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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하루가 늦을 수 있습니다 (에페6,10-1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10 조회수765 추천수1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1. 10. 도란도란글방

 

하루가 늦을 수 있습니다

 

(에페6,10-13)

10 내가 끝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할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11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12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13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율법 주의자(無律法 主義者) 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그런 상태가 된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우리는 오히려 이제, 나를 품에 안고 하느님께 완전히 드려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라는 존재 전체를 하느님께 드리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나의 재물, 시간, 힘 모든 것을 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지난번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내 놓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열심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지만 우리는 이 역사와 육신 속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그 것을 경험하며 이루어 가는 이 복음의 이중성이 우리에게는 이해가 됩니다.

예수를 먹고 예수를 마신 그리스도인들은 그 예수를 태워 나오는 예수라는 에너지를 가지고 그 예수라는 에너지가 한정하는 행위를 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혀 자라지 않고 성숙하지 않고 변화도 없는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아직 예수를 먹고 마시지 못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을 태워서 나오는 예수라는 에너지가 한정하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알아야겠지요? 그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이지요.

 

(2디모3:10-17) 10 그러나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생활, 나의 생활목표와 믿음, 나의 참을성과 사람, 나의 인내를 본받아 살아 왔으며, 11 내가 안티오키아와 이고니온과 리스트라에서 겪고 참아 낸 끔찍한 박해와 고난을 그대도 함께 겪었습니다. 주께서는 이 모든 박해에서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12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나 악한 자들과 사기꾼들은 날로 더 사악해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에게 속기도 할 것입니다. 14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고 있는 그 진리를 지켜 나가시오. 그대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그 진리를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5 그대도 기억하다시피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익혀왔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16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대 유익한 책입니다. 17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바 울이 디모데오를 차세대 지도자로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모테오는 아직 지도자로서의 강함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자기 스승인 바울은 감옥에 가 있고, 주변에 있는 바울이 세운 교회마다 분쟁이 생기고, 바울을 배반하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디모테오는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 때 바울이 디모테오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지켜라하고 디모테오를 훈계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꼭 붙들어라라고 권고를 합니다. 오직 그 길만이 네가 강해질 수 있는 길 이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대 유익한 책이라고 성경을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먹고 마신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배우고 자각하는 길은 오직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15:4-6) 4 성서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인내를 배우고 격려를 받아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5 아무쪼록 인내와 격려를 주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따라 모두 한 마음이 되어 6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하는데 그게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본받기 위하 여 주님이 원하시는 자녀로서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하여 성경(聖經)으로부터 양식(糧食)을 잘 섭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라는 양식을 잘 섭취한 후에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우리가 음식을 먹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 모든 것이 배 둘레 햄이 되는 것처럼 성경이라는 양식을 먹고 그 것을 에너지화 시켜서 나의 행위로 터져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유다1,20-21) 20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장 고귀한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21 그리고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우리는 거룩한 믿음을 터전으로 삼아 우리 스스로를 건축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력하라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건축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성도라는 건축물에 내가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히브5:11-14) 11 이것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러분의 귀가 무디어져서 알아 듣도록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12 여러분은 벌써 오래 전에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하느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에게서 다시 배워야 할 처지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아직도 젖을 먹어야 할 형편입니다. 13 젖을 먹어야 할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이니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14 그러나 성숙해지면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훈련을 받아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 중에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한 사람들은 커다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인 유대주의와, 그들이 믿기 시작한 그리스도교가 서로 충돌하면서 일어나는 혼란을 겪고 있었고, 같은 유대인들인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민족과 동료를 배신한 자로 매도당했습니다.

거기다가 나라를 잃고 여러 나라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면서 겪는 서러움과 어려움들이 최초의 히브리서 독자인 히브리 그리스도교인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 기자(記者)가 본 히브리 그리스도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이제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된 세월이 오래 되어서 그들이 믿는 것이 무엇이며, 무슨 약속을 갖고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 나가야 하는가를 충분히 알 만큼 되었는데도,

아직도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그들이 마땅히 이웃들에게 신약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대로 빛으로 소금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여짐으로, 그들의 선행과 그들이 가진 약속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들로 인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풍성하도록 나타내야 할 일들을 못하고 있는 것 더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14절에 나옵니다. ‘성숙한 사람은 훈련을 받아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知覺)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성장하지 않는 자들은 지각의 훈련이 없고, 그로 말미암은 단련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각(知覺)의 훈련이라는 것은 감성적인 것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아주 오해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를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야 하고, 내가 감동 받아야 하고, 내가 즐거워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예배(禮拜)는 엉터리 예배가 되지요.

