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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응원의 말 한마디가 꺼져가는 영혼도 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3-29 조회수336 추천수1 반대(0) 신고

 

한 시간 반 전에 서울에서 아는 신부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어제 통화를 하려고 했는데 바쁘신 모양이라 통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문자로 신부님 그냥 통화를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고 하는 문자를 드렸습니다. 바쁘실 것 같아서 제가 그렇게 보내드렸는데 신부님이 궁금하셔서 그랬는지 전화를 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다음으로 저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 지금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오랜 시간 저를 지켜봐왔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분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했고 오랜 시간 제가 어떤 모습으로 신앙을 하는지 지켜봐오셨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제 모습 때문에 전화를 주셨는데 제가 통화 후에 문자를 드렸습니다. 신부님은 믿고 계시지만 제가 언젠가는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잠시 굿뉴스에 어떤 신부님의 강론을 하나 묵상하려고 들어왔다가 한 자매님께서 보내주신 댓글을 보고 더더욱 마음을 다잡아야겠고, 더더욱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응원의 댓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올리면서도 제 신앙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런 모습인데도 응원을 해 주셨습니다. 응원도 감사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표시는 하지 않았지만 응원을 해 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이런 분이 계신지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 입장에서는 용기를 내 주신 것입니다. 저한테는 그 짧은 응원과 위로의 말씀이 하느님의 위로 같았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저에게 하느님께서 전해주시는 위로 같았습니다. 순간 가슴뭉클했습니다. 자매님의 응원의 메시지를 보고 나서 다시 신부님께 문자를 보내드렸습니다. 이런 내용을 전했습니다. 하느님의 위로 같다는 말과 함께 좌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댓글을 보며 한 생각이 바로 응원의 말 한마디가 꺼져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다는 이런 영감이 순간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느낌을 전하고 싶어 글을 올립니다. 오늘 아침에도 묵상한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살면서 복음만 아니라 그냥 세상 삶 속에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묵상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 올리는 내용과 연관이 있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무리 옳고 맞는 말이라도 그게 타이밍과 환경이 맞아야 합니다. 가령 지금 교통사고가 났다고 가정하겠습니다.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사고는 그 사고자의 부주의로 인해서 일어났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환자를 살리고 봐야 됩니다. 살린 후에 부주의에 대해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말입니다. 접촉사고가 났어도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서 발생한 것이라고 해도 먼저 내려서 화를 낼 게 아니라 또 짜증을 낼 게 아니라 다치지는 않았는지 하고 말을 건네는 게 그게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운전을 어떻게 한 거냐고 따지는 것은 심정은 이해를 하지만 그렇게 하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생명과 관련된 것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고와 실수는 자기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가령 저의 사례를 통해서 말씀을 드리면 설령 상처를 받았어도 그걸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다 자기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 분의 말씀도 틀린 말씀은 아니고 맞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맞는 말씀이라도 상황에 맞고 또 타이밍도 맞아야 합니다. 이럴 땐 먼저 오늘 제가 본 댓글에 나오는 자매님의 말씀처럼 응원의 말과 함께 위로를 해 주는 게 맞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말기 암환자를 병문해서 사람은 다 한 번 죽은 것이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먹어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아무리 내용은 맞는 말이라도 말 한마디를 해도 그 상황에 맞는 말인지도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특히나 우리처럼 신앙공동체 내에서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해관계로 맺어진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순수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것입니다. 

 

이해와 이익 관계로 맺어졌다면 생존이 걸린 문제라 자신의 이해득실을 고려할 수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신앙공동체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려고 우리는 세상의 현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때로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은 다 부족한 죄인이라고 덮어놓고 이렇게 표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말씀도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 말씀도 그런 말씀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모든 경우에 일반화시키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말이 모든 것에 적용된다면 빛의 자녀는 세상의 어둠의 자녀와 달라야 한다는 말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그걸 모든 것에 적용한다면 굳이 우리가 하느님을 따르는 빛의 자녀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믿지 않는 사람과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굳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소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세상 사람과는 뭔가는 달라야 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기에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고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끔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됩니다. 바로 그게 하느님의 영광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제2의 구세주가 되어야 합니다. 구세주는 영혼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따르는데 행동은 오히려 정반대로 한다면 이건 아니지 않을까 하고 우리를 냉철하게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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