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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늘 당신의 자비로 살고, 그 자비를 전하며 살게 하소서!
작성자임성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7-10-08 조회수459 추천수2 반대(0) 신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하느님의 자비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과 자비가

풍성히 뒤따른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에게 측은지심을 가지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려는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100배나 더 받게된다.

 

우린는 살아가다가 힘든 경우를 만난다.

그럴경우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며

그들을 돕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 방법은 언제나 통한다.

남북 정상회담이나 통일도 마찬가지다. 어려움에 있는 북한 이웃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주는 것이다.

결국은 나눔을 통하여 일치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나눔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실제 사회에서

경쟁과 적의에 물들은 사람들에게

호의와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자칫 상처와 치욕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때가 있으며,

때가 되면 하느님을 성실히 믿는 사람들의 치욕을 없애 주신다.

 

대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치욕을 당하더라도,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호의적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대한다.

 

그러다보면 인간적으로 스트레스를 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속으로 끙끙 앓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은 이를 보시고 때가되면 그 치욕을 없애주시는 일을 하신다.

 

그런 일들은 대개 인간의 능력과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거나 처녀가 잉태하는 경우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일들은 하느님을 성실히 믿는 자녀들의 치욕을 없애 주신다. 아버지시니 당연히 자녀의 치욕을 없애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치욕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을 성실히 믿고,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사실 대부분 인간의 개인 역사는

일생 동안 치욕을 벗어나기 위한 역사인지도 모른다.

돈과 명예, 출세가 대우 받는 세상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가 없는 사람들은

인간 차별, 인간 무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일생동안 대부분의 삶을 허우적대다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겠다.

 

인간의 일생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속의 사회 구조가 인간을 그렇게 만든다고 하겠다.

경쟁과 양극화 현상, 부익부 빈익빈의 삶의 수레바퀴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없는 인간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소외 받고, 천대 받으며, 차별 속에서 치욕을 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늘 있어온 사회 현상이라고 하겠다.

 

가지지 못한 자, 그 가지지 못한 대상이 돈이건, 권력이건, 지식이건, 학벌이건, 자식이건 무엇이건 간에 자본주의 사회, 아니 공산주의 사회, 아니 중세 시대 왕정을 포함한 인간 역사의 어떤 사회에서도 그 "가지지 못함"으로 인하여 받는 수모와 치욕의 역사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이것이 인간 세속의 역사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가 있으니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해 온 인간 역사다. 예수님의 사랑과 탄생이 그러한 역사를 알리는 것이요, 부처의 자비와 공자의 인, 간디의 비폭력도 그러한 역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들인 것이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속의 길과 정 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세속에서는 소유의 길을 추구하면, 이 길은 무소유의 길이며, 세속의 길이 경쟁과 출세를 지향하면, 이 길은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협력과 겸손을 추구하는 길이다.

 

세속 사회의 길은 끊임없이 채울려고 하는 길이지만,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 이웃을 훈훈하게 하는 길이다. 그런데,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도 두가지 유형이 있다.

 

한가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이 길을 가려는 사람과 거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거나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이 길을 가는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이 길을 가는 사람과 거의 혹은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이 길을 가는 사람과의 차이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 중의 하나가 삶의 원칙을 무엇으로 삶느냐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무조건적인 사랑" )

 

본인 삶의 원칙을 "사랑"으로 삼은 사람들은 그 살아가는 원칙이 사랑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을 많이하더라도 그 원칙대로 살기에 갈등없이 그리고 무리없이 그냥 사는 것이다.

 

즉, 사랑을 많이하면 할수록 본인 삶의 원칙에 충실하니 아무런 갈등이 생기질 않게 되는 것이다. 지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원칙이 세속적이거나, 원칙이 없거나, 혹은 삶의 원칙을 사랑으로 삼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스트레스가 생기고 힘들며, 쉬 지치게 된다.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방향과 자신의 삶의 원칙이 일치하지 않는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심한 경우는 끊임없이 갈등하면서 일생을 허우적대면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일생을 세속의 가치를 지향하는 삶과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을 지향하는 삶 사이에서 왔다 갔다하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을 사는 경우도 많다고 하겠다.

