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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을 모독하는 자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28 조회수541 추천수6 반대(0) 신고
 
 
 
 
 

<성령을 모독하는 자> ... 윤경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 3,28-29)



성령이 무엇이기에 사람이 짓는 모든 죄와 신성을 모독하는 어떤 말도 용서받을 것이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오는 것이라 보셨습니다. 곧 성령이 하느님 아버지와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궁전이었는데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지어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공간을 제한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자아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떠난 자리를 인간의 참 모습으로 알고 산 것입니다.


성령은 영원히 죽지 않는 하느님의 영인데 그 성령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현세에서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새로운 몸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쫒아내고 성령이 필요 없다고 여기고 사는 사람은 자기가 전부인줄로 알기 때문에 생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누리는 생명의 시간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나마 제대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생명을 단축하고 맙니다. 또 새로운 몸으로 탄생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한 생각을 일으켜 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그리고 또 자기 생활을 반성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흉포한 죄를 지은 사람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단초입니다. 그것이 성령은 아니지만 성령께서 거하셨다는 흔적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인간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모독한다면 그는 성령을 내치는 셈이니 어디서 성령의 용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어디서 또 구하겠습니까?


신선모독은 이름이나 부적 등등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터부입니다. 하느님은 아닙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나 심지어 현대인들마저 어떤 터부를 설정 해놓고 마치 그것이 신성이나 되는 양 떠받들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들이 하느님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들이 꾸며 놓은 외적 모습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쌀을 여러 번 도정하면 보기에 좋은 색깔의 백미가 됩니다. 그러나 귀한 영양분은 소실되고 맙니다. 덜 도정한 현미는 보기에 누렇고 씹기 어려워도 영양분은 그대로 보존되는 법입니다. 과식과 미식에 탐하다 보면 당뇨병 등 원치 않던 성인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당뇨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백미보다 현미가 더 좋다고 현미밥을 지어 먹도록 합니다. 원래 쌀에는 영양분이 충분히 있으나 사람들 기호에 맞게 백미로 만들다 보니 영양소를 없애 버린 결과 쭉정이만을 먹고 산 꼴입니다.


성령과 인간 자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원래 인간 안에 거하셨는데 사람들이 생활할 때 귀찮고 거추장스러워 덜어내고 말았습니다. 죄짓고 자기를 내세우는데 걸림돌이 되니 스스로 내동댕이쳐 버렸습니다. 인간들 기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은 성령을 지키기보다 신성한 터부를 만들어 자기 나름대로 신을 정의하였습니다. 그리고선 그 터부가 마치 하느님인양 우러러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신성, 즉 터부에 빠져 각종 규제를 만든 유대주의를 질타하셨습니다. 614가지나 되는 금지 조항으로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유대인들의 거짓된 신성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심지어 성령 자체이신 예수님이 자기들 터부를 어겼다고 베엘제불이라고 몰아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생명을 새롭게 세우시는 성령의 은총을 악령의 두목이라고 여겼으니 그 잘못은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새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다시 사시도록 하려면 우리는 무아(無我)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대로 행동하는 자아를 없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아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아가 득세하는 자리에 하느님과 이웃을 들여다 놓으라고 하십니다. 수련이나 수양을 통해 무아에 이르는 길도 있겠지만 그 자리에 하느님과 이웃을 먼저 귀하게 여기는 발상의 전환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우선하는 태도에서 방향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돌리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 회개를 통해 인간은 성령께서 거처하실 자리를 마련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거처하실 자리를 만들어 놓지 않고는 새 생명은 없게 됩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사신다면 하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와 있다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게 빈자리를 내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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