지각(知覺)의 훈련이라는 것은 내 기분을 따라 행동하던 과거의 습관(習慣)에서 벗어나서 내 기분이, 내 감정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성경(聖經)에서 배운 대로 행()하는 연습(演習)을 지각의 훈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용서하고 사랑합시다.’ 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에게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자기감정을 따라 계속해서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을 감성적 혹은 감정에 입각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글쎄 그 걸 신앙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해를 돕기 위해 그런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기분은 영 아니지만 내가 배운 것이 진리라는 것이 확실하므로 난 내 지각을 따라 용서하고 사랑해 봐야지이것이 지각의 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기로 작정하셨고 영적으로 우리는 이미 그러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의 악한 습관을 자꾸 떨쳐 버리고 내 새로운 존재의 신분에 맞는 삶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단련이라고 번역이 된 굼나조운동,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에 는 그 앞에 헥시스‘’습관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에 머물지 않고 잘 자라난 그리스도인은 지각(知覺)을 잘 훈련해서 습관적으로 선()을 행하는 연습을 통해 성숙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자기를 자랑하고 싶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고 싶고 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태6:1-8) 1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2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말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3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5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 안다. 8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이렇게 사는 것이 쉽습니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랑을 하고 싶어 하지요? 그렇다고 그냥 자기의 기분대로 해 버리는 것이 바로 감정을 쫓아 하는 교회 생활이고 그럼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이토록 명확하게 금()하고 있는 것을 내가 어찌나 좋다고 어기겠는가? ’숨자이리로 가는 것을 지각의 훈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한번 보세요.

 

(히브11:24-26) 24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 믿음으로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25 죄의 일시적인 쾌락을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26 모세는 메시아를 위해서 당하는 치욕을 에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앞으로 받을 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모세가 파라오가 될 수 있는 신분을 포기하고, 고난 받고 처참한 위치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고난에 자기를 집어넣을 수 있었습니까? 모세는, 결국 애굽이 하느님께 벌을 받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백성임 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지각(知覺)의 훈련입니다.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그 사실을 알았으면 서도 지금 당장, 자기가 살고 있는 왕실의 화려함을 놓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혹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아는 것과 행위를 전혀 연결시키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연히 모세는 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조(先祖)의 대열에서 제외되었겠지요. 그러나 하느님이 모세를 택한 이상 모세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아는 것을 근거로 행위로 옮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고야 마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그렇게 지각을 훈련하고 연습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힘쓰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히브10:23-25) 23 또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24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 25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더구나 그 날이 가까와 오는 것을 아는 이상 더욱 열심히 모이도록 합시다.

 

우리가 지각을 훈련하여 사랑과 선행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 돌아보고 서로를 격려하며 더욱 열심히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자주 하셨을 것입니다.

나 혼자는 너무나 버겁고 힘든 짐처럼 여겨졌던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의 행위들이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과 함께 모여 격려 받고, 위로 받고, 힘을 얻고 나면 그래 저들도 저렇게 하는데 나라고 못 하겠나하는 마음에 훨씬 수월해 지는 것을 누구나 느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모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우리 믿음의 선조(先祖)들은 그렇게 지각을 훈련했고 그 훈련의 결과 그들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위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12:1-2)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 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갑시다. 2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선조들의 맨 앞에 우리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그 십자가(十字架)라는 잔()이 자기에게 비켜 가기를 원하셨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뭔지를 아셨기에 참으신 것입니다. 절대 그분이 원하는 것을 감정적으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각의 훈련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 하고 싶고, 갖고 싶고, 쫓고 싶은 것을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흔쾌히 버릴 수 있는 훈련, 그것이 바로 지각의 훈련 인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1장으로 가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지각의 훈련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2베드1:3-11) 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게 하신 그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4 우리는 그 영광과 능력을 힘입어 귀중하고 가장 훌륭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덕분으로 정욕에서 나오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5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 8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갖추면 여러분은 부지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할 것이며 마침내는 그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9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앞못보는 장님이며 과거에 지은 죄가 깨끗해졌다는 것을 잊어 버린 사람입니다. 10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뽑아 주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절대로 빗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고 11 또한 여러분에게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여기에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힘의 강력으로 강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구체적으로 지각의 훈련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잘 나와 있지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합니다. 그게 안 되면 너희는 언제든지 실족(失足)하게 된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믿음이 어떻게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 힘의 강력으로 강건해지는 데에, 지각의 훈련을 하는 데에 유용한 과목이 될 수 있는가?

