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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65) 입영 장정께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01 조회수470 추천수2 반대(0) 신고

2008년3월1일사순 제3주간 토요일 -호세아6,1-6. 루카18,9-14-

 

    (465) 입영 장정께

                이순의

 

 

 

-입소대성당 현관-

 

 

며칠 전에, 군대를 갔는데 군인이 되지 못하고 전경생활을 하는 아들이 다녀갔다. 벌써 1년이 된다. 아들을 군에 보내보고서야 아들 가진 어미의 심정을 다르게 알아가고 있다. 자식이란 훈육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자식 그 자체가 부모에게 스승이 아니던가?! 자식 때문에 알아가는 세상이 아니던가?! 자식 때문에 세상 만 가지를 이해하려고 낮추는 것도 배움이 아니던가?!

아들이 훈련소에 있을 때 내준 숙제가 있었다. 동료가 성당에 다녀보고 싶다는데 선교할 수 있는 내용을 A4지 한 장 분량으로 써서 보내주라는 요청이었다.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한 장을 썼다가 짝꿍에게 퇴짜를 맞았다. 젊고 혈기 왕성한 장정들이 여배우 사진이라면 모를까 너무 진지한 내용이라서 가슴에 새겨지기는커녕 선교가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쓴 김에 한 장을 더 써서 보냈었다.

그런데 문득, 그 선교용 글이 어떻게 쓰였는지 1년이 다된 지금에야 궁금한 것이다. 포상휴가로 잠깐 집에 온 아들에게 묻고야 말았다. 그런데 아들은 고개를 흔들며 묻지도 말고, 알지도 말란다. 엄마가 써 준 그 편지로 인하여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군대기밀이라고 생각하고....... 오랜만에 살았던 본당에 다녀왔다. 서울 살이 고향 같은 본당이라서 가보고 싶어서 갔더니 그 보좌신부님 계셔서 써 놓은 이 글이 생각났다.

신부님들의 강론에도 색깔이 있다. 오래오래 필기를 하다가 보니 그 색깔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진다. 세월만큼, 영성만큼, 생활만큼, 기도만큼, 사랑만큼, 성격만큼, 환경만큼, 처하신 마음만큼, 이루어야할 의지만큼....... 다 다른 모습은 같은 복음을 맨 날 읽어도 강론은 늘 새롭게 쓸 수 있는 은총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행복하다. 오랫동안 묵상글을 쓰지 않았으니 그 보좌신부님의 강론을 행복으로 전달해 드린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전에 써놓은 글로 펌 글이 아닌 묵상글로 올려보고자 한다.

거의 30년을 노트 필기한 강론 중에서 그 신부님께 한 가지 1등으로 꼽아드리고 싶은 것! 그 신부님의 강론은 들어서 노트필기하기가 완벽하시다. 그만큼 전달되는 폭이 정확할 것이다. 말하자면 강론의 정석(定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연륜이 오래지 않은 보좌신부님이신데도 늘 대단한 감동을 주신다고 생각했었다. 그 본당 살이 할 적에는 한마디 감사도 전해드리지 못했는데 떠나온 오늘에서야 늦은 인사를 드리고 왔다.    

<신부님, 강론 진짜 잘하시고 좋아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훈련병 박**의 엄마 이순의 입니다. 너무나 막연한 요청을 받고 그 대상을 젊고 튼튼한 훈련병으로 삼습니다. 솔직히 무엇을 써 드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지만 제가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 부활 제2주간입니다. 성당에 앉아 미사(예배)에 참례하고, 독서와 복음(성서말씀)을 봉독하고, 강론(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출발선상의 청년께서 어렵지 않게 근접할 수 있는 오늘의 강론으로 **이가 내준 숙제를 완성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31- (오늘의 성서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 기쁜 소식, 복된 말씀, 이라고 합니다)

강론 -권구택 안드레아 신부님(서울교구 석촌동 본당 보좌신부)-

-우리가 살다가 보면 우리 몸의 여러 곳에 흉터가 생깁니다. 흉터란 흉한 자국을 말합니다. 실수를 하여서 생긴 상처도 있고, 남이 나에게 입혀서 생긴 상처도 있습니다. 상처를 원해서 흉터를 남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살다가 보면 수없이 많은 상처들이 생기게 되며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게 됩니다. 흉터는 보기도 싫습니다. 더구나 남들은 내 몸의 흉터를 더욱 싫어하고 징그러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흉터가 예수님께도 있습니다. 두 손과 발에 못 박힌 상처가 있고, 가슴에는 창으로 찔린 상처도 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에 찔리고, 온 몸에는 채찍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처참한 예수님의 상처를 징그럽다고 하지 않고 거룩한 상처 5상이라고 합니다.