 

대부분 차지도 덥지도 않는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들은 그래서 안된다.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서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예수님의 삶을 지향하는 삶을 사는 크리스챤이라면 우리는 더이상 왔다갔다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우선 우리 크리스챤들은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삶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들을 감동시켜 나가야 한다. 감동은 내가 "주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 때, 그 무조건적으로 주려는 삶을 통해서 무소유의 삶을 지속적으로 보여 줄 때, 서로 더 가지려고 하는 이 세속의 사막같은 사회구조에 오아시스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생명수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주려는 삶, 언제나 낮아지려는 삶, 언제나 비우려는 삶,

언제나 버리려는 삶,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려는 삶,

언제나 남을 위한 삶,

언제나 너그러운 하느님의 측은지심과 자비로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을 맞이하는 삶,

원수도 사랑하는 삶, 나에게 상처를 준,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비로 잘해 주는 삶을 잘 살려면,

즉 갈등없이 스트레스없이 잘 살아가려면,

늘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나자신의 삶의 원칙을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으로 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증거 함으로써

우리의 이웃들을 감동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삶의 원칙으로 정하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니,

온 세상 만물이 다 형제 자매가 될 것이요,

모든 이웃들이 다 자비의 대상이 될 것이요,

모든 세상의 사건과 현상들이 모두 다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일들이 될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아들을 잉태한 일도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일이요,

처녀가 잉태하여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거룩하며 훌륭한 인물을 탄생시킨 것도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낸 일이라!

 

 

오직 우리가 할일은 성모님의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이루어 지소서."(FIAT)라고 하신 성모님 모습을

우리 삶의 원칙으로 삼는 것 뿐일지니, 가라 그러면 가고, 오라 그러면 오는

백부장의 삶처럼 순명하는 삶을 살며,

나머지는 모두다 하느님의 뜻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뿐이로다.

 

이럴 때 우리 삶은 자유와 해방 속에서 이웃들을 보살피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어머니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웃을 보고, 이웃의 행복을 진정 기뻐하게 된다.

 

이웃의 행복을 기뻐하게 되면 그때는 하늘나라가 펼쳐지게 된다.

이 세상에 하늘나라가 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으로 살때, 우리의 미래 삶은 간단하다. 두가지 경우이다. 

이웃이 우리에게 잘못할 때와 잘할 때 우리의 반응은 두가지 경우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마음 속에 삶의 원칙으로 품고 살때,

우리에게 잘못하는 사람들은 용서하고 하느님의 자비로 감싸 않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그 이웃도 맛보게 해 주는 것이다.

즉,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잘못하며 다가올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잘해줄 때도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하며,

그 역시 우리 삶의 원칙인 하느님의 자비로 응답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얼마나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낼 수 있는 만남이 이루어질지

생각하니 자못 흥미진진해 진다.

 

내가 할 일은 항상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낼 수 있는 만남을

마음 속으로 상상하는 일로 충분하다.

머리카락 숫자를 아시고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주님의 허락이 없으면 안 떨어진다고 하셨듯이,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주님!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언제나 저를 통해서

당신 자비를 드러낼 수 있는 만남이 이루어질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언제 어디서라도 하느님의 자비만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늘 하느님의 자비만을 생각하도록 허락하소서.

 

임마누엘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늘 당신 자비 속에서 하느님의 참 사랑과 하느님의 참 기쁨과 하느님의 참 평화가

가득한 삶을 살고 이웃에도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우리 크리스챤들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마음에 품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측은한 마음으로  도움을 필요로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도구가 되게 허락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모두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일을

당신이 하늘나라로 부르실 때 까지 하게 하소서!

 

늘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 당신의 자비를 마음에 품고,

늘 측은지심으로 이웃을 대하고,

늘 이웃에게 온기를 주도록, 늘 호의로 대하도록 

허락하소서!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늘 당신 성령의 사랑과 자비를 마음에 품고,

늘 당신의 자비를 눈과 입과 귀에 담고 살도록 허락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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