 

(히브11:1-3)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2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3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세상과 싸우다보면 항상 세상은 끊임없이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고 공격해 들어옵니다. ‘돈이 전부야, 힘이 전부야, 그러니 고지로 올라가라는 유혹을 끊임없이 퍼붓습니다. ‘네가 정직하게 살아서 이득 본 게 뭐 있어? 네가 거룩하게 살아서 보상을 받은 게 뭐가 있어? 그냥 보이는 것을 위해 열심히 살아라고 끊임없이 속삭이지요.

그런데 신자(信者)라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거기에 너무나 쉽게 넘어갑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보는 것인데 우리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든지 뒷전으로 밀어버리게 만드는 사탄의 계략에 속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쪽으로 넘어갑니다.

 

우리 자녀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아이로 성장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학교에서 1등 하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세요?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면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동창회에 잘 안 나가는지 아십니까? 창피해서 안 나갑니다.

지금 사탄이 주무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최고라는 시대정신이 모든 인간들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물질이 없으면 사람들은 살인이나 도둑질을 했을 때와 똑같은 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건 심리학적으로도 입증이 된 것입니다.

 

나는 동대문 시장에서 3,000원 주고 산, 조금만 걸어도 발 다 까지는 구두 신고 발목까지 오는 1,000원 짜리 스타킹 신고, 전형적인 촌스러운 아줌마 스타일처럼 그렇게 차려입고, 만원 버스에 전철 갈아타고 땀 뻘뻘 흘린 채로 동창회에 갔는데 다른 친구들은 전부 고급 승용차에 명품 옷을 걸치고 화려한 화장으로 단장을 하고 나왔다고 해 보세요.

그 사람은 이내 마치 도둑질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자괴(自愧)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곧 심한 자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밥이 제대로 넘어가나요, 목에서 자꾸 걸립니다.

가난한 것이 죄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죄인중의 죄인이시게요? 가난이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예수께서 이 세상 신이라고 부르셨던 그 사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이라는 것과 정 반대의 시대정신,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는 시대정신으로 이 세상을 꽁꽁 묶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재물이나 업적이나 성과를 손에 넣고 있지 못할 때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에요. 그 촌스러운 아주머니가 지극히 정상인 것인데, 온 세상이 다 미쳐 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이 비정상이 되고 심지어 죄책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시집가서 아이 낳고, 그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나이 오십 넘어서 여전히 허리가 23인치면 그거 직무유기 한 사람입니다. 정상적인 여자가 해야 할 것을 안 한 거예요. 정상적인 아낙네들은 오십 넘어서 허리 36인치 아래로 내려 갈 수가 없어요.

애들 남긴 밥 아까워서 다 먹어야지요. 동선이 그리 길지 않은 집안 일하다보면 운동 부족 되지요? 그렇다고 찜질방엘 한번 마음 놓고 갑니까? 늘 아이와 남편 생각에 변변한 자기 옷 한 벌 못 사 입고 몸매 관리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는 것이 평범한 정상적인 한국 여성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3,000원 짜리 구두에 1,000원 짜리 살색 스타킹에 만원버스가 맞는 것이지요. 그건 자기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낸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이지 절대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가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이 믿는 예수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뿐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강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지각의 훈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시대정신, 세상 풍조로 우리를 주눅 들게 해도 보이는 것에 연연(連延)해 하지 않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베드로 후서 19절에서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앞못보는 장님이며 과거에 지은 죄가 깨끗해졌다는 것을 잊어 버린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며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바로 믿음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전에 바다이야기라는 오락기계 때문에 한국이 발칵 뒤집어 졌었습니다. 그 기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빠찡꼬 기계 같은 것입니다. 문어, 조개, 생선 같은 바다 고기들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막 돌아가다가 멈췄을 때, 특정한 배열을 이루면 점수를 얻거나 상품을 받는 그런 오락 게임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카지노가 골목골목 마다 오락실 간판을 걸고, 들어 선 것입니다. 신문을 보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건물을 사서 십자가만 떼고 거기다가 바다 이야기라는 간판을 걸었더라고요. 그 사진을 보는데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맘몬이냐? 하느님이냐?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

