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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839년과 2000년:순교는 계속되어야 한다(한국순교자대축일)
작성자상지종 쪽지 캡슐 작성일2000-09-25 조회수2,386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00, 9, 24  한국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복음 묵상

 

 

루가 9,23-26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

 

그 때에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럽게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묵상>

 

1839년 10월 31일: 성 유대철 베드로 순교

 

유대철베드로(1826-1839)는 어려서 부친 유진길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인 어머니와 누나에게 끝임없이 괴로움을 당했으나 그 때마다 항상 어머니와 누나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교우들이 영웅적으로 순교하고 또 부친도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순교를 결심하고 자수, 포청에서 14세의 어린 나이로는 견디기 힘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 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에게 "믿고 말고요, 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라고 대답했고 화가 난 형리가 다시 시뻘건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 하자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를 놀라게 하였다. 포청에서 총 14차의 형벌과 100여대의 매, 그리고 40도의 치도곤을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표정을 띠었다. 10월 31일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가톨릭대사전 중에서)

 

 

2000년 9월 13일 오후 7시 경: 이모 군에 의한 과실치사 사건 발생

 

지하철 1호선 전동차 안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자신에게 꾸지람을 한 것으로 오해한 이모(15.중3)군이 시청역에서 염 알베르도 할아버지를 뛰쫓아 내린 뒤 승강장으로 내려가던 계단에서 할아버지의 등을 발로 걷어차 넘어뜨렸다. 염 할아버지는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져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 치료를 받던 중 15일 새벽 끝내 운명을 달리했다. 이모 군 역시 천주교 신자였다. (가톨릭신문 2000,9,24 중에서)

 

 

14세의 유대철 베드로와 15세의 이 모군

 

시대적 상황은 달랐지만 같은 나이 또래, 같은 믿음을 가졌던 소년들입니다. 그러나 한 명은 죽음으로써 주님을 증거했고, 다른 한 명은 이유야 어떻든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주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유대철 베드로 성인을 생각하며 이 모군을 헐뜯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반대로 이 모군을 떠올리면서 유대철 베드로 성인의 위대한 죽음을 칭송하고자 하는 생각도 없습니다. 한 사람씩의 예로써 박해시대 교우들과 오늘날 교우들을 집단적으로 추켜세우거나 매도하고자 하는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다만 왜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생겨야만 했는지를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제의 한 사람으로서 반성해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라난 신앙인이며 동시에 주님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럼움과 책임감을 통감하기 때문입니다.

 

이 군이 염할아버지를 죽일 마음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고 믿습니다. 경찰서에 잡혀온 이 군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에 아연질색했다는 신문(9,14일자 한겨레)의 기사를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였던 이 군이 평소에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자신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했다면, 아니 그 이전에 교회의 어른들이 이 군에게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기만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이 군이 죽음으로써 주님과 신앙을 증거한 순교의 삶에 대해 마음을 두고 있었더라면, 아니 그 이전에 교회의 어른들이 오늘날에 있어서 순교의 의미에 대하여 알려주기만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교회가, 신자들이 평소에 조금만 더 복음 실천에 모범을 보였더라면, 만의 하나일 수도 있는 이런 불행한 사건이 잃어나지 않았을텐데라는 아쉬움만 깊어갑니다.

 

 

순교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계속되어야 한다.

 

박해상황이 끝나고 순교의 시대가 지나자 믿는 이들이 많이 느슨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순교의 시대가 지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는 '증거'입니다. 하느님과 복음, 사랑과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신앙 공동체를 온 세상에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물론 순교의 최고 형태는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바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 안에서 삶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 역시 고귀한 순교입니다.

 

순교는 죽음이라는 형태의 증거의 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순교는 믿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의 순교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한국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오늘은 단순히 지난날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떠올리는 날이 아닙니다. 자신의 현재의 삶은 외면한 채 순교자들의 숭고한 삶과 죽음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날이 아닙니다. 순교자들의 위대한 삶과 죽음을 통해 지금 우리의 삶을 비추어보고 순교하는 마음으로 다시 일어나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다짐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이기심과 사회구조적 불의에 편승해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는 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는 요원합니다. 그런 만큼 믿는 이들인 우리의 증거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장하신 순교자들의 피는 우리의 삶을 통해 다시금 솟구쳐 이 땅에 뿌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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