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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년 만에 다시 백두산 천지를 보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13 조회수429 추천수2 반대(0) 신고
                  4년 만에 다시 백두산 천지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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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엊그제 받은 우편물들을 오늘 아침에서야 하나하나 개봉하는 일을 했다. 굳이 '일'이라고 하는 것은 우편물들이 제법 많아 일일이 개봉하는 일이 어지간히 시간도 걸리고 정말 '일스럽기' 때문이다.

이틀의 우편물들을 오늘 아침에 개봉한 것은 지난 10일 별세하신 숙모님의 장례를 치르는 일로 몸이 몹시도 피곤하여 어제는 저녁 일찍 곯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어제 받은 우편물 중에는 선배 소설가 이은집 선생이 보내주신 편지도 있었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었다. 편지 봉투 안에는 이 선생의 간단한 편지와 함께 열두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들은 지난 2일부터 6일까지, 4박 5일 동안 함께 했던 <한국소설가협회> 24명 소설가들의 중국 '요녕성/길림성' 여행 모습들을 담은 사진이었다.
 

▲ 천지 가는 길 / 백두산 천지로 오르는 '서파' 길은 1300여 개의 계단 길이 다소 가파른 편이어서 쉬어가야 했다. 비 때문에 우의를 준비했지만, 비가 그치고 하늘이 열려 더없이 고마운 마음이었다.  
ⓒ 지요하  천지 가는 길

또 열두 장의 사진들 중에는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단연 많았다. 나는 그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사진들 안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이은집 선생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를 짓기도 했다.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그 시간 속을 어느새 부유(浮遊)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번 중국 여행에서는 이은집 선생과 룸메이트가 되었다. 이 선생은 올해 66세로 나보다 6년 연상이지만, 같은 충청도 출신이라 오래 전부터 친숙한 사이여서 서로 룸메이트가 된 것을 좋아했다. 물론 오래 전에 서울특별시민이 되어 살고 있지만, 충남 청양 출신인 그는 정년 퇴임 때까지 오랫동안 교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부지런한 작품 활동으로 많은 저서들을 가지고 있는 작가다.

한동안 방송 드라마 쪽에서도 활동을 한 그는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로, 또 이런저런 대외 활동으로 늘 바쁜 가운데서도, 올해 들어 무려 8편의 신작을 발표하는 등 남다른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는 나들이를 할 때는 반드시 성능 좋은 카메라를 휴대한다. 그래서 그는 '한국소설가협회' 전속 카메라맨의 역할도 한다.

'한국소설가협회' 행사 때마다 꼭 카메라를 들고 오시는 분으로는 강호삼 선배도 있다. 강호삼 선배 역시 오랜 세월 카메라를 몸에 달고 사시는 사진 전문가다. 그런데 이번 24명 소설가들의 중국 여행에 강호삼 선배는 함께 하시지 못했고, 이은집 선배가 그 역할을 전담했다.

▲ 백두산 천지 앞에서 / 내 바로 옆으로 <한국소설가협회> 유재용 이사장, 안장환 부이사장, 이은집 이사와 함께  
ⓒ 지요하  백두산 천지

사진을 찍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상 작업을 거쳐 자신을 제외한 23명의 작가들에게(거기다가 10여 명 연변작가들에게까지) 일일이 사진 보내는 작업을 했을 테니, 그 시간과 비용 지출도 컸을 테고, 노고도 여간이 아니었을 터이다.

생각하면 참으로 고맙고도 미안한 일이다. 나도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제법 많이 찍어왔지만 아직 동료 작가들에게 메일 전송도 못 하고 있으니, 이은집 선생의 그 순발력과 부지런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면서 이 선생께 감사 전화를 드렸더니,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고 했다.

<2>

네 번째 중국 여행을 다녀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6일(목요일) 귀국했으니, 꼭 일주일 만에 이 글을 쓴다. 벌써 일주일 전의 과거지사가 되어 여행 이야기를 그만두려고 했으나, 이은집 선배께서 보내주신 여행 사진들을 오늘 접하고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원래는 또 한 번의 '가족 여행'을 생각했다. 지난 2004년 여름 12명 가족으로 단체를 만들어서 중국 '북경/만리장성'을 관광한 적이 있다. 또 지난해 여름에는 12명 가족을 이끌고 일본 큐슈 관광을 했다. 그 두 번의 가족 여행의 즐거움은 내게(우리 가족 모두에게) 각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1999년과 2005년에는 제주도를, 그리고 2003년에는 백두산과 연변 여행을 했지만, 그것은 '범(範)가족'이 아닌 '소가족(小家族)' 여행이어서 재미가 별로 풍성하지 못했다.)