승리자로 오셔서 백성들을 구하기로 약속하신 메시아께서 처참한 십자가형으로 죽어버렸습니다. 그토록 따르던 예수의 제자들조차 겁에 질리고 무서워 도망을 치고 다락방에 숨기까지 하였습니다. 스승이신 주님을 모른다고 배신한 죄책감도 두려웠고, 그토록 믿고 따랐던 스승의 처참한 죽음도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에 죽었다는 스승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빌어주시며 당신의 두 손과 발의 상처와 옆구리의 상처까지도 보여주시며 안심을 시키십니다. 너희가 나를 배신하고 도망을 가서 숨었다고 탓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얼어붙은 마음과 두려움들을 녹여주시며 평화를 빌어 주시기까지 하는 주님을 알아보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후략- ※이해를 위하여 약간 변형함※

-->저는 이 강론을 들으며 어른이 된다는 것은 육신에도 가슴에도 늘어나는 흉터의 숫자와 비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신의 흉터도 남에게 보이기 싫지만 마음의 흉터 또한 양심과 타협할 때가 많습니다. 대통령도, 거지도, 학자도, 창녀도, 누구나....... 수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는 흉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 상처를 열어 보이며 <내 고통 위에서 너희는 평화가 가득 하여라>고 빌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는지요? 더구나 나를 죽였고, 배신하였고, 도망까지 친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줄 수 있을는지요? 저라면 저에게 상처를 준 원인들을 생각하며 아파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스스로의 가슴에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후비느라고 꼭꼭 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상처를 확인시켜주시며 <너희가 준 고통으로 내가 죽었지만 나는 다시 살아났다. 너희가 어서 빨리 기운 차리고 평화롭기 바란다.>라고 입김을 불어주십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찾아가서 용서를 청할 수 있다면 스스로가 얻는 부끄러운 감사와 평화가 얼마나 크겠는지요?! 반대로, 당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예수님처럼 그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큰 치유를 받겠는지요?! 그러나 한없이 나약한 상처투성이의 사람들은 흉터를 안고서 용서를 빌 줄도 평화를 받을 줄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 예수그리스도 품에 머물러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당신에게는 흉터 없는 평화만 가득 하시길 빕니다.

 

 

 

 

-육군훈련소 연병장-

 

 

†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훈련병 박** 엄마 이순의 입니다.

성당에 다니고 싶다는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고민 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성당에 다니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짠~ 하고 나타나신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믿게 될 텐데, 분명한 것은 단 한 번도 제 앞에 하느님 친히 나타나주신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성당에를 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저의 모든 존재적 가치가 그분이 아니라면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불확실한 명제까지도 확실해져버린 신앙인이 되어 있습니다.

성당에 다녀보고 싶다. 구요? 그럼 다녀 보세요. 그것이 정답입니다.

제가 성당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던 초등하교 졸업반 시절에 먼 이국의 독일에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큰언니가 그곳에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고, 세례를 받았다고, 그러므로 부모님과 동생들이 성당에 다니기를 원한다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그 후로 먼 나라에서 날아오는 편지의 서두에는 늘 <† 찬미 예수님> 이라고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기억되는 편지의 내용은 전혀 없으나 <† 찬미 예수님>이라고 서두에 써진 항공우편은 선명하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성당에 가지 못했습니다.

고향마을에서 읍내까지 나가야 하는데 읍내의 어디쯤에 성당이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어린 마음에 큰언니가 보내주는 그 <† 찬미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하여 신기한 마음만 들었을 뿐입니다. 소녀의 눈으로는 읍내 나가는 신작로가 두렵기도 했고, 또 그렇게 넓어 보이는 읍내의 어디쯤에서 성당을 찾다가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집에 돌아올 수 없을까봐 겁부터 났습니다. 그래서 큰언니가 귀국하는 날까지 그 <† 찬미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하여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단발머리 졸업반 여중생이었을 때 큰언니께서 귀국하셨습니다. 그토록 신기한 <† 찬미 예수님>이라는 분을 상상하며 큰언니를 따라서 읍내의 성당에를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4년여를 기다려서 가본 성당에는 <† 찬미 예수님>이라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냥, 간혹 텔레비전 같은데서 본 십자가에 목각인형인 사람이 걸려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존재가 살아서 내려오지도 않았구요. 맨 날 맨 날 그대로 걸려있었습니다. 그와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큰언니를 따라 성당에는 다녔지만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의미가 있고, 뭘 알아야하고, 뭔가 삘이 팍 꽂혀야 되는데, 큰언니가 보내주는 편지지 맨 위에 써진 <† 찬미 예수님> 만큼도 신기하지 않았고, 재미도,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7년을 다녔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참으로 잘한 게 있다면 아무런 삘이 없는 그 성당이라는 데를 7년 동안 그냥저냥 다녔다는 것입니다. 왜 다녔는지 저도 모릅니다. 그냥 학교에 가듯이 일요일이면 어디서든지 성당에를 다녔습니다. 그렇다고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세례가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열심히 라는 말이 어울리도록 마음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 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요. 의미 없는 7년을 채운 보답인지? 나날이 성령께서 동반하심을 실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느 사람들보다 시련과 굴곡이 많았을 때도 그 성령의 능력은 저에게 힘의 근원이 되어 살아 움직이셨습니다. 벽에 걸린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어느 날부터 제 가슴에 오셔서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사랑의 결과로 하루 한 순간과 영혼의 안위까지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냥 조건 없이 성당에 다닌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초대 하신 것 같은데 성당에 다녀보셔야 그분을 만나실 수 있지 않겠는지요?! 성당에 다니고 싶으면 그냥 다녀보십시오. 라고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멘!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호세아6,3ㄴ-

 

-연무 육군훈련소 입소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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