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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인의 순도는 무엇이 결정하는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2-26 조회수1,071 추천수1 반대(0) 신고

 

신앙인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인이 아니고 신앙을 삶으로 실천해서 신앙인에 걸맞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줄 때 그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허울만 신앙인은 더 이상 신앙인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기도하는 것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얼핏보면 모순과도 같은 말일 것 같지만 모순이 아닙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그 부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기도한다고 다 완성된다고는 단정으로 말하기엔 힘든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미완성인 존재가 완성인 존재로 거듭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참다운 기도를 하며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누구나 하느님을 사랑한다고는 말을 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그게 진실된 것인지 아닌 것인지는 언젠가는 판가름 날 날이 올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게 다 벌거숭이처럼 자신의 신앙 민낯이 다 드러날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의 참다운 모습을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모습을 보며 진정한 신앙인인지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도 일정한 한계가 있습니다. 신앙을 하는 목적을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신앙을 하는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수많은 단련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군복을 입었다고 해서 군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군복은 군인이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한 수단입니다. 군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자질과 소양을 갖추기 위해서 입대를 해 훈련소에서 양성을 받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과 우리는 구별된 옷을 입었습니다. 그 옷이 바로 세례를 말할 것입니다. 옛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이지만 새로운 사람은 다시 오신 아담의 살리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우리입니다. 옷을 입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뉴스를 보면 어떤 신분을 상징하는 제복을 입고 그 제복을 입은 사람이 사회에서 해야 하는 게 있는데 그걸 하지 못해 구설수에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특정 신분을 이야기하면 그 집단에 대해 폄훼를 하는 것 같아 상징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왜 그런 구설수에 휘말리는 것일까요? 만약 그 사람이 일반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흔히들 말하는 누구나 아는 상식선에서만 그 사람을 단죄하지만 어떤 특수한 신분으로 인한 사람에게는 그 신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않아서 따가운 사회의 시선을 받는 것은 바로 그 신분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의복을 입음으로써 신앙인이라는 또 다른 신분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훈련을 하는 훈련병입니다. 군에 입대한 훈련병처럼 말입니다. 여기 세상이라는 훈련소에서 많은 훈련을 잘 받아야 할 것입니다. 훈련병이라는 타이틀은 훈련소 내에서만 가져야지 훈련소를 벗어나서까지 훈련병이라는 소릴 들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천주교 신자가 되기 위해서도 예비자 과정을 통해서 기본적인 과정을 받고 우리는 세례를 받습니다. 마치 이런 모습이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한 전형의 단순한 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럼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에 가기 위한 용사로 거듭나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수많은 훈련과정을 받는 훈련생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과연 어떤 훈련을 해야 할까요? 과거의 옛사람의 옷을 벗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해야 합니다. 조금 달리 표현하면 죄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죄수복을 입고 천국에 입성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죄수복을 입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 죄수복에 항상 따라다니는 주홍글씨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순수성 결여'입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인류 최초의 죄의 온상이 된 것의 효시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에 화와가 뱀의 간교한 꼬임에 넘어간 것입니다. 아무리 뱀이 화와를 유혹했어도 만약 화와가 하느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다면 죄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뿌리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 인간 본성 속에 있는 죄성입니다. 이 죄성은 다른 말로 말하면 원래 우리의 영혼이 있어야 하는 곳인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만이 가진 마음이 어떤 욕심으로 인해서 얼룩지고 어그러진 모습이 죄성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현대판 용어로 표현하면 인간의 잔머리와 같은 것입니다. 잔머리는 표현은 좋지 않은 표현이지만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이 잔머리를 굴리는 것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화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걸 면하는 길이 원래의 우리의 영혼이 뱀의 유혹을 받기 전 그런 상태의 순수한 영혼으로 되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백년 인생이라는 훈련장에서 훈련을 받는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훈련의 최종 목표는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은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노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육체의 노화처럼 우리의 영혼도 얼룩진 죄의 모습으로 변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저도 잔머리 굴리는 신앙인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나 이런 속성은 다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정말 천주교의 어두운 민낯을 이야기하며 자성의 의미를 촉구하고 반성하자는 의미의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바로 최근 저의 본당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은 무리이고 우회적으로라도 표현을 하고 싶었는데 이것은 다음 기회에 한번 올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는 오늘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이 말씀을 잘 새겨서 단순히 이 말씀이 늘상 당연한 말씀이고 그냥 하나의 이상에 불과한 말씀이라고 치부를 하는 선에서 그친다면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상은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그냥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살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살겠다는 것은 그냥 평생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수복을 벗지 않고 그냥 죄수로만 남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죄수복을 입고서는 절대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그런 처지라는 것은 인식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정말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 그렇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그냥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허울만 신앙인이라는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영혼으로 탈바꿈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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