▲ 백두산 천지 / 북한 영토와 중국 영토를 가르는 제5호 경계비 지점에서 바라본 백두산 천지의 모습  
ⓒ 지요하  백두산 천지

이렇게 나는 가족 여행의 이력이 있는 편이어서, 올해 또 한 번 그 즐거움을 누려볼 생각이었다. 올해 연세 84세이신 어머니께서 더 노쇠해지시기 전에 가까운 중국이라도, 외국 여행을 한 번이라도 더 시켜드리고픈 마음이었다. 또 올해 고2인 아들 녀석이 내년에는 고3이 되므로, 올해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선은 비용 문제를 생각해야 하므로, 평택 항에서 배를 타고 중국 산둥반도를 다녀오는 상품을 선택했다. 나는 지난 2004년 6월 태안문화원 행사에 참여하여 중국 산둥반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평택 항에서 배를 타고 가고 오는, 4박 5일 관광이었다. 그때의 즐거웠던 기억이 실팍해서, 그 여행 상품을 가족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행사와 접촉까지 하는 단계에서, 아내가 오른쪽 무릎 관절 내시경 수술을 받게 된 사정 때문에 그 계획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미안해하며 자신을 빼놓고 가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또 한 번의 가족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보니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한국소설가협회' 사무국으로부터 공지가 왔다. '소설가 안수길 선생 <북간도> 집필 5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연길에서 열며, 겸하여 4박 5일 동안 백두산과 연변 지역을 돌아보는 행사를 실시한다는 공지였다.

나는 이미 2003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백두산 천지도 보고 연변 지역을 구경해본 처지였다. 헌데 묘하게도 4년 전 그 추억의 길을 다시 밟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느새 4년 전이 되어버린, 가족과 함께 했던 그 길을 이번에는 혼자(?) 쓸쓸히 걸어보고 싶은 마음은 정말 이상한 욕구였다.
  

▲ 경계비 지점의 경고판들 / 북한 영토와 중국 영토를 가르는 5호 경계비 지점에 설치된 한글 경고판들  
ⓒ 지요하  백두산 천지

그러나 이번 백두산 여행 코스는 4년 전과 달랐다. 4년 전에는 중국 대련에서 비행기를 바꿔 타고 연길로 날아가서 일박한 다음 백두산 북쪽 길(북파)로 해서 백두산을 올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련에서 버스로 비사성을 들르고 심양을 거쳐 통화까지 장시간을 이동한 다음 이튿날 백산을 거쳐 백두산 서쪽 길(서파)로 백두산을 올랐다.

'북파' 코스는 백두산 정상 턱밑까지 지프를 타고 오른 다음 5분 정도 언덕을 오르면 바로 천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파' 코스는 버스에서 내려 1300여 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야 했는데, 어지간히 힘든 길이었다. 북파에서는 보지 못했던 가마들이 많았고, 걸어 올라가는 것을 끝내 포기하고 중도에서 가마를 타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3>

백산에서 점심을 먹고 백두산을 오를 때 우리는 모두 우의를 사서 입어야 했다. 가늘게 비를 뿌리는 날씨였다. 아무래도 천지를 보기는 그른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온통 구름에 덮이지는 않은 채로 비가 내리는 천지 모습을 볼 수도 있고, 그것만도 '성공'이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 경계비 / <한국소설가협회> 작가들은 국경 경계비 너머의 북한 영토 안에 오래 머물렀다.  
ⓒ 지요하  백두산 천지

아무튼 우리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희망'을 안고 버스에 올랐다. 나는 이미 2003년에 천지를 두 번이나 보았다. 천지를 처음 본 다음날 새벽에 다시 올라 천지 옆에서 일출을 보며 미사를 지낸 추억을 동료 작가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천지를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기도 했다.

백두산 길을 한 시간 이상 달린 다음 버스에서 내렸을 때 우리는 모두 우의를 벗었다. 백두산 정상의 하늘은 놀랍게도 파란빛이었다. 바람결이 더없이 상쾌했다. 나는 계단 길을 밟으며 불현듯 4년 전의 아들 녀석 목소리를 떠올렸다.