그 바다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물질만을 땀 흘리지 않고 얻어내기 위한 미친 세상의 이야기 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그렇게 보이는 돈에는 열심히 배팅을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을 위해서는 절대 배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에 배팅을 한 사람들이고요.

그러나 그 바다이야기에 살아 있는 물고기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그러나 진짜 허상인 바다 이야기 같은 것을 쫓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바다이야기가 사행성 도박게임이라는 판결이 나자 정부가 전부 폐쇄를 해 버렸지요. 그러고 나니까 그 도박장 주인들이 줄줄이 목을 매 자살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이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저 천국을 희망하며 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지각을 훈련하여 그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 사행성 도박인 바다이야기와 비교해서 오늘날 교회 이야기가 뭐가 다릅니다. 바다 이야기에 살아 있는 물고기가 없듯이 교회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없습니다. 둘 다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중에 나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지금 내가 배팅 하는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져 주면 되이게 오늘날 교회라 간판을 붙이고 있는 무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이 세대는 믿음을 버린지 오래 되었습니다.

 

조정래씨의 장편 소설 중에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벌써 육이오 전부터 남한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피 비린내 나는 홍역을 치러내는 역사 소설입니다. 거기 보면 그 좌익과 우익이 갈라져 싸우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땅 따 먹기지주는 소작농에게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소작농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지주들의 땅을 빼앗으려는 싸움이 좌우익의 싸움입니다. 마르크스의 막시즘이 결국 뭡니까? 쉽게 말해서 가진 놈들 땅 빼앗아서 우리 배도 좀 불리자아닙니까?

지금 중동은 왜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까? 결국은 땅 빼앗기, 석유 빼앗기 아닌가요?

 

united 93라는 911 테러를 주제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united 93 항공기가 추락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테러범은 테러범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자기들이 살기 위해 테러범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던 미국 승객들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면서 주의 기도문을 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을 부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응답하신 하느님은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믿음이 아닌, 보이는 것을 위해 하느님을 부르는 그런 자들의 기도는 전혀 관심 없으십니다.

 

두 번째로 믿음에 덕을세우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이라고 번역이 된 아레테남자다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에 덕을 더하라는 말은 혼신의 힘을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을, 힘을 내어 휘두르라는 말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믿음은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힘을 내어 그 믿음을 행위로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가 덕에 지식(智識)을 쌓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믿음과는 다른 지식을 말합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계신 것과, 천지 만물을 지으신 것과, 나를 사랑하는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 이 모든 것은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고 만져보지 못한 것이지만 그 것이 나에게 으로 담겨 있게 된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덕에 지식을에서의 지식은 내가 가진 모든 믿음을 세상 속에서 펼치기 위해서 알아야 되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선교를 하기 위해 놀라운 지적 적응력을 보여 준 것이 고린도서에 나옵니다.

 

(고전9:19-22)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내가 유다인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처럼 되었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대할 때에는 나 자신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1 나는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실상은 하느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2 그리고 내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서 모든 모양을 취했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후서에서 말하는 지식(智識)‘인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물에 뛰어드는 행위도 필요하지만 그냥 뛰어들게 되면 함께 익사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 때 지식(智識)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요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뒤로 접근해서 목을 잡고 뒤로 끌어내지 않고 앞으로 접근을 하면 백발백중 물에 빠진 사람한테 붙잡혀서 함께 익사를 하게 되지요.

