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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하는 사람은...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27 조회수1,127 추천수6 반대(0) 신고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말씀(1요한1,1-4; 요한 20,2-8)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사람이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의 "품에 기대듯 자리잡고"(새번역) 있었을만큼 친밀했다. 

예수께서는 중요한 사건(최초의 소생기적-회당장 딸, 변모사건, 최후의 밤-겟세마니)때는 
유독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다녔다. 
왜 예수님은 사도들 중에서 몇 사람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으며 
그 중 한사람을 유독 사랑하셨을까?

요한은 야고보와 함께 ’천둥의 아들’이라고 불릴만큼 성격이 다혈질이고 급한 사람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에 화가 나서 주님의 능력을 빌려 복수를 시도하려고 했던 적도 있고, 
그의 어머니는 장차 그들을 일등공신으로 출세시키고자 치마 바람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예수님 곁에 꼭 붙어 다니던 베드로 역시 급하고 실수 잘하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어쩌면 세 사람은 남보다 더 사랑을 쏟아주고 
남보다 더 교육을 시켜야할 제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그렇게 급하던 ’천둥의 아들’ 요한이 오늘 복음에서는 
베드로에게 무덤에 먼저 들어갈 것을 권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변했다. 
사랑하던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먼저 무덤에 달려왔음에도 
동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요한의 모습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위에 서려던 
야망에 찬 옛 모습이 아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도 
가장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알려주었다. 
부활하신 주님의 신비를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요한 복음의 저자가 만일 사도요한이라면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묘사해야하는 입장에 있게 된다.
이렇게 가정해 볼 때, 훗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주님의 가슴에 기대고’있다고 묘사한 대목에 주목해본다.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듣고 첫 제자가 된 요한은 
’눈으로 보는 사람’에서 차차 ’가슴으로 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가슴으로 보는 요한이 되었다는 것은 
펄펄 뛰는 혈기로 눈에 보이는 대로 반응하는 요한이 아니라 
가슴에 묻어두고 생각하고 느끼고 삭히는 요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한은 무엇보다도 십자가 밑에서의 고통의 시간을 주님과 함께 보냈다. 
온갖 기대와 희망을 걸고 쫓아왔던 최초의 시간부터 
모두가 도망가버린 괴롭고 참담한 최후의 시간까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알아볼 수 있고 
주님의 마음을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드는 묘약인 것이다. 

십자가 밑에서의 주님의 부탁인 어머니(라는 또 다른 이름의 사랑)를 모시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요한 사도의 마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 올랐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끝까지 함께 있었던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가장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복음에서 다른 제자들보다 특별히 더 사랑했다는 말로 
자주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자신을 사랑함을 자주 확인했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랑의 고백일 뿐이다. 

사도 요한의 모습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알아 볼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까지도 알아 뵐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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