당시 아들 녀석은 중1이었다. 지프에서 내린 아들 녀석은 재빠르게, 누구보다도 먼저 언덕을 오른 다음 큰소리를 질렀다.

"아빠, 빨리 오세요! 아주 멋져요! 정말 멋져요! 빨리 오세요!"

그때 아들 녀석은 저만치에서 천지를 넘보는 구름 떼의 이동 모습에 위협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내 걸음을 재촉하는 그 '환성'은 내게 야릇한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지금도 내 가슴에서 미묘한 파동으로 존재한다.

나는 4년 전에 내 기억에 새겨진 아들 녀석의 목소리를 계속 떠올리며, 그리고 묵주기도를 계속하며(정녕 묵주를 지팡이 삼고), 힘차게 가파른 계단 길을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또다시 백두산의 천지를 보는 기쁨을 맛보았다. 4년 만의 실로 감격적인 재회였다.

▲ 여성 작가의 백두산 포옹 / 여성작가 한귀남씨는 땅에 엎드려 백두산 전체를 포옹했다.  
ⓒ 지요하  백두산 천지

4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북한 쪽에 속한 땅을 마음껏 밟을 수 있었다. 4년 전에는 가이드로부터 "저 건너편은 북한 땅"이라는 말을 들으며 가슴 저미는 듯한 아픔을 느꼈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내 발로 북한 땅을 밟는 데서 또 다른 아픔을 느껴야 했다.

중국 영토와 북한 영토를 가르는 제5호 경계비가 서 있는 지점이었다. 나는 그 경계비를 본 다음부터는 주로 북한 영토에 머물렀다. 꽤 먼 곳까지 걸음을 하기도 했다. 북한 경비병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이미 '월경'을 하고 '월북'을 한 상태"라는 가이드의 말에 웃음을 머금기도 했으나, 쓴웃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도 중국 땅을 거쳐 백두산을 올랐다는 사실은 내게 두 가지의 슬픔을 갖게 했다. 중국 땅을 거쳐야 한다는 본래의 '부당함'에다가, 왜 이곳이 중국 땅인가라는 의문, 그 부당함에 대한 인식이 겹쳐지는 슬픔이었다.

내가 오늘 다시 백두산을 올라 천지를 보는 것은 그 두 가지 슬픔을 확인하는 일일뿐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동료 작가들과 어울려 오늘 천지를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된 '행운'에 감사하고, 그 행운을 계속적으로 확인하는 행사(사진 촬영)를 즐기면서도 문득문득 한숨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 경계비 옆에서 / 국경을 가르는 경계비 옆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백두산 경계비의 존재가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 지요하  백두산 천지

이윽고 천지와 작별을 하고 내려오면서도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우의까지 구입해야 하는 날씨 속에서도 명확하게 천지를 볼 수 있었던 그 행운을 재삼재사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하지만 나는 거듭거듭 아쉬움을 삼키며 묵주기도에 열중했다.

나는 백두산을 오르면서도, 천지를 보면서도, 또 그곳을 내려오면서도 손에서 내내 묵주를 놓지 않았다. 오늘 이후 다시 천지 모습을 보고 싶더라도, 또다시 중국 땅을 거쳐 백두산을 오르는 짓은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언제든 북한 땅을 밟고 백두산을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면 그때 다시 천지를 보리라는 생각이었다. 그 다짐을 가슴에 새기며, 나는 중국 여행 내내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다. 그 덕분에 동료 작가들 중에 천주교 신자이신 분들을(냉담 중이신 분들까지) 모두 쉽게 알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내 주변에는 백두산을 네 번이나 올랐는데도 천지를 보지 못하신 분이 있다. 지난 8월 2일 <한국미술교육자협회> 회장이며 충남 서천여중고 교장이신 유순식 화백을 <충남예술> 여름호 '표지인물'로 모시기 위한 인터뷰 일로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백두산 천지도'를 그리기 위해 백두산을 무려 다섯 번을 오른 끝에, 그러니까 다섯 번만에 천지를 보았다고 했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헛수고 한번 없이 백두산 천지를 세 번이나 보고, 천지 옆에서 일출을 보며 미사까지 지낸 내 행운이 미안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내 행운을 자랑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은 결코 아니다.  


2007.09.13 17:2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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