그 지혜(智慧)는 하느님으로부터 만 옵니다.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지혜(智慧)를 얻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식, 지혜, 요령은 힘을 발휘해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어서 거기에 을 보태고 행위로 옮겨야 합니다. 그러나 무작정 힘을 싣다보면 실수를 하게 마련입니다. 거기에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는 겸허한 마음까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가 그 지식에 절제(節制)‘를 더하는 것입니다.

여 기서 절제‘ ‘엥크라테이아 자기통제를 말합니다. 무조건 난 어떤 것을 안 한다라는 금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엥크라 테이아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기 스스로 그 목적에 집중하는 것,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그 절제와 상극이 되는 것이 나옵니다.

 

(잠언16:32) 32 함부로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다. 제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탈취하는 것보다 낫다.

 

이 절제와 상극인 것이 바로 함부로 성을 내는 것입니다. “분노(忿怒)” 분노만큼 절제에 방해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 분노합니까? 분노라는 것은 자존심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지요.

나의 위상에 흠집이 갈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러니 급하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여전히 라는 옛 자아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에는 좀처럼 분노하지 않습니다.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 정말 정의심에서 분노하셨습니까? 오히려 몇 명이나 죽었나?‘ 하고 호기심만 발동했었지요?

그러니까 나의 옛 자아가 죽어가면 죽어갈수록 세상의 현상이나 공격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내가 목숨 걸고 분노해야할 현상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믿음에 ‘’이 실리고 그 지식‘’요령이 실린 후에 거기에 목표를 향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절제가 보태지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실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세요. 40일 금식 후에 사탄이 광야에서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고 했을 때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그 천사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 창조주 앞에서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이 기고만장해서 까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이게 까불어하시면서 주변의 모든 돌들과 산들을 전부 빵으로 만들어서 마귀에게 대항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래에서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봐라는 사람들의 놀림에 분노하셔서 진 짜 내려오셨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구원은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조금 전에 히브리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그 앞의 즐거움을 인하여십자가를 참으셨던 것입니다. 그게 절제입니다. 단순히 내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어떤 목적에 집중하는 것.

여러분 권투 선수가 시합에 나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날을 굶어야 하는지 아시죠? 그리고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해야 하는지 아시지요? 시합 전에는 침도 제대로 못 삼킵니다. 체중 늘어날까 봐,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 투입된 군사라고 하면서 어떻게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자고 싶은 거 다 자면서 전투를 합니까? 우리의 목표를 향해서 절제(節制)해야 합니다.

캠핑 가고 싶어도 주일이 끼어 있으면 좀 참고, 데이트는 성경공부 없는 날로 미루고, 정 시간이 안 되면 잠을 좀 덜 주무세요.

 

여 섯번째로 절제에 인내(忍耐)’를 쌓아야 합니다. 이 말은 믿음지식절제를 쌓는 것은 한 두 번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공부하고 싶을 때만 공부했나요? 시험, 퀴즈 이런 테스트 때문에 공부하기 싫어 죽겠는데도 억지로 공부하지요? 그게 인내입니다. 공부하고 싶을 때만 공부한 사람은 모두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에 우러나서 공부를 하고 싶을 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기 싫고, 짜증날 때도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전에 한국에 몸짱열풍이 불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좋은 몸매를 만들려고 난리가 났답니다. 그런데 운동을 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스무 명이 시작하면 열아홉 명은 중도에 그만 둡니다. 하고 싶지 않을 때 한두 번 빠지다 보면 탄력이 붙질 않습니다. 그러다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이 들어서 하기 싫을 때도 참고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때 부터인가 자기 몸이 변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신이 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바른 삶을 열심히 경주하다 보면 재미가 붙을 때가 있습니다. 인내(忍耐)하시면서 가야 합니다.

