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은총피정<17> 십일조 봉헌 - 강길웅 요한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14 조회수1,438 추천수24 반대(0) 신고
                                 

 

십일조 봉헌

 

보화가 들어 있는 세 번째 보물단지는 십일조 봉헌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십일조' 에 대한 강론을 잘 듣지 않아서 그 은혜를 모르는데, 우리가 일해서 얻는 수입에는 내 몫 외에 하느님의 몫이 있는데, 이건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벌었어도 내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것입니다. 절대로 거기에 손대면 안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빠져나간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를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그 뒤에 이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되며, 또 우리가 하나를 불평하게 되면 불평할 일이 그 뒤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없는 감사도 감사를 하면 감사할 일이 찾아온다."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한센 가족들이 사는 정착 마을에는 천주교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이 함께 사는 혼합 마을이 있었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외국 신부님들로부터 구호물자다, 연탄 값이다, 쌀값이다 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누구 하나 지원해 주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신자들은 같은 한센 가족이면서 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입니다. 가난하게 살던 개신교 신자들은 웬일인지 저마다 쑥쑥 일어서서 잘 사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모순된 결과가 나오는가? 잘살게 된다면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천주교 신자들이 더 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읍내에서 동냥해 오면 그중

에서 열에 하나를 꼭 하느님의 몫으로 바쳤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십일조를

바치니까 더 기도하게 되고, 더 찬송하게 되었으며, 더 검소하게 살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살게 됩니다.


   반면에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의 몫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으며, 외국신부님들이 불쌍하다고, 봉헌을 안 해도 된다고 가르치니까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천주교 신자들은 날마다 술 마시고싸움질만 했으며 밤마다 화투치며 도박만 했습니다. 그중에는 산 넘어 춤추러 다니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일이 잘되는 곳에는 잘되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안 되는 곳에는 안 되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왜 기도도 안 하고 서로 다투기만 하며 화목하지 못하는가? 하느님의 몫을 하느님께 바치지 않아서 마음이 하느님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가난해도 하느님의 몫을 하느님께 바쳐야 복 받습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 보면, 모든 수확의 십분의 일은 주님께 바칠 거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 열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열 개 중에 아홉 개는 우리의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는 하느님께 바칠 거룩한 것입니다. 이것은 감추거나 숨겨서도 안 되며 뒤로 빼돌려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계산은 인간의 계산과는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얻은 것은 그의 나이 백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인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 22.2 참조)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때 멋모르고 장작을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아들 이사악을 볼 때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뜻에 손명합니다.


   이윽고 아이들 묶어 재단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칼을 뽑아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말립니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창세 22.16-17)


   이게 하느님의 계산입니다.


   인간의 계산은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영입니다.  세상없어도 영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은 다릅니다. 하나에서 하나를 뺏는데도 그 답이 천도 되고 만도 됩니다.  이상하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열왕기 상권 17장에 보면 사렙타 과부의 얘기가 나옵니다.   아합이라는 이스라엘 왕이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많이 함으로 이스라엘에는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예언자 엘리야를 시돈 지방 사렙타로 가서 살게 하셨는데 그곳에는 아들 하나를 둔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을 때 엘리야가 말했습니다.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그때 과부가 말합니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 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그때 예언자가 말했습니다.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불쌍한 과부의 마지막 음식을 과부가 먹지 말고 예언자인 자기에게 먼저

가져오라니, 막말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일입니다.  그래도 과부는 엘리야가 시키는 대로합니다.   그랬더니 그날부터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동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계산은 사람의 계산과는 다릅니다.


   말라키서에 보면,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3,10)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걸 모릅니다.  특히 천주교회에서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으니까 하늘에 보물 창고가 있는 줄도 모릅니다.


   저는 제가 초청되어 가는 성당마다 항상 '하느님의 몫'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있느냐? 이거 가짜일 수 있고, 얼마나 많이 봉사하고 있느냐? 이것도 위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말썽을 많이 일으키는 사람들은 소위 기도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과연 어떤 신자인가 알려면 사무실에 가서 교무금 정부만 들춰 보면 압니다. 거기에 그 사람의 신앙이 다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요 복음 6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정말 마음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왜 기도하지 않느냐? 하느님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남편은 사목회임원이요 아내는 레지오단장입니다. 그래도 집에서는 함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안 하느냐? 마음이 하느님께 없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하느님께 없느냐? 하느님의 몫을 하느님께 바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흔히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서로 마음이 있으면 밤새도록 얘기해도 졸리지 않고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으면 5분도 피곤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마음이 있으면 30분, 1시간 힘듭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집집마다 성경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1년 내내 성경을 읽지 않는 가정이 많습니다.  왜 읽지 않느냐?  마음이 없습니다.  갑돌이가 갑순이에게 관심이 있다면 갑순이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면, 알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결국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  부동산이 등기 되어 있고 내 비밀 번호로 은행에 돈이 예치되어 있다 해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얻은 내 마누라도 내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다 돌려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보물을 땅에 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좀 먹거나 녹슬어서 못 쓰게 된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마태 6,19-20).  그럼 하늘이 어디냐?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이 내 하늘이며 내가 믿는 하느님이 내 하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으면서도 하늘을 모르며, 열심한데도  보물을 하늘에

