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펌 - (19) 열정보다 중요한!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28 조회수515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3년 12월27일 토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ㅡ요한1서1,1-4;요한20,2-8 ㅡ

 

(19) 열정보다 중요한!

                    이순의


             

ㅡ그때나 지금이나ㅡ

몇 해 전에 신학원에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관한 연극에 참여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게 요한의 역할이 주어 졌다.


바로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나는 무덤까지 달려갔다가 베드로에게 무덤에 들어가는 역할을 양보해야 하는 중차대한 순간을 맞이했는데, 나는 속으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 때 요한은 무슨 심산으로 베드로에게 무덤에 들어가는 걸 양보 했을까? 요한이 먼저 들어갔으면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확인한 제자가 되었을 터인데, 지금 이 연극에서 만이라도 역할을 바꿔, 그냥 요한 역할을 맡은 내가 먼저 들어가서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을 차지하면 안 될까?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그 때 요한을 맡은 나더러 함께 참석하는 지인들께서는 요한과 성격이 아주 비슷하다고 잘 어울린다고 하며 웃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라면 먼저 무덤에 들어가서 성서의 기록을 달리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더니, 어떤 분께서 아마 주님께서 반석이라고 뽑으셨던 분에 대한 요한의 착한 배려였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고, 열정이 불타서 달려오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돌아가신 주님의 시신을 확인한다는 것이 겁나고 두려웠을 거라고도 얘기 하면서 나름대로의 정설들을 열심히 늘어놓았었다.

 

어찌되었든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열정과 요한에게 주어진 주님의 신뢰심은 대단 했던 것 같다. 베드로를 교회의 머리로 세우셨다면, 요한에게는 교회의 안방마님 같은 역할을 주시지 않았나 하는 나의 좁은 식견이다.

 

지금의 교회 삶에서도 우리는 주님 시대의 신자들 모습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어쩌면 더 치열한 모습이 종종 발생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신심의 척도를 가늠 한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신자 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한 때는 열정이 샘솟는 때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어떤 열정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본인 스스로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식별되지 않지만 어쨌든 열정에 불사르고 싶은 때가 있다.

 

분명히 더 쉬운 일을 어떤 형제나 자매께서 함께 하기를 요청 했을 때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외면을 하다가도,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한 마디면 교회의 모든 짐을 혼자 지고도 남는 열정을 쏟기도 한다. 때로는 그 반대의 상황으로 자기가 맡고 있는 역할의 어느 범위를 다른 교우가 넘보는 것조차 거부하고, 결과나 판단에 대하여 뿌연 안개마저 쳐 놓고,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시야에 혼자만이 등장하고자 하는 단역배우가 되고 싶어 할 때도 있다. 그러한 열정으로 인하여, 사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교회 삶이 사람으로 인하여 소용돌이가 되기도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권한이 있는 곳에 들고자 하는 열정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을 아주 좋게 생각한다.

 

열정을 쏟아 봤어야 상처도 받고, 상처도 받아 봤어야 사람을 알고, 사람을 알아야 자신의 한계를 터득하고, 한계를 터득해야만 진정으로 부끄러운 자신을 발견하며, 자신을 발견 해야만 주님 앞에 겸손 할 수 있고, 주님께 대한 솔직한 겸손은 사람을 사랑하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 삶이 미지근했던 교우들 중에는 간혹 어쩌다가 드문드문 수십 년을 신자 생활을 하면서도 교회 삶의 맛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는 좀 어려운 갈등이 오더라도 경험은 곧 교육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크게 우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의 넓으신 지혜와 고른 배려를 주장 할 때가 있다. 때로는 어쩌면 성직자나 수도자들 중에서도 열정을 불  살라 보지 못하고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사랑은 미완성인 채로 그럭저럭 자신이 안고 사는 만큼의 사랑을 참 사랑인 것처럼  실천하거나 아는 척 하다가 문지기 베드로 앞에 서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은 요한 사도 축일이다. 주님께서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으면 "천둥의 아들"이라고 했겠는가! 나는 연극을 하면서 요한의 심정을 자꾸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사랑하는 주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요한의 슬픔은 다른 제자들과는 좀 달랐을 것 같았다. 열정이 넘친 만큼 주님의 꾸중을 더 들어야 했던 요한에게는 오히려 열정과는 좀 더 거리가 먼 잔잔하고 섬세한 일들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베드로처럼 교회를 맡거나 큰일을 보장 받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든지, 주님의 임종을 직접 목격하는 아픔을 견디면서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시신을 거두어야 하는 일이었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주님의 시신을 안고서야 자신의 앞선 열정들로 인한 회한으로 뉘우치며 슬퍼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무덤에 달려갔을 때는 누구보다 먼저 주님을 만나 주님께서 천둥 같은 자신을 믿어주신 사랑을 털어 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죄송해서 너무나 눈물이 나려고 해서 자신의 손으로 주검을 거둔 무덤에 들어가 차마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기에는 대단한 떨림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요한의 감동은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는 첫 사람으로 뽑힌 선택된 사랑까지도 기꺼이 베드로에게 무덤에 드는 걸 양보했을 것이다. 나는 요한의 마음으로 베드로의 역할을 맡았던 자매님께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양보하고 싶었다.

 

오늘 요한사도 축일을 맞으면서 현대를 사는 나 자신도 얼마나 어리석은 이기심과 자기관점으로 요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모른다. 열정을 쏟다가 상처도 받아보고, 사람도 알아보며, 내 자신의 한계에 넘어져서 좌절하다가 주님의 넓으신 용서 앞에 겸손을 배워가면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종착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교회의 안방마님과 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주셨듯이, 교회 삶은 주님의 뜻이 함께하고 있으며, 교회 삶을 통한 교육들을 경험하게 하고, 오늘도 나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두에게 소명을 부여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의 사랑과 신뢰심은 그 때나 지금이나 각자 각자에게 열정보다 중요한 알맞은 자리를 마련하고 계시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정말로 부족한 졸 글을 올릴 수 있는 것 또한 주님의 안배가 너그러이 몫을 정하셨다고 믿으며,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또 주님의 마음이 나를 인도 해 주시는 날까지만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지인들의 농이 농담이 아닌 진담이 되어 요한사도께서 받으신 그 사랑 그대로 닮아 받고 있다고 믿고 싶다. 비로소 진정한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다고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   ㅡ요한1서1,4ㅡ

 

<그 공연 때 나는 베드로의 수염을 아주 그럴싸하게 만들었는데, 그 분은 그 수염을 기념으로 가지고 싶어 하셔서 가지시라고 드렸었다. 안부 전하고 싶다. 건강하시지요?>

 

 

<왼쪽 베드로, 오른쪽 요한>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