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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수난, 그 여정의 인물들 1 (W.라이어제더 외)-교묘한 공범
작성자김현정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13 조회수1,435 추천수5 반대(0) 신고

사순 시기를 보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저의 성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는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은 예수님 수난에 관련된 인물들의 역할과 현재 우리의 모습을 재인식 해볼 수 있는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나도 예수님의 죽음에 동조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란 걸 알았습니다. 또한 저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마음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모순된 인간의 모습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십니다.

 

 이책은 총4권으로 각각 6명정도의 인물이 소개 됩니다. 남은 사순 기간 동안 매일 한명씩 올릴 예정입니다. 특히 작가는 복음사에서 과소 평가 되었던 두 여인에 대해서 깊이 있는 묵상을 시도합니다. 자매님들의 용기를 북돋아 줄 기회일 것 입니다.

 

 ’...예수 수난의 성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해 받고, 모욕 당하며 십자가에서 처형된 나자렛 예수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신앙.사랑을묵상하며점검하는일이다.’-머릿글에서

 

 대사제, 가야파-빌리발트 라이어제더

 

 요한 복음은 가야파가 예수 운명의 결정적인 국면에 관여 했다는 것을 이렇게 밝힌다.

 

 (요한 11,45-53)

 

 가야파는 당시 로마의 통치 속의 이스라엘의 가혹한 현실괴 메시아를 기다리는 상황 속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였다.

그는 이중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였다. 그것도 하느님의 성전과 율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그는 영리하게 로마 총독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백성의 관심사를 훌륭하게 대변한다. 그는 로마와 자기민족에서 두터운 신뢰를 받는다.

그러나 예수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자렛 출신의 한 청년이 유다교의 종교적 권위를 실추시키고, 종교 지도자들을 위선자로 몰아붙였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을 본받지 말아라.(마태 23,3)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 중 죄 많은 세리를 의인으로 여기는 한편, 충실하게 율법을 지키는 바리사이파 사람을 죄인시함으로써 하는님의 법이 요구하는 종교 실천의 의미를 완전히 뒤바뀌어 놓은 것이다.

예수는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위협적이며,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그런 이상주의자는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만 했다. 대사제 가야파는 바로 그 책임을 언급하는 것이다.

 

 (요한 11,49-50)

 

 가야파의 안중에는 오직 기존 체제의 유지, 곧 권력구조와 그 영향력의 유지만 있을 뿐이다. 가야파는 예수라는 자의 영향으로 사회가 변화되고, 가치관을 뒤흔드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예수가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가야파의 말은 예수가 불의하다고 주장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행동의 방향은 방향은 책임 회피와 자신의 이익 추구였다.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소송 재판을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미룬다. 또 로마 총독은 예수의 문제가 유다인 종교 문제이므로 자신에게 권한이 없다고 하며 산헤드린 의회로 미루고, 산헤드린 의회는 자신들에게 사형을 언도할 권한이 없다는 핑계로 다시 총독에게 미룬다. 그래서 예수는 헤로데에게 넘겨진다.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사형 시켰던 전처를 밟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긴다. 빌라도는 특전을 베풀어 예수를 놓아주고 그 대신 다른 죄수를 처형하자는 세련된 구출계획을 세우지만 수포로 돌아가자 자신은 그의 죽음에 무죄하다는 표시로 손을 씻는다.

 

 어떤이는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열정에서, 또 어떤이는 공동체의 안녕을 걱정해서 예수의 죽음에 찬성하였다. 마지막으로 로마인은 사회의 평온과 질서를 지킨다는 이유에서 예수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교묘한 죄를 폭로한다. 교활한 부당함, 비겁과 어둠, 허위와 저속한 순응을 폭로하며 또한종교,정치,사회,사법 등의 분야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속임수와 이기심이 빚어낸 결과이다.

이 파국의 특징은 범죄에 가담한 자들 중 누구도 명확하게 책임을 질 만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그래서 책임을 질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순수하고 의로운 예수는 죽음의 길로 갔다.

 

예수를 짓누른 것은 한 개인의 우연한 배반이 아니라 사회의 부패였다. 그 당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다. 가야파는 우리 고유한 삶의 한 부분으로 지금도 살아있다.

 

예를 들어, 외관만 보고 우리는 상대방을 판단하며, 우리가 우리의 사고와 입장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새로운 요구와 도전을 외면하다 보면 이와 유사한 일은 쉽게 일어난다.

 

우리는 현실에 적당히 안주하며 새로운 지식의 추구를 원치 않고 기존의 입장만을 고수하고 다수의 의견에 적당히 손을 들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배반하면서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얼마나 쉽사리 교활하게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가?

 

예수 수난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지금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주어지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정의와 진리를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이웃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설령 우리는 성실하지 못하다 해도 살아 계신 하는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의 배반과 점점 늘어나는 죄의 혼란을 오히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용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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