성경 읽기, 기도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기 싫어도 시간을 정해 놓고 열심히 해 보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창세기 5장에서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앉으면 20초면 할 기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실족한다.’ 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과 덕과 지식이 우리의 목표와 방향성에 관한 것이라면 지금 공부한 절제와 인내는 그 추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분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한 걸음씩 걸어 가야하는 것이며, 하고 싶을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애를 쓰고 집중해야 되는 참으로 길게 보고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 인내의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 볼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거기에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해져서 영적 전투를 실행하는 실제적인 방법의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경건(敬虔), 유세베이아라는 단어는 하느님과 동행하는 것을 자각하고 하느님 면전에 있듯이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이 경건’ ‘유세베이아가 여기에 들어갔는지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경건(敬虔)’ ‘유세베이아라는 말은 우리가 믿음과 덕(), 힘과, 지식(智識), 절제(節制)를 인내(忍耐)를 가지고 신앙생활(信仰生活)을 수행해 갈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그 열심(熱心)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나를 증명하기 위해 그런 열심을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의 신앙의 열심은 하느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타락을 했는지 우리는 우리의 자랑을 위해서 신앙을 위장할 수 있는 파렴치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기의 성취욕 때문에 자신과 싸웁니다. ‘난 기필코 해 내고 말 거야그리고 자신의 자랑을 위해 남보다 훨씬 열심을 내기도 하지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힘이들 뿐 아니라 자기처럼 열심을 부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언제든지 정죄 합니다.

그건 성경이 요구하는 열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열심은 하느님을 즐거워하고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열심 즉, 경건에서 나온 열심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경건에 형제우애(友愛)’가 바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형제우애는 경쟁이나 시기나 질투에서 나오는 열심은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는 단어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기뻐하고, 하느님을 즐거워하고,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눈에 보이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하는 하느님과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내 형제 자매들과 수평적인 사랑을 갖지 못한다면 난 아직 하느님과 그 분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뭔지 잘 모르고 있다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 우애에 바로 사랑이 붙어 있습니다. 마지막 과목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형제우애와 어떻게 다릅니까?

 

(로마12:9-21)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 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 11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13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16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18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19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20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21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

 

하느님은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이 엄청난 것들이 모두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시겠다고 이렇게 호언장담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힘을 내어, 인내 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智慧)를 가지고 절제(節制)하며,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피할 수 없이 꼭 가야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고집을 부리고 그 길을 가지 않고 있으면 우리만 손해 인 것이지요. 우리가 누려야 할 마땅한 하늘의 복을 계속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언젠가는 되겠지하고 있다면 아직 성경을 열심히 안 보신 겁니다.

 

(히브4:1) 1 하느님께서 당신의 안식처에 들어 가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살아 있으니 여러분 가운데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기서 놓쳐 버렸다라고 번역이 된 히스테레오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번역을 하면 하루가 늦다라는 뜻입니다. 너희들 그렇게 자꾸 미루다 보면 하루가 늦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민수기 14장의 내용을 모두 품고 있는 단어입니다. 민수기 13장부터 한번 볼까요?

 

(민수13:30-33) 30 갈렙이 모세 앞으로 술렁대며 모여드는 백성을 진정시키면서 외쳤다. '올라 갑시다. 올라 가서 점령합시다. 점령할 수 있습니다.' 31 그러나 그와 함께 갔다 온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도저히 올라 가지 못한다고 하면서 32 자기들이 가서 정탐한 고장은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이라는 소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뜨렸다. '우리가 정탐하고 온 땅에 들어 가 살려다가는 도리어 잡혀 먹힐 것이다. 거기에는 키가 장대 같은 사람들이 있더라. 33 우리가 만난 거인들 가운데는 아나킴 말고도 다른 거인족이 또 있더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 사람들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다.'

 

