네상스, 문예부흥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지나친 신본주의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면서 성경의 계시까지도 인간의 이성의 심판을 거쳐야 계시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성경에서 가차 없이 신화나 설화로 매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교는 극히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인본주의가 물질주의를 낳으면서 그리스도교는 급속도로 인간중심적이며 물질주의 적인 종교로 전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성당에 와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는 나의 유익과 나의 구원, 나에게 쏟아져야만 하는 은혜이런 것만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항상 내가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하느님을 부르며 믿음과 은혜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의 중심은 항상 입니다. “나의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엄밀히 말해서 그건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걸 우리는 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성당에 와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동한 그 분이 야훼 하느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종교적 엑스터시나 감격은 어떤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이슬람교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나의 필요에 초점을 두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우상(偶像)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당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보이는 나의 필요를 구하는 사람들은 뭔가 감각적이며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그 것을 추구하지도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증거(證據)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서 제일 안심하는지 아세요? “큰 것과 다수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감동 적인 것들을 추구 합니다.

은사를 강조 한다든가, 선교를 강조 한다든가 해서 다른 이들은 쉽게 경험 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할 수 있다라 는 자부심을 줍니다. “나의 필요가 주() 관심(觀心)인 사람들은 그래야 안심이 되거든요. 내가 눈에 보이는 뭔가를 해야 하느님 앞에 떳떳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의 필요를 구하는 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교회라고 간판을 붙인 곳에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교(宗敎)를 통해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 버렸고 그들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기관들이 생겨나 버렸기 때문에 사람을 붙들어 놓아야 헌금(獻金)이 들어오고 그래야 그 것들을 유지(維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프로그램들을 도입합니다. 자식이 있는 많은 부모들이 어떤 교회를 찾습니까? 주일 학교에서 뭘 가르치든 그건 상관 안 하고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나 없나“ ”우리 아이의 시선을 잡아끌어 줄 교육 프로그램이 있나 없나이런 것만 찾아다닙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뭘까요? 그들의 죄() 성을 자극해 주는 프로그램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뭘 제일 좋아할까요? 죄 짓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뭘 제일 싫어할까요? 고리타분하게 성경(聖經) 가르치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저마다 아이들 예배 때 연극을 한다, 음악회를 한다, 운동을 한다, 미술을 가르친다, 난리들을 떱니다. 부모들은 그걸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들이 저마다 좋은 프로그램들을 유치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신비한 성령의 은사를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눈에 보이는 신비한 것과 자기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잠깐이지만 아주 안심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왕이면 예배당도 크게 짓습니다. 우스개 소리 같지만 큰 예배당에 계신 하느님은 뭔가 나를 위해 더 큰 일을 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많아지고 예배당이 커지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나는 모두가 공인하는 안전한 공동체에 들어와 있다는 안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경주해 나가야 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 말 큰 교회나 인기 있는 교회가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일까요?

 

그리스도교는 공간의 종교가 아닙니다. 공간의 종교는 바알 신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바알은 그의 신전(神殿)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섬기는 여 사제들과 성직자들, 혹은 일반 신자들이 그 신전에서 성 관계를 하면 바알이 흥분을 해서 비를 내려 주고 다산(多産)을 약속하는 그런 잡교(雜敎)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공간의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1열왕8:27-30) 27 그러나 하느님, 하느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자리잡으시기를 어찌 바라겠읍니까?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겠읍니까? 28 그러나 나의 하느님 야훼여, 소인의 기도와 간청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 날 당신 앞에서 울부짖으며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29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밤낮으로 이 전을 보살펴 주십시오. 소인이 이 곳을 바라보며 올리는 기도를 부디 들어 주십시오. 30 소인과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할 때 부디 들어 주십시오. 당신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성전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때도 하느님이 그 성전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열왕8,32.34..39.44-45) 32 당신께서 하늘에서 그 말을 들으시고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잘못이 있으면 그에게 벌을 내리시고 허물이 없으면 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십시오. 34 하늘에서 들으시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고 그들의 선조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 가게 해 주십시오. 36 하늘에서 들으시고 소인의 잘못과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길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백성에게 유산으로 주신 당신의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십시오. 39 당신께서는 자리잡으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이여, 사람의 행실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 당신만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낱낱이 아십니다. 44 당신께서 이 백성을 어느 싸움터에 내보내셨든지 그들이 그 곳에서, 당신께서 택하신 이 성과 소인이 당신의 것으로 지어 바친 이 성전을 바라보며 야훼께 기도하거든 45 그 간절한 기도를 하늘에서 들으시고 정의를 세워 주십시오.