쌓을 줄 모릅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교무금에 아주 인색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공소 회장을 수십 년 하셨는데 교무금에 인색하시더니, 아버지께서도 할아버지를 닮으셨는지 교무금에 인색하셨습니다.  제가 신학생 땝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때 초등학교 교장으로 계셨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조용히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께서 공소 회장을 수십 년 하셨고 아버지께서도 총회장을 여러 번 하셨으며,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이 이제 신부가 됩니다.  그러니 십일조 봉헌을 하십시오. " 그러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야, 옆집 사는 변호사도 만 원밖에 안 한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왜 믿음도 없는 변호사 말씀은 하십니까?"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께서 공소 회장을 수십 년 하셨고, 아버지께서도 총회장을 여러 번 하셨으며  아버지의 아들이 이제 신부가 됩니다.    그러니 십일조를 하십시오." 그러자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참견하지 말아라."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사람은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오래 믿었다고 믿음이 그만큼 성장하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오래된 신자보다  새 신자들이 더 뜨겁게 믿는 모습은 우리 주위에서 많이 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때 아버지 말씀을 듣고는 다시는 아버지께 십일조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혼자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부 되고 한참 후의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칠순을 맞이하셔서 친척들이 전부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를 함께 하며 축하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 끝날 때였습니다. 갑자기 큰 외숙이 절보고, 신부님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하시더니, 이런 기회에 '한 말씀'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사 때 다 말씀드려서 할 말이 없는데, 사람들은  큰 외숙 말씀에 동의하는 표시로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없이 일어났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입이 열리면서 말이 술술 나왔습니다.


   "제가 신부 된 지 꼭 십 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안하고 떳떳하지 못하며 부끄러운 게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눈이 둥그래져서 "그게 뭐냐?"  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교무금을 얼마나 내시는가?' 제가 이 생각만 하면 불안하며,  '내 형은 얼마를 내고, 내 동생들은 얼마를 낼까?' 제가 이 생각만 하면 떳떳하지 못합니다.  제가 어딜 가든지 십일조를 강조하는 신부인데, 제 부모가 안 하고 제 형과 동생들이 안하는데 제가 무슨 힘이 생기겠습니까?"


   준비되지 않는 말들이 너무도 쉽게 거침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늘 하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습니다. 즐거운 잔칫날이 마치 초상집처럼 된 것입니다.


   나중에 제가 본당에 가서 집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아버지 마음을 상하게 해 드렸는데 용서하십시오." 하니까 아버지께서 그러셨습니다.  아니라고, 어머니하고 상의를 했는데 이 달 부터 십일조 봉헌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감사를 드렸습니다.  남들은 안 해도 저의부모는 하셔야 신부인 제가 힘이 나게 되고 또 강론을 해도 떳떳한 것입니다.  열심 하셨던 저의 아버지께서도 칠순 때부터 십일조 봉헌을 하셨습니다.  십일조 봉헌은 이처럼 어렵습니다. 어려우니까 그만큼 은혜가 큽니다.


   여러분도 십일조 봉헌을 해 보세요!  세상이 살라집니다.  기도를 해도 꼭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생기며, 무슨 일을 해도 자신감이 주어집니다.  마음이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보화가 담긴 보물단지에 대해 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에 보화가 있듯이 믿음에도 보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주는 보화는 세상이 주는 보화와는 다릅니다.  금이나 은으로 된 십자가가 아니고 지금 우리가 힘들게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가 보화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 감동을 주지 못해도 하느님의 이름과 십자가는 세상에 감동을 줍니다.  십자성호에 보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일조 봉헌 안에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인 보화가 있습니다.  내 것은 결국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합시다.


   좋으신 하느님, 저희가 참 보화를 깨달아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십자성호를 자랑스럽게 그으며 십일조 봉헌을 기쁘게 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 은총 피정 中에서 / 소록도 성당 강길웅 요한 신부 ♣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