카데스 바란광야에서 가나안에 열두 정탐 군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이 하느님께서 그 땅을 너희 에게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가나안 땅의 아낙 자손 대장부들 앞에 서면 메뚜기 같더라, 우리는 절 대 그 땅을 취할 수 없다라고 절망적인 불신앙의 보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온 회중(會衆)이 통곡을 하면서 모세와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민수14:1-4) 1 이 말을 듣고 온 회중은 떠들썩하게 아우성을 쳤다. 그 날 밤새도록 통곡하며 2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에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도 더 좋았겠다. 3 야훼는 어쩌자고 우리를 이리로 데려 내다가 칼에 맞아 죽게 하는가? 아내와 어린것들이 적에게 붙잡혀 가게 하는가? 에집트로 돌아 가는 수밖에 없겠다.!' 4 이렇게 수선을 피우며 그들은 지도자를 하나 뽑아 세우고 에집트로 돌아 가자고 서로 의논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너희들은 왜 두려워하느냐? 하느님께서 분명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두려워하느냐? 하느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그 땅을 주실 것이니까 야훼를 거역하지 말자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두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14:6-10) 6 그러자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사람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옷을 찢으며, 7 온 이스라엘 백성의 회중을 향하여 외쳤다. '우리가 돌아 다니며 정탐하고 온 땅은 기막히게 좋은 땅이오. 8 우리가 야훼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우리는 그 땅으로 들어 가 차지할 수 있을 것이오. 그 땅은 정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오. 9 야훼를 거역하는 짓은 하지 맙시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들은 이미 우리의 밥이오. 그들을 덮어 주던 그늘은 이미 지나가 버렸소. 야훼께서 우리의 편이시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10 온 회중이 그들을 막 돌로 치려고 하는데, 야훼의 영광이 만남의 장막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다.

 

하느님은 그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셨습니다.

 

(14:26-38) 26 야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7 '이 못된 회중은 언제까지 나에게 투덜거릴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이 투덜거리는 불평소리를 나는 들었다. 28 너희는 이 백성에게 나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다 들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29 바로 이 광야에 너희의 시체가 즐비하게 딩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스무 살이 넘어 병적부에 오른 자로서 나에게 불평한 자는 그 누구도 30 내가 정착시켜 주겠다고 손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 가지 못하리라.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이 들어 가리라. 31 또한 너희가, 포로가 되어 끌려 가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던 너희 어린 아이들은 너희가 거부한 땅으로 내가 데리고 들어 가리라. 그 땅은 그들의 차지가 되리라. 32 그러나 너희들은 죽어 시체가 되어 이 광야에 쓰러지고 말리라. 33 그리고 너희의 자식들은 너희의 배신죄를 짊어지고 너희의 시체가 썩어 없어질 때까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어야 한다. 34 너희가 사십 일 동안 그 땅을 정탐하였으니, 그 하루를 한 해로 쳐서 사십 년 동안 너희는 너희의 죄의 짐을 져야 한다. 그제야 나를 배반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너희는 알게 되리라.' 35 나 야훼가 말한다. 한 무리가 되어 나를 거역한 이 고약한 자들을, 내가 반드시 이렇게 다루고야 말리라. 이 광야에서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죽으리라.' 36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보냈던 사람들은 돌아 와서 온 이스라엘 회중에게 그 고장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선동하여 모세를 원망하게 하였다. 37 이렇게 그 고장을 악평한 자들은 야훼께 벌을 받아 염병으로 죽었다. 38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자들 가운데 살아 남은 사람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뿐이었다.

 

그제서야 이스라엘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날 이스라엘이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민수14:39-45) 39 모세가 야훼께 들은 대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 주자, 그들은 대성통곡하였다. 40 이튿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산꼭대기를 향해 치달으며 외쳤다. '어서 쳐올라 가자. 우리가 올라 가지 않았다고 야훼께서 꾸중하시는데, 이러고만 있을 터이냐?' 41 그러나 모세는 한사코 말렸다. '왜들 이러느냐? 야훼의 명령을 무시하고 무슨 일이 되겠느냐? 42 올라 갈 생각을 말아라. 야훼께서는 이미 너희를 떠나셨다. 너희끼리 쳐올라 갔다가는 43 거기에서 적에게 패하리라. 아말렉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너희에게 달려들어 칼로 무찌를 것이다. 너희는 야훼를 배반하여 야훼의 눈밖에 나고 말았다.' 44 그들은 말을 듣지 않고 산꼭대기를 향하여 치달았다. 그러나 야훼의 계약궤도 모세도 진을 떠나지 않았다. 45 그 산에서 살던 아말렉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달려 내려 와 호르마까지 쫓아 오며 그들을 무찔렀다.

 

이스라엘은 단 하루가 늦음으로 광야에서 모두 죽어야 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우리의 그 마지막 하루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종말은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루가 늦으므로 우리가 야훼 하느님의 안식(安息)에 못 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인내를, 인내에 절제를, 절제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며 그리스도의 군사다운 전투를 오늘부터 해 내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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