 

사람들이 큰 것과 다수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될 때는 나의 필요, 나의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를 믿고 성숙해져 가면서 나의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는 부모가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잘 키워 주어야 하는 분으로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면서 철이 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 부모에게 무엇을 뜯어낼까 보다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뭘 드시면 건강하게 오래 사실까? 뭘 챙겨드리면 기뻐하실까? 이런 것을 고민하게 되듯이 우리가 일단 예수를 믿고 성숙해져 가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나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 우주의 중심이 지구인줄 알았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도 달도 별도 전부 돌아가고 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는 오히려 거대한 항성 주위를 돌아야 하는 행성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을 코페르니쿠스적 변혁이라고 부릅니다. 천동설에서 하루아침에 지동설로 바뀌어 버렸으니 세상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바로 그 코페르니쿠스적 대 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중심이었고 하느님이 나를 돕는 분이었다면 이 제부터는 하느님이 중심이고 내가 그 분을 위해 존재하는 코페르니쿠스 적 대 변혁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하긴 미국 전체 국민 중에 아직도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 33%나 된다고 하니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직도 자기중심 적인 신앙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 인생의 하느님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자꾸 힘을 키우려고 시도합니다. 재물과 명예는 물론이고 세상 적인 인기와 다른 이들의 인정, 이런 것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아닌 것 같지요? 우리가 신앙이 좋다, 믿음이 깊다, 믿음이 뜨겁다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한번 떠 올려 보세요. 우리는 그 사람들의 무엇을 근거로 그들의 믿음을 좋다, 뜨겁다, 깊다, 라고 평가합니까? “교회 일을 많이 하니까” “기도를 잘 하니까” “성경을 많이 아니까뭐 이런 것 아닙니까? 믿음은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완전한 전체가 우리에게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티모3:14) 14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고 있는 그 진리를 지켜 나가시오. 그대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그 진리를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갈라3:23-26) 23 믿음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의 감시를 받았으며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24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25 이렇게 믿음의 때가 이미 왔으니 우리에게는 이제 후견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예수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모두 같은 크기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걸 얼마만큼 내가 내 삶 속에서 누리는가가 바로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그 완전한 믿음을 자꾸 까 보면서 아 나에게 이런 것이 주어졌구나.” 하고 감격하며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을 주신 하느님의 영광을 자꾸 드러내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앞에 항복해 들어가며 그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을 우리는 신앙이 좋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그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드러남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자꾸 깨져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2고린4:6-7) 6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 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품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그대로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질그릇이 깨져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를 잘 믿게 되면 여러분의 삶이 본의(本意) 아니게 자꾸 깨지는 모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런 인내가 나올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악한 사람을 저렇게 용서를 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낮아지면서도 얼굴 하나 안 붉힐까?”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깨지는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 그 분의 속성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걸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도구요 방법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십자가는 십자가로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채워져야 할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 분이 우리 안에 들어 와 계신 것처럼 십자가의 원리는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형벌의 모양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나를 죽여 원수를 살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 아니 하느님의 성품을 가장 잘 집대성하여 요약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는 그 십자가가 하늘나라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원수들에게 수난을 당하시고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억지로 이를 악 물고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삶을 이 땅에서 그대로 재현해 내는 삶을 삶으로써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목표 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 가신 것처럼 계속 깨지며 부서지는 고통 속에 던져 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그 하느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게 보여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시죠?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을 지금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예수에 관해 자세하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기록해 놓은 성경(聖經)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요한1:18) 18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요한5,39) 39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 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속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에서 초점을 옮겨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계시하고 가신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시간은 그리로 쏟아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마십시오. 시간을 아끼세요. 여러분의 배 만을 위해 시간을 헛되게 쓰지 마세요.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은 성경을 통하여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하바꾹3:17-19) 17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18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19 야훼 나의 주께서 힘이 되어 주시고 사슴처럼 날랜 다리를 주시어 나로 하여금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십니다.

 

(필리3:8) 8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2베드3:18) 18 여러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고 또 그분을 앎으로써 계속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 이제 뭐가 진짜 중요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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