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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월 13일 야곱의 우물 -마태 3, 13-17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3 조회수460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3,13-­17)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바야흐로 주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첫 소명은 다름 아닌 요한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 틈에 끼어 회개의 세례를 받고자 하십니다(13절). 단번에 그분을 알아본 요한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14ㄴ절)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무리가 요한을 찾아왔을 때는,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3,7ㄴ)라며 독설을 퍼붓던 그였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3,11) 분을 고대하던 요한 앞에 오히려 주님께서 머리를 숙이고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십니다. 그럴 수는 없다고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14ㄱ절)라며 몸을 조아려 예수님을 말리지만(14ㄴ절) 소용없습니다.
 
요한은 도시가 아닌 광야에서 설교를 하였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광야까지 몰려갔고, 그의 설교에 모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갈수록 불어나 그 세력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임무는 그저 준비하는 일일 뿐, 그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을 예고하기 위해 앞서 온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도 요한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요.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에 왔고 오로지 주님이 오실 길을 마련하는 소명으로 살아온 요한이었기에, 자신 앞에 한없이 몸을 낮추신 그분의 모습에 많이 놀랐을 겁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몫과 소임을 존중하셨을 뿐더러, 자신의 소명 또한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과 예수님 단 두 사람만 등장하지만 실제로 세례 현장에는 세례 받을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 없이 요한의 신호에 따라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는 무리와 함께 서 계셨을 것이라 합니다. 죄인들 무리에 섞여 계신 예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요르단 강에 머무시는 동안 세례 받는 이들과 연대감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강물에 몸을 담그시면서 죄 없으신 분이 인간의 죄를 떠맡으십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그분을 두고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이사 42,2)라고 한 표현이 떠오릅니다.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실 이’께서는(42,1) 묵묵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15절)라며 더 큰 뜻을 내다보십니다.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의로움’이라는 게 무엇일지 자못 궁금합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처럼 자신을 낮추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아마도 ‘의로움을 이루는 일’은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대로, 소박한 베들레헴 마구간과 요란스럽지 않은 요르단 강 세례터와 담담히 유혹을 견디신 광야에서 시작되어, 치열하게 마지막 소명을 다하실 십자가상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줄곧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밝히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이 대목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시자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16ㄴ절)고 합니다. 본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신데 강 속에까지 몸을 낮추시자 하늘이 열립니다. 그분을 향해 열린 하늘에서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예수님이 직접 보셨습니다(16ㄷ절).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님 자신의 체험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영이 내려온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자로 소명을 받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자 그 이상이시라는 것이 곧이어 입증되는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ㄴ절) 하는 하늘의 소리에서입니다. 첫 소임에 충실한 아들에게 내리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아버지께 사랑받는 아들, 자랑스러운 아들’로 인정받은 기쁨에 감격하셨을 겁니다. 아울러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셨겠지요. 그래서 예수께 세례는 더욱 큰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께 주어진 전권은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입증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이사 42,1)라는 확신으로, 예수님은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실’ 것입니다(이사 42,4 참조).
예수님이 하느님의 충실한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짧은 소견으로 예수께 세례가 타당하기나 할까 싶지만, 이 세례를 건너뛰셨다면 성령에 사로잡히는 일도 없이 아버지의 칭찬도 놓치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한참을 허송세월하셨을 듯싶습니다. 아마도 이 세례 체험이 공생활 내내 예수님을 굳건히 지켜주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사춘기 때 세례 받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원하지도 않은 세례를 받은 터라, 세례 때 찍은 사진을 보면 뿔난 도깨비마냥 입이 이만큼 나와 있습니다. 다행히 어른이 되어 친구나 후배들의 대모로 세례식에 참석하면서 늦게나마 세례성사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지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인정받는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철부지적 얼렁뚱땅 넘긴 세례의 은총을 보상받고 싶기도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하느님 영에 젖어 사랑한다는 하늘의 고백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용서를 가슴 깊이 체험한다면 하느님의 딸이 된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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