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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작성자김종열 쪽지 캡슐 작성일2000-11-09 조회수2,228 추천수4 반대(0) 신고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복음 : 요한 2,13-22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고 꾸짖으셨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한 2,13-22)

 

 

●주님께서 채찍을 휘두르신다. 휙- 휙-. 우당탕 쿵쾅. 와르르.

주변 전체가 아수라장이 된다.

 

나를 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성전(聖殿).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이 들려온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

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1고린 6,`19)

예수님의 피로써 세워진 성전.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들인 몸.

 

나를 들여다본다.

저쪽에 소 파는 사람, 그뒤에 양 파는 사람, 그 옆엔 비둘기 파는 사람,

그리고 내 바로 옆엔 환전상.

혼돈!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허물어라. 내가 다시 세워주겠다.

창조, 새 창조!

 

부활의 주님, 창조의 주님,

감사와 흠숭과 찬미를 세세대대로 영원토록 받으소서! 아멘, 알렐루야!

 

 

 

오늘의 복음 주신 곳 : 바오로의 딸

                      http://www.pauline.or.kr

 

 

 

 

 

 

 

[생활속의 복음] 과부와 헌금   

 

과부의 헌금

(마르 12,38-44 또는 마르 12,41-44)

 

신 은근 신부 (마산교구 월남동 본당 주임)

 

예수님은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사람들의 어디를 보고 계셨을까. 얼굴 표정, 아니면 손이었을까. 아마 몸 전체를 보고 계셨을 것이다. 헌금은 정성이다. 정성은 몸가짐에서 드러난다. 물건을 사고 돈을 내듯 그런 태도는 아니었는지, 의무감 때문에 느낌없이 헌금대 앞으로 나갔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헌금은 당당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헌금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정성이 된다. 액수가 많고 적음은 별 문제가 아니다. 정성이 들어있어야 참된 헌금이 된다.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정성으로 헌금하는 여인을 보신다. 액수는 적었지만 내용이 그분을 감동시킨다. 여인은 자신의 생활비에 해당되는 돈을 바쳤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행위다. 자신의 생활비를 바치다니, 그럼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러나 여인은 바쳤던 것이다. 물론 가난한 여인이었기에 생활비는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바치기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생활비를 바친다는 것은 전부를 바친 것이 된다. 먹지않아도 좋다는 희생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다. 여인은 자신의 정성을 그렇게 희생으로 포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더 이상 가난한 여인이 아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셨기 때문이다. 외적모습은 여전할 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부유함이 그녀를 감쌌을 것이다. 생활비를 바쳤기에 생활을 보장받는 기적을 그녀는 체험한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가난한가 부유한가.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부유한 사람이고 만족할 수 없다면 가난한 사람이다. 객관적 판단으로 소유가 넘치는 사람일지라도 불만 속에 있다면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만족해야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이라야 당당하게 헌금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헌금의 많고 적음을 떠나 애정이 담긴 봉헌을 할 수 있다. 생활비를 바쳤던 과부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억지로 바쳤다면 어찌 주님께서 감동하셨겠는가.

 

여인의 모습 안에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일상사에 쫓겨 돈과 시간이 부족한 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기도하는 시간도 선행을 베풀 여유도 없이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돈보다 시간이 가난한 우리들이다. 그런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시간은 주일 하루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시간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한주간 살아온 삶을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성서의 여인이 자신의 생활비를 바쳤듯이 그렇게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봉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실 것이다. 얼마나 많은 헌금이 아니라 어떤 헌금을 바치고 있는지 보고 계실 것이다. 돈을 바치는 것만이 헌금은 아니다. 시간을 바치는 것도 헌금이다. 희생을 바치는 것도 헌금이다. 한주간을 살면서 겪었던 아픔과 억울함과 오해와 실망스러움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도 헌금이다. 그러니 우리가 바치는 헌금 속에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있어야 한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를 바쳤다. 그렇게 우리도 일주일의 삶을 함께 바치는 헌금이 되도록 하자.

 

 

 

 

오늘의 복음 주신 곳 : 평화 신문   http://211.196.243.231/news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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