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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in Christo-두 봉 주교님(전 안동교구장)
작성자최성우 세자요한 신부 쪽지 캡슐 작성일1999-06-12 조회수2,859 추천수6 반대(0) 신고

 [사목98년 1월호에서 옮김]

in Christo

두 봉(전 안동교구장/주교)

 

  바오로 사도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서 나에게 가장 큰 힘을 주고, 사제생활에 핵심이 되었던 것은 'in Christo'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나의 인연을 말한다.

 

  'in Christo'는 내 좌우명(motto)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교품에 오를 때 정한 것은 아니다. 주교품에 오르면서 인장과 좌우명을 정하는 관습은 역사적으로 몇 백년 되었다. 그 당시 귀족 출신 주교들이 집안 가훈에 따라 정했던 것을 귀족 출신이 아닌 주교들도 자신의 인장과 좌우명을 정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귀족 출신도 아니며 평범하게 살고 싶었고, 주교품을 받았다 해도 10년 정도만 할 생각이었다.

 

  사실 'in Christo'는 신학교 때부터 좌우명으로 간직한 것이고, 지금까지도 편지 끝 부분에는 이 구절을 적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동교구의 후임자 박석희 이냐시오 주교님이 정한 좌우명이 'in Christo'라고 하니,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간직하고 있던 좌우명과 같아서 반가웠다. 'in Christo'는 한국어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이지만 이 표현은 조금 부족하게 들린다.``'in Christo'라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된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in Christo'를 더 설명하자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빈 그릇이다. 또한 고린토 2서 4장 7절의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다."는 말씀처럼 나는 질그릇이지만 내 마음의 주인인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 이것이 나의 삶이다. 필립비서 1장 2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필립비서에서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시는데, '사로잡혔다', '붙들렸다'라는 표현이다. 나는 완전히 사로잡히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주님과 이렇게 아주 친근한 사이가 된 것은 주님의 강복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 때문에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고, 그 때문에 신부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이 두 가지 표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면 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기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아침 잠에서 깨면 우선 성호를 긋고, 간단한 화살기도를 하면서 일어나고, 자기 전에 역시 성호를 긋고 자고, 낮에는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고 할까. 나의 생활은 그런 생활이다. 미사, 성무일도, 한 시간 묵상 등 여러 가지 기도를 하지만, 주로 화살기도를 하면서 간단히 "주님" 하고 부른다. 흔히들 주님을 부른 다음에 단서를 붙이는데, 나는 그냥 "주님"만 부른다. 차를 타고 어디 갈 때에도 "주님", 누구를 만나면서도 "주님", 내가 담당하고 있는 피정지도를 할 때에도 그냥 "주님" 하고 생각한다. 밤중에 잠에서 깨면 화살기도를 하고 좀 이야기도 나눈다고 할까. 저쪽에선 답이 없지만 들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잠을 자야겠으면 주님께 신고를 하고 잔다. "주님, 또 잡니다." 이런 식의 대화를 많이 하고 있다.

 

  마침 1997년도는 그리스도의 해였기에 나로서는 참 좋은 해였다. 성령의 해도 내게는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영, 성령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늘 관련하여 성령을 생각하고 올해도 예수님의 영에 따라서 살려고 한다. 나는 성령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본다.

 

  묵상 방법은 신학교 때부터 세 단계의 교육을 받았다. 곧 눈, 마음, 손이다. 눈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므로 성서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고 마음은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손은 결심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 돌이켜보니 이 방법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방법과 비슷한 것이다. 관찰, 판단, 실천이라는 것인데, 역시 주님의 눈으로 만사를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리고 주님의 손발이 되어서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in Christo'라는 말씀 안에 이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바오로 사도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그 'in Christo'가 나에게는 그만한 도움이 되었다.

 

  다시 이 말씀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한국말로 번역된 공동번역 성서와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성서를 비교해 보았다.

 

  200주년 신약성서를 번역한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전문가들인데,`'in Christo'라는 용어를 주로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로 번역했다. 딱 한 군데, 디모테오 2서 1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생명의 약속"이라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생명의 약속"이라고 했다.

 

  공동번역 성서는 'in Christo'를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우선 'in Christo'를 '그리스도와 함께'로 번역했다. 곧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산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6장 11절에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23절에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생명"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26절과 에페소서 2장 6절도 자주 같은 방법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나의 영성생활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생각한다는 것이다. 곧 만물, 하늘의 모든 것,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공동번역 성서의 또 다른 표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이다. 그 예를 에페소서 2장 10절과 로마서 8장 39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는 기도의 습관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는 미사를 드릴 때 뿐이며, 평소 그런 식으로는 기도하지 않는다.

 

  또 다른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서 고린토 1서 1장 30절은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본다. 신자들을 진정 하느님의 백성으로 존경하게 된 것은 아마도 'in Christo'라는 좌우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in Christo'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와 관련되는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어느 때는 답답할 정도로 'in Christo'를 자주 '믿는다', '그리스도를 믿고 어떻게 산다'는 식으로 번역을 했다. 이 성서는 개신교 신자들과 함께 번역한 것인데, 이 부분은 아무래도 개신교의 사고방식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고린토 1서 4장 15절, 15장 18.31절, 갈라디아서 2장 16절, 에페소서 1장 1절에서 이 표현을 볼 수 있다. 물론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믿는다는 행위가 근본이기에, 삶 전체를 두고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공동번역 성서는 또한 '영적인 사람'과 '그리스도인의 긍지'로도 번역했다. 고린토 1서 3장 1절에서는 '영적인 사람'으로, 필립비서 1장 26절은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긍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다운 자랑이라고 본다. 나도 그러한 표현에 공감한다. 참으로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을 큰 긍지로 여기고 있기에 물론 내게 부족한 점은 있겠지만 주님의 강복으로 줄곧 그렇게 살아왔다고 볼 수 있겠다.

 

  지금까지 'in Christo'를 성서의 번역과 함께 그 의미를 살펴보고 나의 좌우명과 연관시켜 보았다. 실제로 'in Christo'에 대한 지향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나칠 수 없었다. 답답하고 어려운 일을 처리할 때, 특히 교구장으로 있을 때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에는 이 좌우명 없이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풀면 좋을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지, 그리스도를 떠나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참으로 주님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5), 이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다. 결국 나의 영성은 'in Christo'에서 나온 것이며, 지금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제생활, 주교생활 동안 내가 그리스도를 잘못 증거하지 않았는지 염려스럽기도 하다.

 

  'in Christo'라는 말씀에는 나도 그 안에 있고,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산다는 식으로 생각해 왔다. 물론 교구장으로서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었겠지만, 교우들의 순수한 모습과 활동에서 나 혼자만이 'in Christo'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물론 외국인으로서 나의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과 겪은 인간적인 문제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많은 박해를 받으시고 오해를 받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에, 나 혼자 'in Christo'대로 산다고 착각한 것이 아닌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어떻게 'in Christo'를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특별한 계획은 없다. 다만 주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일할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그날그날 주신 대로 살면서 나이가 들수록 다른 이에게 부담을 주거나 자기 중심적인 생각 하지 않으려 한다. 내 자신이 살고 싶었던 이 좌우명을 아직도 다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며, 다만 그런 방향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계속 할 뿐이다. 쉽게 화도 내고 풀기도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성사를 보면서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솔직하다고 할 수도 있고 인내심이 없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아직도 'in Christo'를 살아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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